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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4화 (44/231)

44화

릴리는 그라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때가 되면 곤충이나 새들이 서로의 몸에 올라타 꼬리를 붙이고 있었다.

그것을 부르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저렇게 쌍을 지어 날고 서로를 업어 주냐고. 부르테는 그것이 짝짓기라고 하였다. 때가 되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새끼를 갖기 위해 서로를 찾기 시작하고 맞는 짝이 나타나면 짝짓기라는 것을 하여 후손을 생산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꼬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어디를 대고 있어야 하지? 그것을 부르테에게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아 루나와 둘이서 몰래 해답을 찾고는 했다. 달거리라는 것을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라고 하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래전에 루나가 남녀가 옷을 벗고 껴안고 있으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릴리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행위였으니 아마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지레짐작만 어렴풋이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확한 게 아니잖아. 다만 가장 부끄러우니 그 정도의 은밀한 일이 아닐까, 싶은 것뿐이지.

지난번 카르낙과 포옹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것을 떠올리자니 고작 사내와 껴안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 의아했다. 부끄럽기는커녕 편하고 따듯하고 기분 좋기만 하던데. 역시 알몸으로 껴안는 것과는 다른 걸까. 릴리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고개만 갸웃거렸다.

“캐시. 혹시 너 남녀가 첫날밤에 무엇을 하는지 알아?”

자수를 놓다 말고 세일린이 뜬금없이 물었다. 막 침대로 들어가던 캐시가 느닷없는 질문에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뭐?”

“그러니까 남녀가 결혼을 한 후엔 같은 침대를 쓰잖아.”

캐시의 눈에 은밀한 활기가 어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질문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지금 아이를 어떻게 가지느냐 묻는 거지?”

세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결혼을 하는 것은 아이를 낳기 위함이니 궁극적으론 그렇지.

“응.”

“예전에 막사를 지나가며 병사들이 음담패설 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야. 그중에 한 명이 그러더라고”

캐시가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이상형은 말이야! 내 좆이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을 지닌 여자라구!’ 그러더라고.”

“…좆?”

“그래. 좆.”

그게 뭐야. 세일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캐시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 거시기 말이야! 거시기! 세일린! 사타구니에 달린 거 있잖아.”

엑! 하며 세일린이 경악했다. 얼핏 본 적이 있다. 왜 그런 모양으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 흉물스러운 것으로 주로 뭘 하는지는 안다.

“그걸… 어디다 넣는 건데?”

“흠… 글쎄. 내 생각엔, 아랫도리가 아닐까?”

“아래?”

“그래. 아래. 초경을 치르면 이제 시집을 갈 때가 되었다고들 하니까 아마도 거기 있는 구멍이겠지.”

세일린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거기에 있는 구멍? 거기에 사내의 그것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설마. 말도 안 돼. 세일린은 진저리를 쳤다.

“말도 안 돼. 너무 더럽잖아.”

“어쨌든 그자들이 그렇게 말했어. 그치들이 하는 일이라곤 칼을 휘두르거나 창녀촌에 들락거리는 것뿐이잖아. 그러니 사실이지 않겠어?”

“…아이를 갖는 방법은… 신성한 줄 알았어.”

“신성함이랑은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사내들을 기쁘게 하는 것임은 틀림없어. 그게 아니고서는 그렇게 환장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캐시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등을 돌리고 누웠다. 세일린은 제 손에 들린 리본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겼다. 어쩌면 좋아. 우리 가엾은 릴리 아가씨….

***

어디선가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게 딱 알맞았고 어디선가 살랑거리는 미풍이 불었다. 시트의 감촉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카르낙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단잠에 빠져들었다가 누군가 이불을 걷어 내는 기척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폐하.”

저를 부르는 소리가 녹아 흐를 듯 달콤하였다. 순간 귓가에 뭉클한 무엇인가가 닿았다. 간지러움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제 허리 위에 누군가가 올라와 있었다.

“릴리.”

카르낙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릴리는 새하얀 집게손가락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대고 ‘쉿’ 하고 속삭였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박동이 어찌나 거센지 제 머리 안에서까지 진동을 해 댔다. 그 덕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분명해지기를 반복하였다.

