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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2화 (42/231)

42화

루이스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성벽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걷다가 칼을 좀 휘둘러도 봤다가 경비병들과 눈이 마주치면 괜히 한눈팔지 말고 경비를 똑바로 서라며 고함을 쳤다. 그러고 나면 상관의 고함에 바짝 얼어붙은 병사들은 절대로 저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스.”

저기 성벽의 귀퉁이에서 릴리가 그에게 손짓했다. 루이스는 계속 주변을 경계하며 뒷걸음질 쳐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녀는 대뜸 천 위에 비단을 덧대어 만든 주머니를 내놓았다. 루이스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 품에 넣었다. 주머니가 제법 묵직했다. 루이스는 복화술이라도 하듯 입을 움직이지 않으며 물었다.

“설마 온갖 것을 다 집어넣은 건 아니시겠죠?”

“설마 제가 그렇게 멍청할까요. 목걸이 하나예요.”

“너무 크잖습니까. 반지나 귀걸이 정도가 적당해요.”

“반지나 귀걸이는 개수가 적어서 금방 들켜요. 에이가는 목걸이 위주로 가져온단 말이에요.”

젠장, 루이스는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저는 말이죠, 아가씨. 제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라타에서 절 잡아 온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전 그저 명령에 따르는 군인일 뿐이에요.”

“그럼 이것도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긴 하다. 어차피 릴리는 카르낙의 약혼녀이고 머지않아 왕비가 될 여자이니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다, 맞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은밀히 뒷구멍으로 명령을 하시면 안 된다고요, 아가씨.

“이런 일은 저같이 무식한 군인보다 더 똑똑하고 민첩한 사람이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요?”

릴리가 루이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저가 가지고 있는 보석들을 팔아 그 돈으로 캘던의 빈민 구제소와 치료소에 필요한 음식과 물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몰래, 은밀히, 아무도 안 보는 시간에 말이다.

“그것보다는 믿을 만하고 듬직한 사람이 필요해요. 배를 타고 첩첩산중인 그라타에 올 정도의 배짱이면 딱 좋겠지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저는. 폐하께서 더는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겠다고 하신 마당에 말이죠.”

“저도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저 편하자고 이러는 거예요. 성 밖에는 성안 사람들의 친지와 가족들도 살고 있잖아요. 동료들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더욱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어요?”

“…제발 폐하께 들키지만 않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저도 그래요. 루이스 경, 그럼 잘 부탁해요.”

릴리는 힘내라는 듯 그의 어깨를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아주며 재빨리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아니, 저기. 릴리….”

‘저도 그래요.’라니요. 아가씨, 들키면 맹세컨대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든가,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만은 보전케 해 주신다든가…. 그렇게 말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

방으로 돌아가니 세일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잠시 산책을 다녀왔어요.”

“여기 부탁하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세일린이 그녀에게 약병 하나를 건넸다. 루이스를 몰래 만나기 위해 일부러 세일린에게 이것을 구해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리쿠스는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약을 조제해 가져오라는 명령에 진땀을 꽤나 흘렸을 것이다.

그라타에서는 흔하지만 엘버그에서는 귀한 약재 몇 개가 끼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 먹지 못하는 것을 조제한 것은 아니니 릴리는 그것으로 약간의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세일린, 평소 폐하께서 기침하시는 시간이 언제쯤인지 혹시 알아요?”

세일린은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리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성에 계실 때보다 계시지 않을 때가 더 많아서…. 하지만 늘 해가 뜰 때쯤엔 기침하셨을 겁니다. 늘 오전 중에 사냥을 나가시거나 아니면 막사로 향하셨다고 들었거든요.”

하긴 그렇긴 하지. 오랫동안 전쟁으로 단련된 분이 복통이 조금 있다고 침대에 누워만 계실 리는 없다.

“방금도 오는 길에 듣기를 폐하께서 리오에서 온 손님을 만나러 일찍 알현실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아가씨.”

“손님?”

“예. 에이가 님이 마중을 나가셨다 하니 귀한 분이지 않을까요.”

리오가 어디더라. 분명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책에서 보았던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면 복통은 괜찮아지신 걸까. 릴리는 지난밤 카르낙의 낯빛을 떠올렸다. 무척 괴로워 보이셨는데.

“그럼 우리도 알현실로 가 볼까요.”

“예, 아가씨.”

세일린이 먼저 나서서 길을 안내했다. 릴리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얼굴을 보고 구태여 세일린을 시켜 받아 낸 복통 약도 건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래 통증이란 것이 해가 떠 있을 때는 괜찮아졌다가도 밤이 되면 심해지고는 한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또 통증이 있을 수도 있고 아픈 내색을 하는 것도 불편해하시는 것 같으니 알현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조용히 약만 건네주고 오면 될 것 같았다.

막 알현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알현실의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렸다. 카르낙은 방에서 나오다 릴리를 발견하고는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며 나오던 디셋과 에이가도 돌연 대화를 멈추고 카르낙의 뒤에 멈춰 섰다.

