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46화 (46/231)

46화

과연 진심처럼 보였을까. 릴리의 표정을 보니 아마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계속해서 침착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취했다.

“폐하께서 보내 주신 정원사와 함께 제 정원에 연못을 만들기로 했어요. 폭풍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그곳에 작은 정자도 만들어 둘 계획입니다. 볕이나 비를 피해 잠시 쉴 수 있도록요.”

“좋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좋은 계획이란 거야.”

별것도 아닌데 카르낙은 지레 찔려 곧바로 제 말을 정정했다. 세일린은 릴리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녀는 여전히 침착했다. 카르낙의 태도에 동조된 것은 아마도 저 하나뿐인 것 같았다. 그 점이 부끄러워 세일린은 다시 낯빛을 붉혔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시 한번 폐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서예요. 덕분에 성안에서의 생활이 한결 즐거워졌습니다.”

“다행이야.”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는 단답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단 한 순간도 릴리가 불행하길 바란 적은 없다. 그녀에게 단 한 톨의 관심조차 없었던 때에도 그랬다.

릴리는 방그레 웃어 보이고 곧 무릎을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뭐? 카르낙이 미간을 구겼다.

“가려고?”

벌써? 와서 나눈 대화라고는 겨우 한두 마디뿐인데?

“예. 아직 초상화가 완성되지 않아서 오후 나절은 꼼짝없이 글렌에게 잡혀 있어야 하거든요.”

글렌. 솜씨 좋은 화가지. 신분이 비천해서 잡일만 도맡아 하다가 왕조가 뒤바뀌며 벼락출세를 한 궁정 화가다. 카르낙의 초상화도 제법 훌륭하게 여러 번 그렸다. 그러니 분명 릴리의 초상화도 아주 아름답게 그려 놓으리라.

그래. 글렌에게 잡혀 있어야 한단 말이지. 오후 내내. 그놈은 내내 릴리와 함께 있다. 저는 기껏해야 이렇게 마주치는 정도가 고작인데 말이다.

릴리를 피해 보고자 발버둥 친 것은 저이건만 너무 빨리 작별 인사를 하는 릴리의 태도가 허무했다. 염병할. 뭐 하자는 거지, 대체. 카르낙 발투만. 대체 어쩌고 싶은 건가. 그녀를 피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같이 있고 싶은 건가. 자신의 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더 머물러 주길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서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라는 것인지 그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머저리란 말인가.

“혹여 하실 말씀이 있으면 에이가를 통해 전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찾아뵙겠습니다.”

“…….”

그 말은 자신이 그녀를 찾기 전엔 오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릴리라면 저의 불편함을 눈치채고 곤란하지 않도록 먼저 배려할 것이다.

“그럼 부디 편안한 오후 되십시오.”

“릴리.”

아니야. 나는 너를 불편해하는 게 아니야. 행여나 내가 너를 싫어서 피한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너와 같이 있는 것이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난 그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정리하여 쏟아 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섣불리 쏟아 내면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도 무서웠다. 그래서 말문을 열었어도 쉽게 내뱉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릴리는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의 부름을 작별을 고하는 인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르낙은 유유히 사라지는 릴리를 잡지 못했다. 몇 번이고 돌아보며 제 주인을 따라 종종거리며 사라지는 세일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행여 저의 갈피를 잡지 못한 행동이 릴리에게 상처를 주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속이 탔다.

릴리, 난 그저….

너를 너무 원하는 내가 무서운 거야.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초상화는 진작에 밑그림과 칠을 마쳤고 드문드문 글렌이 캔버스를 가지고 찾아오면 짬을 내어 얼굴을 보여 줄 뿐 그 이상 시간을 쏟는 일은 없었다.

모래 먼지로 뒤덮인 정원을 산책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성안을 배회하다 카르낙과 다시 만나면 또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릴리는 대장간을 찾았다. 오래전 제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물끄러미 앉아 지글지글 석쇠가 달구어지는 대장간의 화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군 쇠를 망치로 내리치는 날카로운 소리, 그때마다 튀어 오르는 새빨간 불꽃과 물에 담글 때 나는 연기가 그녀를 지루할 새 없이 만들어 주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십니다.”

스코크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간 빛의 액체가 든 잔을 건넸다.

“드세요. 누님이 만드신 가향주랍니다. 들에 핀 꽃들로 만들었는데 향이 아주 일품이지요.”

릴리가 몇 번 술의 향을 맡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향이 아주 좋네요.”

“귀한 손님에게만 내어 주는 귀한 술입니다. 아가씨.”

스코크의 말에 릴리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영광입니다, 스승님.”

스코크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릴리에게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오신 겁니까 아니면 뭔가를 피하려고 오신 겁니까?”

릴리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대답했다.

“둘 다요.”

“그러시군요.”

“…어쩌면 둘 다 아닐 수도 있고요. 애매하죠?”

스코크는 껄껄 웃었다.

“예. 애매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명확한 것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모호한 것도 있는 법이죠.”

릴리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턱을 괴었다. 상념에 잠겨 한참 불꽃을 바라보더니 이내 물었다.

