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폐하, 그럼 잠시….”
릴리가 손을 뻗으며 다가왔다. 카르낙은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어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에 그녀는 행동을 멈추었으나 표정은 더더욱 근심스러워졌다.
“침대에 누워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떨까요?”
릴리는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 카르낙은 더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거긴 절대로 안 된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폐하.”
“아니.”
나가려는 릴리를 제지하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 그는 황급히 떼었다. 릴리는 자신이 그를 더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안달복달했다.
“나가야겠어.”
카르낙은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 나가야겠다. 어서 나가지 않으면 더 험한 꼴을 보이리라. 절대 그럴 순 없지. 미천한 왕일지라도 왕으로서의 체면은 있지 않나.
나가야지. 뒤를 이어 저 혼자 한마디를 더 중얼거리더니 그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쌩하니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굽힌 등을 펴지 못하는 모습에 릴리가 한 번 더 물었지만 무심하게도 그는 열린 방문 사이로 손만 몇 번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곧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어쩐지 허한 기분이 들어 릴리는 쉽사리 침대에 오르지 못했다.
카르낙은 문을 닫고 나와 몇 걸음을 걷지 못하고 벽에 기댔다. 초를 들고 먼저 계단을 밝히며 내려가던 시종이 황급히 물었다.
“폐하, 어디가 안 좋으신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게 해 다오.”
“예?”
“혼자 있겠다.”
왕은 혼자 있겠다 했지만 홀로 있기엔 밤이 너무 깊었고 계단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과연 명을 따라도 되는 것인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가.”
카르낙의 언성이 아주 조금 높아졌다. 시종은 움찔 몸을 떨며 쫓기듯 계단을 내려갔다가 황급히 올라와 그의 앞에 촛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카르낙은 계단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기며 그를 불편하게 했다.
염병할. 정말이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때에는 핀이 필요하다. 그놈의 더러운 머리와 주둥아리가 말이다. 그 미개하고 천박한 놈에게는 상담하기 딱 알맞은 주제겠지. 그러면 지금 느끼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좀 덜어질 텐데. 불행하게도 놈을 브롱힐즈에 떼어 놓고 오기로 결정한 것은 카르낙 본인이었다. 그놈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는 것도 다 본인의 탓이다.
정말이지 요새 재수가 더럽게 없네. 카르낙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다가 배가 당겨 끄응, 하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밖에서 ‘아직 주무시는 건가?’ 하고 묻는 소리에 카르낙이 반쯤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바닥을 울리더니 곧 침실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뒤를 이어 시종들이 들어와 밤새 닫혀 있던 덧창을 열기 시작했다. 쨍한 햇볕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카르낙은 좀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폐하,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부터 듣기엔 지나치게 감미로운 목소리네.”
에이가라면 버럭, 하며 반응했겠지만 로로에게는 별로 먹히지 않는 도발이었다. 노인은 그의 앞에 버티고 서서 일어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면 어쩐지 오싹하여 일어나게 되고야 만다.
“잘 주무셨는지요?”
“반나절 정도만 더 시간을 준다면 대답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여러 가지로 최악의 상태였다. 꿈자리는 사나웠고 몸은 무거웠으며 기분은 더러웠다. 밤새워 뒤척인 탓에 피곤은 곱절이 되었다. 그는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고는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비비며 두 발을 침대 아래로 늘어뜨렸다
“리오에서 사제가 왔습니다.”
리오에서? 리오라면 캘던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항구 도시로, 오래전 카르낙이 영주의 목을 치고 상인들이 길드를 만들어 도시를 유지할 수 있게끔 남겨 둔 곳이었다. 비록 알기어스의 폭정과 전쟁의 여파로 여전히 복구 중이지만 점점 부유한 상인과 자유를 갈망하는 농노들이 모여들어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곳이라면 범법자도 호된 종살이에 도망쳐 온 노예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비록 사막에서 잡혀 온 투로라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엘버그에 속해 있으나 결코 엘버그의 법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그곳은 투로들에게는 지속적이며 합법적인 탈출구가 될 것이다.
만일 카르낙 자신이 실권하여 왕좌에서 추락한다 해도 리오는 자체적인 방어권과 군사력을 행사해 자신들만의 도시를 지킬 터였다. 오랫동안 알기어스 왕과 그의 봉신인 영주에게 핍박받아온 그들로서는 힘들게 얻어낸 자유를 두 번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리오에서 사제가 왜?”
