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러나 설령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해도 알기어스는 결코 저를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천성이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내이니 사후 지옥에서 다시 만난다 해도 결코 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빈다 하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제 부친을 죽인 원수에게 그의 딸은 옳은 일을 했다며 오히려 위로를 건넨다.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심지어 스코크 자신도 그러했다.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릴리는 그에게 옳다 한다. 알기어스 왕은 가지지 못했던, 설령 가졌다 하더라도 오래전 잃어버린 자애로움을 그의 어린 딸은 넘칠 만큼 갖고 있다.
릴리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물었다.
“혹… 저에게 알기어스 왕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제가 그분을 많이 닮았을까요?”
“아니요, 아가씨.”
어느 때부터인가 성안에 소문이 돌았다. 은빛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눈처럼 하얗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았노라고. 몇몇은 그녀가 죽은 알기어스 왕비의 유령이라 하였다. 또 몇몇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각이라 하였다.
철두철미한 카르낙 발투만이 제거하지 못한 알기어스 왕의 혈육이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환각도 허상도 유령도 아니었다. 알기어스 왕가의 핏줄을 너무도 분명히 타고난 그의 사생아였다.
분명 아비와 같은 얼굴을 하였으나 결코 아비 같은 광기는 없는. 너무도 닮았으나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방패와 칼을 요구하는 대신 캘던의 농부들을 위한 쟁기와 삽을 요청하는, 어질고 아름다운 카르낙 발투만의 신부. 스코크는 진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아마도 그녀는 모르리라. 그녀의 등장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불어넣는지. 얼마나 눈부신 빛인지. 오래전 아름답고 영특했던 어린 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코크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다. 비록 늙고 병든 몸일지라도 기꺼이 그녀에게 쓰임 받고 싶었다. 그리하여 말했다.
“아가씨에게선 아마네스 님이 보입니다.”
감히 고백하건대 왕의 사생아는 그 아비를 능히 넘노라고. 아마도 고통받는 저를 가엽게 여겨 아마네스 님이 보낸 마지막 빛이 아닌가 하노라고.
“스코크.”
“네. 아가씨”
“혹여나 내게….”
릴리는 망설이다 물었다.
“내게 부친과 같은 광기가 보인다면… 그렇다면… 그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 해 줄 수 있나요?”
“아가씨는 절대 부친과 같지 않으실 겁니다.”
그는 확언했다. 그럼에도 릴리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제야 릴리는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비로소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한 얼굴을 하고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스코크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
카르낙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모든 마을의 풍경은 마치 덧대어 그린 듯 똑같았다. 돌보지 않는 무덤이 이리저리 솟아 있는 황무지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천편일률적이어서 모든 엘버그의 국토가 투로들의 사막처럼 보였다. 아무리 달려도 변하지 않는 끔찍한 풍경.
거기에 더해 낯이고 밤이고 먼지 더미에 가려 결코 빛을 볼 수 없는 그늘진 하늘은 미처 모래 폭풍을 피하지 못해 죽은 시체들을 더 처참해 보이게 만들었다.
절망에 빠져 거리에 나앉아 넋을 놓고 있는 사람들이나 울며 혈육의 시체를 수습하는 사람들이나 악착같이 모래 더미를 쓸며 제집을 정비하는 이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더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빛나는 금발이나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벌레처럼 새까만 머리 색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두 똑같은 잿빛일 뿐.
이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분명 재앙일진대 카르낙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지옥 같기도 하고 천국 같기도 했다. 끔찍하면서도 유쾌했다. 참혹하면서도 이상적이었다.
캘던성이 가까워지자 그는 말의 고삐를 당겨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사람들이 성벽을 빙 둘러싸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똑같이 궁핍한 모습으로 항아리며 단지, 천 주머니 같은 것을 마치 생명 줄이라도 되는 듯 가슴께에 꼭 쥔 채였다.
대체 이 줄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며 막 도개교에 당도했을 때쯤 사람들이 그를 지나며 감격한 듯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아마네스 님. 감사합니다.”
분명 문루를 지나기 전까지 비어 있었던 저치들의 항아리와 단지, 헝겊 주머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직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절실한데, 나오는 이들은 환희에 젖은 표정을 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몇몇은 기뻐서 울음을 터트렸다. 카르낙은 성 주변의 광경에 현기증을 느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이 많은 이들을 먹이려고. 설마. 설마 성의 창고를… 설마.
