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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3화 (43/231)

43화

세일린은 새벽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에 기상해 단장을 마쳤다. 머리를 빗어 똬리를 틀고 그 위에 새하얀 두건을 돌돌 말아 핀으로 고정한 후 그녀는 지난밤 깨끗하게 닦아 보관해 둔 그릇을 안고 방에서 나왔다.

벌써부터 성안은 일을 시작하려는 시종들로 분주했다. 세일린은 곧바로 성 안뜰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물을 뜨려고 차례를 기다리던 시녀들이 세일린을 보더니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파니릴리를 위해 물을 뜨려는 것이니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세일린은 그때마다 마치 자신이 대단해진 듯 한껏 기분이 고양되고는 했다. 물그릇이 너무 차갑지 않게 볕이 잘 드는 곳에 잠시 내려놓고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 딱딱한 잡곡빵과 콩을 으깬 스튜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

“안녕. 세일린.”

친우들이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다. 세일린은 빵을 우적거리며 인사했다.

“안녕.”

팔뚝에 붕대를 감은 시녀 하나가 그녀의 옆에 섰다. 지난번 저장고의 화재로 화상을 입은 아이였다. 릴리가 시종들에게 리쿠스를 양보한 덕에 그녀는 팔을 잃지 않게 되었다.

“릴리 아가씨의 상처는 좀 어때?”

“좋아지고 있어.”

“어서 아물어야 할 텐데. 어디선가 들었는데 말린 버가초를 넣어 목욕을 하면 상처가 빨리 아문대.”

“그래?”

“응. 리쿠스 님이 가지고 계실 거야. 세숫물에 그것을 넣어 보는 건 어때?”

세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봐야겠다. 고마워.”

“뭘. 릴리 아가씨를 위한 건데.”

시녀는 제 팔뚝을 매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세일린은 대충 아침을 먹고 리쿠스를 찾았다. 버가초를 찾으니 그가 연유를 물었고 릴리 아가씨를 위해 세숫물에 넣을까 한다, 하니 그는 버가초를 건네며 끓는 물에 우리면 더 좋을 것이라 했다. 세일린은 그의 말에 따라 말린 버가초를 들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는 곧바로 화로에 버가초가 든 놋쇠 냄비를 얹었다. 파니릴리를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뭐든지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세일린은 기뻤다.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를 지나 까마득히 솟아 있었다. 이제 파니릴리의 기침 시간이었다. 세일린은 하급 시녀 노라와 함께 릴리를 위한 식사와 물그릇을 들고 분주히 안뜰을 가로질렀다.

희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던 안뜰과 회랑은 일찍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음에도 어린 시녀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닥을 쓸고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를 정성껏 솔로 문지르고 있었다.

한때 세일린도 저렇게 쪼그려 앉아 열심히 바닥을 닦았더랬다. 그 일이 익숙해지다 못해 이골이 날 때쯤이 되면 다른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안뜰을 반쯤 가로질렀을까. 회랑을 지나오는 카르낙과 로로가 보였다. 세일린은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며 몸을 숙였다.

로로와 무언가를 한참 이야기하던 카르낙이 힐끗 세일린을 보더니 곧 걸음걸이를 늦추며 그녀의 앞에 멈췄다.

왕이 제 앞에 서자 세일린은 숨이 턱 막혔다. 들고 있던 물그릇을 행여나 놓칠까 봐 그것을 단단히 붙들었다. 카르낙은 물그릇과 단정하게 차린 음식을 차례대로 훑고 물었다.

“릴리에게 가는 길인가?”

세일린은 침을 삼키며 먼저 고개부터 끄덕였다.

“…예, 예. 폐하. 이제 막 아가씨가 기침하실 시간이라 세숫물과 음식을….”

“향이 나는데?”

“예?”

세일린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내렸다.

“물그릇에서.”

아. 물그릇. 맞아. 버가초.

“예. 버, 버가초를 달인 물입니다. 사, 상처에 좋다 하여….”

카르낙은 그렇군,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담백하게 말했다.

“수고해.”

“예….” 하며 대답하는데 카르낙이 쌩하니 그녀를 지나갔다. 세일린은 코트 깃이 펄럭이는 왕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이 두 번 말을 걸었다간 심장 마비로 죽고 말리라. 그런 심정인 것은 저 하나뿐만은 아닌 듯 쟁반을 든 노라가 달달 떨며 신음했다.

“어휴.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 말이다. 왕은 좀처럼 사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데…. 심지어 그는 자신이 릴리를 보필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왕에게 눈도장이 찍힌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무섭고 또 한편으로는 떨렸다. 피가 오싹하게 식으면서도 또 진땀이 날 정도로 화끈거리기도 했다.

릴리의 침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머지않아 에이가가 활기찬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침실 문을 몇 번 두드리고 곧 활짝 열었다. 세일린과 노라가 그녀를 따라 침실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물그릇과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덧창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에이가는 다정한 손길로 릴리를 깨웠다. 그녀는 별다른 뒤척임 없이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세일린이 침대의 휘장을 젖혀 기둥에 단단히 고정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익숙한 순서로 노라가 에이가에게 찻잔을 건네고 에이가가 그것을 릴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피부에 좋은 차예요, 아가씨. 먹기 좋도록 미지근하게 식혀 두었으니 드세요.”

“고마워요.”

