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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36화 (36/231)

36화

“물건을 수입해 와야 해요. 사람이 먹을 것뿐만 아니라 가축이 먹을 것까지요. 모웨나에 전령을 보내세요. 카스티 제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을 사들이라고요. 수입품의 3분의 1은 모웨나의 사람들을 위해 하사하고 나머지는 안전하게 캘던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무장한 병사들이 호송토록 해야 해요.”

“그렇다면 물건을 사들일 돈은….”

“에이가가 마련해 둘 겁니다.”

“예, 아가씨.”

로로는 두말 않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 에이가를 찾아 반대편으로 걸었다.

릴리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대장간에 도착했다. 한참 분주히 작업 중이던 목수와 대장장이들이 모자를 벗고 릴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릴리 아가씨’ 그녀를 향한 태도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속하세요.”

난데없는 등장이 행여나 모두를 방해할까 릴리는 손사래를 치며 독촉했다. 잠시 후 굽은 실루엣이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아가씨.”

“스코크.”

대장간의 우두머리인 장인 스코크가 새하얀 백발을 숙이며 그녀의 앞에 섰다. 존경의 표시로 제 가슴께에 가져다 댄 그의 주름진 손은 굳은살이 박여 단단했으며 손톱 끝에는 어두운 녹이 스며 있었다.

몇 번이고 스치듯 그와 인사를 나눈 적은 있으나 이렇게 마주 보기는 처음이었다. 에이가의 말로는 이 캘던성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장인이라 하였다. 말수가 적고 다소 낯가림이 심한 노인이지만 성내뿐 아니라 성 밖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농민들에게 나누어 줄 농기구들이 필요해요. 삽이나 쟁기처럼 땅을 갈아엎을 수 있는 것들이요.”

릴리의 부탁에 스코크는 금세 그녀의 의중을 파악했다.

“폭풍에 쓸려 온 모래 더미 때문이로군요.”

농작물을 심어 풍부한 결실을 맺으려면 무엇보다 토양의 질이 가장 중요했다. 엘버그가 생긴 이래 대를 이어 가꾸어 온 그 풍부한 토양 위에 황폐한 모래 더미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먹을 수 없는 농작물은 서둘러 자르고 흙을 엎어서 다시 밭을 일구어 놓아야 한다. 다시 씨를 뿌릴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야 한다.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요?”

“글쎄요.”

“몇 개만이라도 괜찮으니 계속해서 생산해야 해요. 캘던이 복구될 때까지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성 밖에 일을 찾지 못한 땜장이들이 제법 될 겁니다. 그들을 불러 모으죠. 더불어 그들에게 캘던을 돌아다니며 망가진 농기구를 수거해 오라고 하면 일이 더 수월해질 겁니다. 망가진 농기구를 손보는 것이 새로 제작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일 테니까요.”

그의 조언에 릴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방법이네요. 스코크,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평생의 업인 것을요. 게다가 성 밖에는 저의 형제와 친지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할 겁니다.”

“고마워요.”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아가씨.”

스코크가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두툼하고 거친 노인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말간 미소가 번졌다. 직접 만나 보니 에이가의 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웃음에 인색할지는 몰라도 상냥하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에이가나 로로보다 대하기 편하다고 할까. 아니면 듬직하다고 해야 할까. 릴리는 목례를 하고 돌아서려다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 멈췄다.

“그런데, 스코크.”

스코크는 다시 몸을 낮추며 즉시 대답했다.

“예, 아가씨.”

“캘던성에 아주 오래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 얼마나 계셨죠?”

“일곱 살 때 들어와 계속 살았으니 족히 오십여 년은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럼….”

릴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알기어스 왕을 보신 적이 있나요?”

스코크는 눈처럼 하얀 릴리의 얼굴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의 존재를 알고 난 이후 언젠가 이런 때가 오리라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캘던성안에 알기어스 왕의 측근이라고는 저 말고 남은 이가 없었다. 그러니 부친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면 분명 저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리고 그것을 왜 묻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파니릴리가 알기어스 왕의 딸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니 말이다.

“예. 그분이 아주 어릴 때부터 뵈었지요. 태어나셔서 걷고 뛰고, 장성하여 칼을 휘두르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답니다.”

“…그럼.”

릴리는 망설이며 제 입술을 씹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많았지만 무엇 하나 쉽지가 않았다. 호기심만큼 두려움도 컸다.

“어릴 때는 아주 영특하고 씩씩한 분이셨지요.”