“폐하는 어떤 분이실까요?”

아하. 그 문제. 이제야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스코크는 몰래 미소 지었다.

“흠. 폐하는… 제가 아는 사내 중 가장 강한 분이시지요. 또 가장 잘생기셨고요. 또 가장 건장하시지요.”

“또 무척 어려운 분이시고요.”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때론 쉬운 것도 어렵게 보려 하면 어렵게 보이니까요.”

“어떻게 다가가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릴리는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런 이야기를 또 어디 가서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카르낙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머릿속에 곱씹었다. 처음엔 그를 보며 낙담했다.

엘버그로 돌아오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음은 물론이요, 도망칠 궁리도 참으로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잘해 주고 싶었다. 돕고 싶었고, 온통 고통과 불행뿐인 그의 삶에 미력하나마 행복이 깃들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부담이 되었던 걸까. 그의 조심스럽고 경계심 많은 성정을 배려하지 못한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분명 아까 전 카르낙과의 만남으로 릴리는 상처를 받았다. 다만 모두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 넘어간 것뿐이다.

누가 보아도 저와 단둘이는 있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세일린의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에게도 누를 끼쳤다. 저 혼자 얼마나 불안에 떨며 눈치를 살폈을까, 그 생각이 더해지자 더 침울해졌다.

“폐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 모든 것에 전력을 다했는데 지금은 한발 물러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꽤나 무심하신가 봅니다. 왕이 아니라 사내로서의 폐하께서는요.”

“아직 제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겠지요. 결국 저의 모자람 때문이네요.”

“모자람을 아는 이는 결코 모자란 법이 없답니다. 언제나 배우려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생각이 많아지셨다면 차라리 쇠를 두드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요?”

“예.”

스코크는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릴리도 호기심이 동한 눈으로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았다. 스코크는 열기에 땀으로 범벅이 된 건장한 사내의 앞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숯으로 거뭇해진 얼굴에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샌디 블론드 머리색을 지닌 사내는 제 코를 한번 쓱 훔치고 릴리를 바라보았다. 약간 얼이 빠진 듯 녹색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스탠은 이 대장간의 기술자 중에 가장 다재다능하지요. 그는 무기뿐 아니라 아름다운 금속 공예와 유리 공예에도 능하답니다. 아가씨께 대장간 일을 알려 주는 데에는 아주 제격일 겁니다.”

“아가씨. 세바스탠이라고 합니다.”

스코크가 소개를 마치자 스탠은 정중하게 그녀의 앞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릴리는 방긋 웃었다.

“반가워요, 세바스탠.”

***

“릴리가 어디를 가?”

카르낙이 편지의 인장을 뜯다 말고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로로는 정확하게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대장간이요.”

“거긴 어제도 갔다고 하지 않았어?”

“예. 그리고 그제도요.”

편지를 펼치는 손이 느려졌다. 펼치려던 건지 다시 접으려던 건지 모호한 채로 그는 대체 왜 릴리가 대장간에 그토록 열심히 드나드는지 유추해 보려 애썼다. 종일 쇠붙이만 두드리는 덥고 시끄러운 곳이 뭐가 좋다고. 스코크에게 제 아비에 대한 이야기라도 물어보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자신의 출신과 배경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핏줄에 대한 애틋함이나 부친에 대한 그리움도 그다지 없어 보였다. 스코크는 실력 못지않게 훌륭한 인품을 지닌 늙은이이니 그에게 의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법 꼬장꼬장한 노인네지만 릴리에게까지 그러지는 못하리라. 릴리를 꼬장꼬장하게 대할 수 있는 이는 사실 매우 드물 것이다. 여자라곤 손톱만큼도 모르는 저조차도 그녀에게는 불가항력적이지 않은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자 청하기도 했고 말이다.

“듣자 하니 세바스탠이란 젊은 사내와 이것저것 만드는 것에 심취해 계시다고 합니다.”

젊은 사내? 카르낙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뜻과는 달리 미간이 당길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야 말았다.

“뭐 하는 자야? 세바스탠이란 놈은?”

“무기뿐 아니라 말발굽이나 연장을 만드는 데도 능하고 유리와 보석 세공에도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스코크가 아끼는 제자이자 금발에다 잘생기고 건장한 미혼남이라 성내 여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로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소상히 소개했다. 일부러 성질을 돋울 요량으로 한 말이란 것이 너무도 뻔한데도 카르낙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놈이랑 같이 쇠붙이를 붙잡고 망치를 두드리고 있다는 건가? 대장일을 알려 준답시고 릴리를 뒤에서 껴안다시피 한 채로 같이 쇠망치를 잡은 모습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결혼이 코앞인데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단 말이지. 그것도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엘버그의 사람들은 대장장이들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쇠붙이로 근사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꼭 마법사처럼 느껴져 모두가 우러러본다나 뭐라나.

그는 손에 든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뜯고 활자를 읽어 내려갔지만 까막눈이 된 듯 무엇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진 이따 다시 하지.”

드디어. 로로는 지극히 안정적인 톤으로 기꺼이 답했다.

“예.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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