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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5화 (45/231)

45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엘버그인들에게 받은 대로 되갚아 주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도 때때로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 겁난다. 그렇게 목적을 잃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는지,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것을 전부 잃는 것은 아닐까.

“예. 이해합니다, 폐하.”

로로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고민할 문제가 아니에요. 건강한 사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세요.”

아, 하고 탄식하며 카르낙은 제 이마를 짚었다.

“건강한 사내는 무슨… 더럽게 느껴진다고, 젠장.”

“제 나이쯤 되면 아마 이랬던 때가 그리워질 겁니다. 두고 보세요.”

“그럼 좀 가져갈 방법을 찾아봐. 기꺼이 선물해 줄 테니까.”

카르낙이 구시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몸 위에 이불을 단정히 덮어 주고 웃었다.

“가진 것에 기쁨을 느끼며 삽시다. 한때는 감히 꿈꾸지도 못할 것들을 이루었으니까요. 이 침대와 이불처럼 말이지요.”

뜨거운 맨바닥에 건초를 깔고 자던 때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긴 하지. 하지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모두가 그런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는걸. 가진 것에 기쁨을 느끼기보다 엘버그인들 때문에 모든 걸 빼앗긴 것 같아 열불이 난다고. 얄미운 엘버그 놈들. 카르낙은 자리에 누워 이를 씹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

세일린은 내내 참담하고 슬픈 기분으로 릴리가 아침 단장을 마치고 간단히 요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난밤 캐시의 이야기에 밤잠을 설쳤다.

결혼을 하면 내내 그런 끔찍한 짓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릴리에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다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자신이라면 도저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릴리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니. 너무나 끔찍하다.

“아가씨. 이것을….”

릴리는 찻물을 한 입 삼키고 세일린이 손에 든 것을 쳐다보았다. 연보라색의 리본.

“이게 뭐예요?”

“볼품없는 것이지만 아가씨께 드리려고 만들었습니다.”

“정말요?”

릴리는 크게 기뻐하며 찻잔을 내려놓고 리본을 받았다. 연보라색 실크 리본에는 초롱이 꽃과 잎사귀 자수가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정성껏 수를 놓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세일린, 이건 절대 볼품없는 게 아니에요. 이건 지금껏 제가 받았던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워요.”

“정말이요?”

릴리가 감탄사를 내뱉자 세일린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물론이죠. 이 초롱이 꽃과 잎사귀 좀 봐요. 세상에. 정말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하루 종일 보고 있고 싶을 정도로요”

릴리는 그녀를 당기며 리본을 내밀었다.

“내 머리에 묶어 줄래요?”

“네. 아가씨.”

세일린은 빗을 들고 뒤를 돈 릴리의 머리카락을 먼저 정성껏 빗어 내렸다. 아침나절 에이가가 향유를 담뿍 발라 놓은 덕에 빗어 내릴 때마다 달콤한 향이 났다. 건강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우며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세일린은 중간쯤에서 머리를 반쯤 모아 한 번씩 돌돌 꼰 뒤 리본을 감아 묶었다. 거울로 이리저리 뜯어보며 제 모습을 확인한 릴리가 방긋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아가씨가 좋아하시니 정말 기뻐요.”

매일 밤잠을 쪼개 가며 만든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시다니.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원하신다면 몇십 개는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뿌듯해서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저도 답례를 하고 싶어요.”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기뻐하시는 거로 저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릴리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발치에 놓인 보관함을 열었다. 옷과 장식품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릴리는 그 안을 뒤적거렸다. 무엇을 줄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정한 듯 가운데에 핀이 달린 고리형 브로치를 꺼냈다.

테두리는 진주로 장식되었고 여러 가지 색의 보석들이 금실과 함께 그 안을 촘촘하게 채워 작지만 섬세하고 소박하지만 우아했다. 릴리는 기쁜 얼굴로 그것을 세일린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이건 제 선물이에요.”

그러나 세일린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가씨.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이것은 제가 갖기에는….”

“답례니까 괜찮아요. 저는 쓰지 않는 장식품인걸요. 이 브로치도 자신을 아껴 주는 주인을 만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어서요. 받아요.”

“하지만….”

“무엇이라도 주지 않으면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러니 날 위해 받아 줘요.”

세일린이 계속해서 망설이자 릴리는 그녀의 손에 억지로 브로치를 쥐여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에요. 세일린은 날 위해 오랜 시간 이것을 만들었지만 난 그저 가진 것을 주었을 뿐이잖아요. 언젠가 나도 꼭 소중한 것을 선물해 줄게요.”

“이미 너무 과분합니다.”