스코크가 먼저 입을 뗐다. 릴리의 두려움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했답니다. 다시없는 성군이 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어쩌면….”

“…….”

“어쩌면 그게 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절도, 슬픔도, 고난도 겪어 본 적 없이 그저 무한히 사랑받고 숭배받았으니….”

미움받은 경험도, 실패해 본 경험도, 비난받아 본 경험도 없는 삶.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그를 광기로 몰고 갔을까. 모두가 그들의 어린 왕을 위해 헌신했건만, 그로 인해 행복하고 긍지를 가졌건만 너무나 작은 그릇에 많은 것을 담으려 한 걸까. 그것이 넘쳐흘러 결국 이렇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숭배할까요?”

릴리가 물었다. 스코크는 그녀를 보며 잿빛 눈동자에 곱슬거리는 은발을 휘날리던 저의 어린 왕을 떠올렸다.

“스코크, 대장장이들은 마법을 부릴 수 있단 말이 정말이야? 철을 이어 붙이듯 죽은 사람의 목숨도 이어 붙일 수 있단 말이 사실이야?”

제 뒤를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던 아이는 쇠망치를 두드리는 소리,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궁이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크고 단단하고 힘이 넘치는 대장간의 사내들을 좋아했다. 그것에 매료되어 일찍이 검을 만지고 일찍이 달군 쇠와 집게 따위를 만졌다.

스코크는 대장간을 좋아하는 어린 왕이 좋았다. 자랑스러웠다.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광기의 전조인 줄도 모르고, 그가 불꽃을 보며 피를 떠올리는 줄도 모르고, 번뜩이던 안광에 잔인한 것이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아니요, 아가씨. 다만 모두들 두려워할 뿐이랍니다. 알기어스 왕도, 왕의 죽음도 그리고 새로운 왕도요.”

“당신은 어떤가요? 스코크? 당신도 카르낙 발투만이 두려운가요?”

릴리의 물음에 스코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 두렵지요. 그러나 엘버그에 반드시 필요한 분이란 것은 안답니다. 저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가씨, 감히 우리가 거스르지 못하는 아주 거대한 신의 뜻이 있다는 것을요. 제가 이렇게 살아남아 파니릴리 아가씨를 뵙게 된 것 또한 신의 뜻이겠지요.”

“카르낙이 당신을 살려 두었죠. 그렇죠?”

“예, 그렇습니다.”

카르낙은 자비로운 자가 아니다. 알기어스의 친족들이 모두 죽었듯 그와 가까운 이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그렇다면 스코크는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실력이 너무 뛰어나 죽이기 아까웠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제가 그분을 배신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알기어스 왕을 배반했답니다, 아가씨.”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를 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위해 못할 것이 없다 생각했다. 그를 향한 믿음은 어느새 아집이 되었다.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그의 손에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왕에 대한 충정과 사랑은 그렇게 돌아왔다. 기꺼이 그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려 했지만 왕은 그 대신 목숨보다 아끼는 두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갔더라면, 그랬다면 아마 이토록 고통스러워지지도 않았으리라.

스코크는 더 이상 그를 섬길 수 없었다. 그에 대해 품었던 기대와 신념은 사라진 후 자리한 것은 허무함과 증오뿐이었다. 처자식을 처참하게 죽인 왕보다 미웠던 것은 어린 왕이 미쳐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바로잡지 못한 스코크 자신이었다.

엇나가는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저로 인해 야기된 결과를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스코크는 카르낙을 도왔다. 자해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를 위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달군 검을 만들어 주고 엘버그 군인들의 검과 방패가 쉽게 부러지도록 불순물을 넣어 생산하기 시작했다.

스코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름진 눈가에 고통이 엿보였다. 쇠를 두드리며 견고하고 단단해진 노인의 성정은 그 순간 몹시도 슬프고 연약했다.

“살면서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저는 왕을 배반했답니다. 군주에 대한 충정을 너무도 쉽게 버렸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했지요.”

그러나 카르낙은 감히 모시던 주군을 배반한 종이니 목을 베어 달라 청하는 스코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왕을 배반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르는 것은 너무도 쉬우니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고통받으며 치루라고.

그 이후 고통 속에 살았다. 오직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살았다. 카르낙의 성안에 고립된 채 누군가에게는 반역자로 누군가에게는 변절자로, 또 누군가에게는 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고통스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견뎌야 할 것들이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 죽음은 너무도 쉽지. 그것으로는 차마 용서받을 수 없을 테지.

“옳은 일을 한 거예요.”

릴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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