릴리는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중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디셋 사제와 상의 끝에 혼인은 일주일 뒤로 잡혔어요. 엘버그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결혼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하기로 했어요. 귀빈도 가능하면 적게 받을 생각입니다. 그래도 동맹을 위해 초대장은 모두에게 보내겠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아마 영주들이 많이 참석하진 않을 겁니다.”

“잘됐네요.”

캘던 사람들은 릴리의 존재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나 제 아비와는 다르게 어질고 아름다운 릴리에게 매료되어 그녀가 어서 엘버그의 왕비가 되어 주길 바랐다. 카르낙은 민중이란 변덕이 심해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니 이런 때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했다.

에이가 역시 그것에 동의했다. 게다가 폐허가 된 리오를 내버려 둔 채 디셋 사제를 언제까지고 캘던에 묶어 둘 수는 없었다. 구급품은 미리 보내겠지만 그래도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들에겐 사제와 그의 기도가 간절히 필요했다. 예배당을 길게 비울 수는 없었다.

“폐하와 의복 문제도 좀 상의했지요.”

그러자 무겁던 릴리의 눈이 반짝 떠졌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걷겠다던 릴리의 생각에 기함하던 에이가였다. 설마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그 위에 겹겹이 옷을 덧대어 입고 머리 위에 베일까지 얹는 것으로 결론 나지는 않았겠지?

“한 겹은 안 돼요. 절대로요. 긴 슈미즈 위에 긴 블리오를 입을 겁니다.”

아아, 하고 탄식하며 릴리는 찻잔을 에이가에게 넘기고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대신 발이 보이지 않는 조건으로 스타킹 없이 샌들을 신을 거예요.”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기이이이다란 슈미즈와 드레스 자락에 가려 통풍도 되지 않을 텐데. 바닥의 열기에서 발을 보호하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가 없다.

“대신 베일은 없이요.”

베일 없이? 실의에 빠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릴리가 그 소리에 힐끗 에이가를 쳐다보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작은 티아라를 쓸 겁니다. 스코크가 아가씨를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것이지요.”

그건 마음에 든다.

“소매라도 짧게 해 줘요.”

“안 돼요.”

절망에 빠진 한숨에도 에이가는 엄했다.

“결혼식에서 신부의 살결이 보이는 건 안 됩니다. 엘버그의 처녀들은 절대 결혼 전에 짧은 소매를 입지 않아요. 아내의 살결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첫날밤 남편의 권리예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미 카르낙의 앞에서 치맛자락을 들어 보였는걸. 그러나 에이가가 알면 까무러칠 테니 비밀로 하고 있어야지. 잠깐. 불현듯 그녀의 말을 되짚어 보다가 깨달았다. 첫날밤?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기상에 에이가는 하마터면 손에 든 찻잔을 놓칠 뻔하였다.

“에이가.”

“네. 아가씨.”

“첫날밤에는 뭘 하죠?”

릴리의 물음에 세일린도 노라도 행동을 멈췄다. 분주했던 릴리의 침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스산한 적막이 찾아왔다. 에이가가 멍하게 다시 물었다.

“예?”

“그러니까 첫날밤에는 뭘 하는 거예요?”

첫날밤에 무엇을 하냐고? 에이가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한다는 듯 한차례 헛웃음을 내뱉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일린도 노라도 있었지만 슬프게도 아무도 답을 몰랐다.

“…….”

이젠 웃음마저 끊기고 그저 적막만이 남았다. 에이가는 몇 번이고 입을 떼었다가 붙이며 새하얀 백지 같은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와중에 어떻게든.

“그러니까 결혼을 한 첫날 밤에는….”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혼식이 끝난 이후 아내로서의 첫 번째 밤이지 않겠어요?”

“네.”

“…그….”

“네.”

“…이제 남편과 함께 지내는 첫 번째 밤이니까….”

“밤이니까?”

에이가는 머리를 쥐어짜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푸, 하고 한숨을 쉬며 눈을 한 바퀴 굴리고 이실직고했다.

“결혼도 안 한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남편이 하란 대로만 하면 된다고 들었어요.”

하란 대로? 결혼 첫날밤에 남편이 하란 대로 하라고? 그래서야 노예와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남편이라는 주인에게 아내라는 노예로서 굴복하는 첫날이란 뜻인가? 그래서 그토록 첫날밤이란 단어에 다들 얼굴을 붉히는 건가. 노예 같은 대우를 받는 첫날이라?

“결혼 첫날밤 남편이 하란 대로만 하면 아이는 저절로 생기는 건가요?”

“성서에는 결혼하면 아마네스 여신님이 사랑의 증거로 아이를 선물해 준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니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하겠죠.”

릴리의 얼굴아 의아하게 씰그러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알기어스 왕과의 사이에서 저를 낳으셨잖아요. 그럼 어머니는 알기어스 왕을 사랑하신 건가요?”

에이가는 미간을 구기고 눈을 깜빡거렸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도 풀 수가 없는 난제다.

“아니요. 마님이 알기어스 왕을 사랑했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요. 하지만 그분은 신의 아이이고… 또 남들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셨잖아요….”

듣다 보니 그럴 듯도 하다. 그러나 뭐랄까. 뜨뜻미지근한 기분이랄까.

“어쨌든 제가 아는 것은요, 아가씨. 첫날밤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부하거나 비명을 지르면 안 된대요. 로레인 마님이 하게너 백작과 혼인을 치르기 전에 분명 마님의 모친께서 그렇게 당부하시는 것을 제가 들었답니다.”

매우 불공평한 처사다. 남편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소리도 지르면 안 되고 거부해서도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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