릴리는 방그레 웃으며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정말로 리본이 마음에 든 듯했다. 앞으로 닥칠 시련을 모르고 마냥 행복해하는 모습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세일린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려고 괜히 콧등을 긁었다. 어쩌면 좋아. 우리 가엾은 릴리 아가씨.

***

카르낙은 눈을 뜨자마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가 오후 나절이나 되어서야 돌아왔다. 에이가는 안쪽 문루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가 말에서 내리자 못마땅히 말했다.

“요 며칠 계속 말만 타시는군요.”

“그랬나?”

“예. 틈만 나면 성 밖으로 나가시니 행여나 또 전쟁에 뛰어들까 걱정입니다.”

그는 장갑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벌써 그랬겠지. 하지만 모래 폭풍이 닥친 이후로 병사를 포함한 온 왕국의 사람들이 비통함에 빠져 있으니 그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넘치는 체력을 방출하고 싶어 하시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릴리 아가씨와의 티타임은 제대로 지키셔야죠. 성혼식이 코앞인데요.”

이젠 릴리의 이름만 들어도 몸이 움찔 떨린다.

“오늘은 건너뛰지. 할 일도 많은데.”

가능하면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그 이후에도 할 수만 있다면 가급적 오래 건너뛰고 싶다.

“그걸 아는 분이 오전 내내 말을 타셨어요?”

그렇게 따지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에이가가 어떻게 스물한 살 혈기 넘치는 청년의 속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이미 청춘이 다 지나간 여인이 말이다.

“어쨌든 건너뛰어.”

“아가씨께서 기다리세요.”

“기다리지 말라고 해.”

“…아가씨 생각은 하나도 안 해 주실 거예요?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그녀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라고 제 약혼녀를 실망시키고 싶겠는가. 하지만 못 보겠는 걸 어떻게 해.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야기하는 저의 신체 반응이 두려운 것이다. 그 고통을 떨쳐 버리려면 또 얼마나 발악을 해야 할까 두렵다. 지금 제 사정이 그런데 남의 사정 생각해 주게 생겼는가.

“적어도 안부 인사는 여쭤보아 주세요.”

“대신 전해 주면 되잖아.”

“이러실 겁니까? 정말?”

에이가가 집무실로 향하는 카르낙의 뒤를 바짝 쫓으며 어금니 물린 소리를 했다.

“릴리는 그렇게 속이 좁은….”

그렇게 속이 좁은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 열린 집무실의 안을 보고 뒷말을 흐렸다. 그 안에 파니릴리가 서 있었다. 그것도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의 딱 정중앙에.

“폐하.”

상냥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꿈속의 음성이 겹쳤다. 카르낙은 눈앞이 하얗게 바래는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설마 그쪽의 잔꾀냐고 묻는 듯 휙 에이가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 어금니를 물고 쏘아보는데도 에이가는 참으로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워낙 바쁘다 하시니 별수 있나요.”

이 교활한 노인네가! 카르낙은 울컥 치미는 욕설을 삼켰다. 차마 내뱉을 수가 없으니 면전에 대고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에이가는 씩 웃으며 지나가다 잠시 들른 듯, 꼭 스쳐 지나가듯 방문을 지나쳐 갔다. 더는 주시할 대상이 사라지자 그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햇살에 반짝거리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카르낙은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제발 저를 구원하소서.

“아침 일찍 말을 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릴리가 한 발 다가왔다. 카르낙은 움찔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벌써부터 코끝에 단 향이 어른거렸다. 아직 그녀는 저렇게 멀리 있는데 벌써부터 그녀의 향기가 닿기 시작한 것이다. 카르낙은 얼뜨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피부는 차갑게 얼어 가는데 피는 뜨겁게 달았다. 핑핑 하늘이 돌기 시작했다.

세일린은 둘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이제 조용히 빠져 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릴리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후 문 바로 앞에 어정쩡히 서 있는 왕을 가능한 한 빠르게 발소리 없이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자신을 지나치는 세일린의 팔뚝을 급하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세일린도 놀라고 릴리도 놀랐다.

“기다려.”

“예?”

세일린은 놀라서 되물었다. 카르낙의 얼굴은 정말로 매우 위급해 보였다. 누가 보면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낀 줄 알 만큼.

“여기 있어라.”

“…….”

입을 뻐끔거리는 세일린의 온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였다. 카르낙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릴리는 그가 왜 저러는지 몰라 혼란스레 눈동자만 사방으로 굴려 댔다.

혹여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일까. 혹여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한 것일까. 떠올리려고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카르낙이 세일린을 저와 릴리의 사이로 밀어 넣었다. 셋 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 속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릴리였다. 그녀는 어쨌든 이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누구도 곤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릴리는 침착하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상냥하게 물었다.

“제가 혹여 폐하께 방해가 된 것일까요?”

카르낙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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