자유 도시라는 말 그대로 그들은 왕으로부터도 자유러워서 서로의 이득을 위해 거래를 체결하거나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의 것들을 주고받을 수는 있지만 어쨌건 왕의 벗어나 있는 곳이었다. 농노나 범죄자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리오로 달아나는 경우야 많지만 리오를 떠나 캘던으로 오는 것은, 특히나 에나의 종인 사제가 캘던으로 왕을 찾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뭔가 끔찍한 죄를 저질러 추방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글쎄요. 폐하를 뵙기를 청하더군요. 지금은 에이가와 함께 있습니다.”
“릴리는?”
카르낙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묻자 로로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예?”
왜 되묻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건가? 카르낙은 앞섶을 여미며 말했다.
“에이가의 요즘 아침 일과는 릴리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잖아.”
“아, 예. 한동안은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또 달라졌답니다. 요새 에이가가 아가씨 옆에 있는 것은 여간해서는 보기 힘들지요. 아가씨의 수족이 되어 성안 살림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요.”
카르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시종들이 카르낙이 얼굴과 손을 씻을 물그릇과 마른 천을 가져왔다. 그는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가 그릇에 손을 담그며 물었다.
“…혹시 내가 릴리에 대해 물은 게 처음이던가?”
“예, 제게는 그렇습니다.”
“…….”
비단 로로에게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에이가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녀에 대해 묻는 일은 없었다. 에이가의 독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찾아 나서거나 아니면 에이가의 잔소리를 이기지 못해 어디 있는지를 묻거나.
어쨌든 에이가가 아니라면 굳이 그녀에 대해 떠올라도 물어볼 일은 없었다. 그다지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지도 않았던 거 같고. 아니 궁금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가 파니릴리를 어떻게 대했더라. 지금과는 달랐던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왜 로로는 생경하다는 듯 반응하는 걸까. 로로가 유난인 걸까 아니면 정말 뭔가가, 자신의 뭔가가 전과는 달라진 걸까.
카르낙은 세수를 하고 섬세한 장식선을 수놓은 블리오 위에 실크로 된 코트를 걸친 후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엔 로로의 말대로 이미 에이가와 리오의 사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유한 상업 도시의 사제답지 않게 행색이 남루하여 카르낙은 첫눈에 리오까지 모래 폭풍이 당도하였음을 알았다.
“리오에서 온 사제 디셋입니다.”
에이가가 카르낙에게 그를 소개하자 디셋은 왕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폐하.”
카르낙은 왕좌에 앉으며 제 코트 깃을 갈무리했다. 한차례 인사가 끝나자 에이가는 그가 온 이유를 설명했다.
“리오에도 모래 폭풍이 닥쳐 모든 것을 다 쓸어 갔답니다. 사방이 흙더미라 먹을 것이 없어 도움을 청하러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자비로운 왕께서 캘던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저런.
“소문은 모래 폭풍만큼 빠르군.”
카르낙이 눈을 굴리자 디셋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읍소했다.
“폐하, 부디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키지 않으신다면 아이와 부녀자들만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부디….”
폭풍에 모든 것이 쓸려 갔다. 겪어 본 적이 없는 천재지변에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데도 달아날 곳이 없었다. 풀도, 나무도, 꽃도, 집도, 사람도, 음식도 모두 폭풍에 휩쓸려 바다에 처박히거나 부서졌다.
“폐허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길드의 회관과 제가 속해 있는 예배당뿐. 리오의 사람들은 졸지에 집과 가족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부디 갈 곳 없는 가여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공짜로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 디셋은 리오에 배가 들어오는 대로 값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을 빌리고자 하는 거예요.”
에이가가 나서서 그의 편을 들었다. 퍽 곤란한 상황이었다. 리오는 큰 도시이다. 그들에게 연명할 만한 식량을 준다는 것은 다시 캘던의 곳간을 푸는 것과 같았다. 카르낙 본인이 애써 닫은 그 창고를 말이다. 이래서야 걸어 잠근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게 다 파니릴리 때문이지. 그 여자가 곳간을 너무 일찍 열어 버린 탓이리라. 그러나 카르낙은 더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다.
“좋아. 차용증을 쓰면 식량을 내어 주지.”
사제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폐하께 아마네스 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디셋.”
카르낙은 제 콧잔등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온 김에 성혼식에 좀 서 줘야겠다.”
“…예?”
에이가도 디셋만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카르낙은 그런 에이가를 보고 씩 웃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 소리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