“아가씨.”

에이가가 먼저 알은체했다. 카르낙과 딱 눈이 마주쳤다가 에이가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그 옆의 낯선 자에게 눈길이 닿았다. 디셋은 제 가슴께에 손을 얹고 감격스러워 아마네스를 찾으며 눈물을 보였다.

“리오에서 온 디셋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사제님이시죠.”

에이가의 설명을 듣고 릴리는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디셋은 정말이지 황송해하며 릴리의 손을 붙잡고 경건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카르낙의 미간이 움찔 구겨졌다. 그러나 알 리가 없는 디셋은 황홀한 얼굴로 찬양을 시작했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과연 듣던 대로 아마네스 님의 축복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쩜 이리도 아름다우신지…. 감히 이 귀한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다니 저 역시 아마네스 님의 축복을 받은 모양입니다.”

“어….”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지. 나는 그저 사람일 뿐인데요. 저는 그라타에서 진흙 구덩이를 굴러다니던 아이랍니다. 이 손으로 돼지도 만지고 소도 만졌습니다만, 괜찮으실까요?

“디셋 님께서 폐하와 아가씨의 성혼식을 집전하실 겁니다.”

“아.”

이제야 편히 반응할 만한 주제가 나왔으매 릴리는 반색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디셋에게 말했다.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꺼이 와야지요. 제 평생에 이토록 성령이 충만한 곳은 처음입니다. 정말이지 신의 기적을 매 순간 깨닫게 된답니다.”

저러다 조만간 캘던성 예배당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는 거 아니야? 그 생각을 하니 몹시도 심기가 불편해져 카르낙이 끼어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릴리… 양?”

편하게 부르려다가 사제를 의식해 경어를 붙이자 어미가 이상하게 끝나 버렸다.

“아. 그것이….”

릴리가 말꼬리를 흐리며 주위를 보았다. 에이가가 그녀의 의중을 눈치채고 손으로 사제의 등을 자연스럽게 갈무리해 밀었다.

“디셋 님, 캘던성의 자랑인 예배당을 성혼식 전에 미리 보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모래 폭풍에 파손된 장미창이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빼놓고 보아도 정말이지 아름답고 훌륭하답니다.”

“아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마치 마녀의 사탕에 유인당하는 아이처럼 사제는 홀린 듯 에이가를 따랐다. 로로 역시 리오로 보낼 식량과 차용증을 준비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세일린도 눈치를 보다가 뒷걸음질 쳐 멀리 보초병들의 곁에 가서 섰다. 이제 알현실 문 앞에 남은 이라고는 릴리와 카르낙뿐이었다. 릴리는 모두가 멀어진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복통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았지. 나름대로 괜찮았어. 적어도 네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기도 민망하고 혹여 눈치를 채도 곤란하니 카르낙은 짐짓 태연한 어투로 대답했다.

“괜찮아. 그저 약간 피곤했던 것뿐이야.”

릴리는 안심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걸….”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제 가슴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짙은 푸른색 액체가 들은 작은 약병. 아니 하필이면 그것을 또 거기서 꺼낼 게 뭐란 말인가.

그러면 자연스레 릴리의 가슴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러다 또 통제 불능인 복통이 생기면 어쩌려고? 짧은 순간 카르낙은 차라리 다시 전장으로 가 버릴까 고뇌했다. 아직 때려잡을 놈들은 많이 남았으니 말이다. 미친 척하고 북쪽으로 진군해서 에나의 땅에 있는 테이먼 테르조를 쳐 버릴까. 아니 그걸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핀이 제 목을 치겠지. 복통이 무서워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드는 미친 왕 때문에 개죽음을 당하기는 싫을 테니까.

“리쿠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체증이 내려가도록 해 주고 또 배를 따듯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어요. 그라타에서 자주 사용했던 대로 만든 것이니 틀림없을 거예요.”

배가 뜨거워지는 것은 안 되는데. 차라리 식혀 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예?”

“어?”

“제가 잘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뭐라고 하셨는지요?”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 버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내뱉고 말았던 건가.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릴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의아해하면 안 된다. 이 상황이 의아한 것은 카르낙 저 하나면 족하다.

“어쨌든 고마워. 요긴하게 쓰도록 하지.”

그는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걸음을 떼더니 도망치기라도 하듯 릴리에게서 멀어졌다. 평소에도 늘 저를 남겨 두고 먼저 떠나시는 분이니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뭘까. 릴리는 제 엄지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때마침 세일린이 릴리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폐하의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십니다.”

“거봐. 그렇지?”

“예.”

그래. 이상하다. 제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굉장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혹여 지난밤 뭔가를 잘못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뭔가 저를 피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마 아직도 복통이 있으신 건 아닐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뾰족하게 답이 나오질 않았다. 릴리는 스읍,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저러시지?”

정말로. 왜 저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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