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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38화 (38/231)

38화

성문을 전부 닫고 도개교를 끊어 버려도 적어도 1년은 배불리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었다. 그런데 모두 다 굶어 죽을 순 없다고? 오히려 지금 모두를 굶겨 죽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 같이 손가락 빨자는 거야?”

“모웨나에 전령을 보냈어요. 카스티 제도에서 필요한 것들을 수입해 올 거예요. 그때까지 버티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카스티 제도에서 수입을 해 온다고? 무슨 돈으로?”

카르낙의 눈이 곧바로 에이가를 향했다.

“에이가!”

에이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왕실 재정을 지출했어?”

“그것은….”

“얼음을 사지 않으니 아예 그 돈을 바닷물에 처박은 거야?”

릴리는 에이가를 향한 카르낙의 서슬 퍼런 시선을 막아섰다.

“에이가에게 제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요. 그러니 그녀는 잘못이 없어요.”

“끼어들지 마.”

카르낙이 금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릴리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요. 이 일에 에이가를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거예요. 모두 전적으로 제 의지였어요.”

“…….”

카르낙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소하며 물었다.

“…네가 뭔데?”

에이가의 얼굴이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아가씨에게 그런 말을….”

로로가 항변하려는 에이가의 어깨를 잡았다. 혹여 카르낙의 심기를 건드려 더 큰 사달을 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릴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파니릴리 알기어스죠.”

누군가가 신음을 흘렸다. 망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잘했다는 뜻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카르낙은 릴리의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더 바짝 다가서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서? 네 아비를 닮아 미쳤다고 고백하는 건가, 지금?”

“네가 뭐냐고 여쭈어보시기에 대답한 것뿐입니다, 폐하. 대답하지 않으면 행여나 발로 저를 찰까 염려되어서요.”

“지금 엘버그가 전쟁 중이라는 것은 아나? 파니릴리 알기어스?”

“네, 폐하.”

“전쟁 중에 성안의 식량 창고를 터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라고 생각해?”

“전쟁 중에 성안을 터는 건 모르겠고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은 제정신이어야 할 수 있겠죠.”

“그 말은 뭐지? 내가 제정신이 아니란 거야?”

“여쭈어보시니 대답한 것뿐입니다.”

“예의 바른 척 집어치워. 그래 봤자 내 곳간을 턴 도둑놈일 뿐이니까.”

“사고방식이 몹시 편협하십니다. 폐하 혼자 드시기엔 양이 너무 많지 않을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도 다 못 드실 텐데요. 어차피 죽을 때 싸 가지도 못하잖습니까?”

아예 저주를 하라지. 카르낙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 혼자 처먹으려고 창고를 채워 둔 게 아니야. 비상시를 대비해서 전쟁 중 우리가 고립되었을 때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채워 둔 거라고. 조금이라도 더 살려 두려고!”

“그럼 지금이 전시라고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그와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인데요”

“아니, 달라. 지금 너는 내 식량을 거지 떼에게 적선하고 있잖아…!”

카르낙이 손가락으로 길게 줄을 선 이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릴리도 지지 않고 그들을 가리키며 항변했다.

“저자들이 폐하의 사람들이에요…!”

“아니야!”

카르낙이 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성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바닥에 웅크린 이들이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릴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충격에 이명이 들렸다. 그녀는 침착해지기 위해 제 볼 안쪽 살을 씹어 댔다.

카르낙은 불안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저자들은 내 사람들이 아니야. 저자들은….”

저들은 원수다. 증오다. 분노다. 비겁한 방관자들이다. 학살자일 뿐이다.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벌레 같은….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하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아. 돕고 싶지 않다. 아량을 베풀고 싶지 않다. 그들이 했던 것처럼. 꼭 그들이 저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좀 보세요. 폐하께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저 힘없고 지치고 나약하고 굶주린 사람들일 뿐이잖아요.”

아니. 아니야.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속고 있어. 파니릴리.

“그들은 폐하를 무서워한다고요.”

“아니. 그들은 날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는 돈, 성, 힘, 군사, 권력을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강해졌기 때문에 바짝 엎드려 있는 것뿐이야. 그들은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어. 잔인해질 수 있지. 저들보다 나약한 존재들이라면 얼마든지 찢고 베고 잘라 낼 수 있는 자들이야.”

너는 몰라. 너는 모르지. 너는 그 비참함을 알 턱이 없지.

“폐하.”