제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는 릴리의 무게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분명 눈앞에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듯 분명 그녀가 보이는데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릴리가 손으로 그의 벌거벗은 어깨를 매만졌다. 그러자 숨이 턱 막혔다. 머리까지 열이 올라 현기증이 났다. 바르르 입술이 떨려 카르낙은 그것을 꾹 물고 두 손으로 시트 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를 제가 바스러뜨릴 것 같았다.

취한 건가? 붉게 물든 볼과 다소 몽롱한 릴리의 시선은 분명 취한 듯 보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제 침실로 찾아와 이러지는 못하리라.

“릴리.”

카르낙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릴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의 어깨를 매만지는 데 골몰했다가 이내 피부를 훑으며 천천히 그의 가슴으로 내려왔다. 모든 신경이 그 아래로 몰려들었다. 가슴께의 솜털마저 기민하게 일어섰다. 카르낙은 릴리의 손바닥에 제 유륜이 닿기 전에 황급하게 얇디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릴리, 난….”

“안아 주세요, 폐하.”

그녀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제 온몸을 훑는 것 같았다. 농염한 눈빛으로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안아 주세요. 지난번처럼요.”

방어하듯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릴리가 천천히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하늘거리는 여체가 제 몸과 밀착되었다. 향긋하고 따듯한 온기가 밀려왔다. 아랫도리가 지끈거렸다.

카르낙은 감겨 오는 여체를 꽉 안았다. 비단 같은 머릿결을 매만지고 그녀의 등을 더듬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끝을 비볐다. 갈증이 났다. 품에 안았는데도 공기처럼 공허하였다. 향기를 들이마시는데도 저를 채우기에는 부족하였다. 카르낙은 입술을 열고 그녀의 피부를 머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혀를 내밀어 핥았다. 자꾸만 허리 아래가 멋대로 들썩였다. 카르낙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릴리. 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해소되지 않은 열기가 고통스럽게 고였다. 카르낙은 질끈 눈을 감았다.

“못 해. 난 못 해…”

열에 들떠 중얼거리다가 그는 밭은 신음을 내뱉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새까만 밤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윽….”

갑작스러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허리를 굽혔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제 사타구니 아래가 질척거렸다. 로로….

카르낙은 침대에 엎드린 채 아이처럼 중얼거리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다 어금니를 사리물고 크게 고함쳤다.

“로로!”

왕의 비명에 로로가 가운도 걸치지 못하고 뛰어왔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카르낙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던 로로는 그의 상황을 확인하고 침실로 몰려드는 관료들을 물렸다. 시종에게 깨끗하게 세탁한 슈미즈와 시트를 가져오라고 명령한 후 그는 침대 머리맡에 둔 초를 밝히고 카르낙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별일 아닙니다. 폐하.”

그러고는 비참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의 카르낙을 위로했다.

“사내라면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세요.”

카르낙은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했다.

“그건 당신이 모르는 거야, 로로. 모르니까….”

당신은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잖아.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도 몇 번이나….”

“지금은 어리지 않잖아.”

카르낙이 분하다는 듯 로로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금은 다 큰 성인이라고.”

“…….”

로로는 그의 발치에 가만히 앉았다. 건장한 사내가 몽정을 하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일까.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인데도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본능이란 것은 출신이 천하고 귀하고를 따지지 않고 찾아왔다.

투로의 남자들은 그래서 사내가 될 때쯤 모두 몽정을 했고, 그것을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워 숨기려 하고,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성에 대한 욕구는, 번식하고자 하는 종의 욕구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거세되어야 하는 미덕이었다.

엘버그인들은 벌레들의 성욕을 혐오하였다. 그들은 숫제 말 잘 듣는 노예로서의 투로를 원했다. 그들은 부려지다가 죽을 뿐. 마땅히 생명으로서 가져야 할 본능을 가져서는 안 되었다. 카르낙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 두렵고 무섭고 불경한 행위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카르낙.”

로로는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엘버그의 왕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든 욕구를 거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투로가 아니에요.”

“때때로 길을 잃는 것 같은 기분이야.”

카르낙이 말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 그래서 나 역시… 나 역시 엘버그 사람들과 똑같아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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