카르낙은 단단히 고삐를 틀어쥐고 오코의 옆구리를 힘껏 찼다. 짧은 투레질과 함께 오코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모래투성이인 사내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어린아이 넷을 데리고 서 있었다. 에이가는 작은 나무 책상에 두 손을 반듯이 올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모두 당신의 식솔인가?”
“예, 마님. 집에 있는 젖먹이와 아내까지 모두 일곱입니다.”
“자네와 아이 네 명분의 음식밖에 줄 수 없네. 분명 확인된 수만큼만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엄한 태도에 사내는 읍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님. 아내는 출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산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지금은 거동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에이가는 고개를 저었다.
“굶주린 아내의 젖이 마르고 있습니다. 부디….”
“주도록 해요, 에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군지 돌아보지 않아도 훤히 안다. 캘던성에서 로로보다 더 너그러운 이는 한 명뿐이지 않은가.
“아가씨.”
“아내의 건강은 어떤가요? 피는 멎었나요?”
사내는 잔뜩 허리를 굽히며 혹여나 제 아이들이 무례를 범할까 손으로 작은 머리통들을 내리눌렀다.
“예. 아가씨. 굶주린 것 말고는 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더니 릴리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자, 여기요.”
릴리가 내민 것을 감히 받지 못하고 사내는 아주 약간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황급하게 다시 숙였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카르낙 발투만의 성에 단 하나 남은 왕의 혈육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눈부신 은색 머리카락이었다. 알기어스 왕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비천한 농부인 저가 처음으로 보는 왕족이자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였다. 사내는 놀랍고 벅찬 한편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알기어스의 핏줄이라지. 미친 왕 알기어스의 사생아라지. 어떤 광증은 피를 타고 대대로 이어진다 했다. 무성한 소문은 신비한 동시에 섬뜩하여 누구도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신의 저주를 받을 듯하여 모두들 쉬쉬했다.
그러니 감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저지른 것 아닐까. 당장 목이 잘려 나간다 한들 이상할 게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이가 저에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으니 감히 받기가 두려웠다. 왠지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만 할 것 같았다.
“버터라는 건데…. 잘은 모르지만 소의 젖으로 만든다고 들었어요.”
에이가는 그제야 릴리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 귀한 것을…. 제정신이냐는 눈빛에 릴리가 선수 쳐 말했다.
“내가 먹지 않아 남은 거예요. 그러니 잔소리할 생각 말아요.”
서민은 평생 먹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캘던성에서 나는 버터는 절로 회가 동하는 부드러운 향에 입 안에서 녹는 풍부한 맛이 일품이라 매우 귀했다. 부유한 귀족들조차 왕의 연회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받아요. 산모에게도 아이에게도 분명 좋을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겠지만….
“정말… 이것을 제가… 제가 받아도 될는지요…?”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침을 삼켰다. 릴리는 개중 가장 큰 아이에게 제 주머니를 건넸다.
“자. 네가 가져가렴.”
주춤거리는 제 아비와는 다르게 아이는 냉큼 그것을 받아 들었다. 릴리는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꼭 엄마 먼저 줘야 한다? 알겠지?”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착하다며 머리를 두드려 주고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되니 하는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에이가는 일곱 명분의 밀과 귀리를 채워 주었다.
문루 쪽에서 뿌우우, 하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왕의 흑마를 알아본 정찰병이 서둘러 호각을 분 것이다. 바삐 재고를 확인하던 로로가 그 소리를 듣고 창고에서 나왔다. 에이가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르낙은 눈 깜짝할 새에 문루를 지나 곡식을 나누어 주고 있는 마구간의 앞에 당도하였다. 그러더니 마구간지기가 채 말의 고삐를 쥐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려 성큼성큼 에이가의 앞에 다가왔다. 사람들은 왕의 등장에 땅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폐하… 무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에이가가 그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카르낙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설마 성의 창고에서 가져온 것들은 아니겠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하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궁지에 몰린 에이가가 입만 뻐끔거리자 릴리가 나섰다.
“맞아요.”
카르낙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이게 대체….”
“모두 다 굶어 죽을 순 없잖아요.”
아니. 그것을 물어보려는 게 아니었다. 대체 얼굴에 왜 흉터가 나 있는지를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릴리는 전혀 다른 것을 변명했다. 모두 다? 모두 다가 누군데? 창고를 개방해 식량을 흩뿌리지만 않는다면 결코 굶어 죽을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