“세상이 온통 잿빛이야, 릴리. 마치 세상에 색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이 재앙이 어떤 이에겐 비로소 평화로 느껴지기도 할 테지. 드디어 모두와 똑같아졌으니까. 더는 까만 머리를, 그을린 피부를 감추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

“…….”

“그러니 이깟 모래 폭풍 좀 불면 어때. 겨우 이 정도일 뿐이야.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더 많지. 그런데 아비와는 다르게 어질고 아름다운 알기어스는 성의 창고를 털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저들에게는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아닌가.”

“행복과 불행은 교환되지 않아요. 누군가가 불행하다고 해서 누군가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온기 같은 거예요. 폐하, 불행도 행복도 결국엔 나누어 갖는 거라고요.”

“아직 동화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군, 릴리.”

카르낙은 조소했다. 아아, 한때는 너를 나와 같다 생각했지. 마음 깊은 곳의 무언가가 통한다고 믿었다. 어쩌면 너라면 조금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아주 조금은 무언가를 나누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아니다. 아니었다. 아직도 너는 동화 속을 헤매고 있구나. 참으로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보며 살았구나. 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우리의 불행은 엘버그인들의 행복이었다. 흑과 백처럼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다.

“결국 너도 엘버그 사람일 뿐인가.”

“저는 제가 믿는 것을 따를 뿐이에요.”

아, 그래. 맞아. 그 아름다운 동화 말이야. 네가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이지.

“그래. 그렇다면 나 역시 내가 믿는 것을 따르지. 창고를 닫아 에이가.”

릴리의 얼굴에 드디어 균열이 갔다. 그래,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금이 간 얼굴이. 그는 릴리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적선은 끝났어. 이젠 모두 한 번쯤 경험해 봐야지. 흙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이야.”

카르낙의 눈이 잔인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 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에 둔통이 일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옷깃을 붙잡아 보려 손을 들었으나 이미 뻗어도 잡지 못할 만큼 그는 멀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하여 자괴감이 들었다. 그것은 릴리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앞으로는 이 고통에 익숙해져야만 하리라. 카르낙의 곁에서 견디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그를 지키고 그래서, 또 제 자유를 찾으려면 말이다.

***

해가 보이지 않는 낮도 좋지 않지만 고된 하루의 끝에 별을 볼 수 없는 것은 더 우울했다. 이런 때일수록 비가 더욱 간절하건만 여전히 사방은 건조하기만 했다. 릴리는 정원을 산책하는 대신 임시로 창을 가린 방수포를 돌돌 말아 올린 채 뿌옇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지쳐 버렸다. 새까만 먼지가 내려앉은 숲을 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가씨.”

로로가 느린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왔다. 릴리는 창턱에 기댄 채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로로, 어쩐 일이에요?”

“밤 인사를 드리러 왔답니다. 고된 일정에 혹여 몸이 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고마워요,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릴리는 옅게 웃어 보였다. 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낯빛을 살폈다. 혹여나 릴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지는 않을까 기다리는 듯했다.

릴리는 제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곧 불안한 음성으로 로로에게 물었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로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가씨는 최선을 다하셨답니다.”

“폐하를 돕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분을 위한 일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분을 돕고 계십니다.”

릴리는 씁쓸히 웃었다.

“그분을 화나게 만들었죠. 혹여 폐하의 심중에 고통을 드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요.”

로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그녀가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정도까지 거리를 좁혔다.

“그는 단단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어린아이랍니다, 아가씨.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영특하고 기민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음이 두려워 울음을 터트리던 때와 같지요. 결코 자라나지 못했답니다.”

“…….”

“너무도 나약하여 아주 작은 자극에도 가시를 세우지요. 증오를 방패로 삼아 그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랍니다. 혹여 자신이 죽어 버릴까 두려워서요.”

그는 저를 가리켜 동화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온통 새까만 색으로만 가득한 먹지 속에서 살아온 것일까. 만약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라면 어둡고 쓸모없어 보인다 한들 빼앗을 순 없었다.

이제 그만 그것을 버리고 저와 함께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인 게 아닌가. 그래서 아득했다. 그의 증오가 사그라들 수 있게 돕고 싶다. 그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저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저의 존재 자체가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요?”

번드르르한 외형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받기보다 숭배받는 자.

분명 카르낙에게는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을 자들이 자신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뒷걸음을 쳤으리라. 그리하여 그녀에겐 그저 가엽게 보이는 이들이 그에게는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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