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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35화 (35/231)

35화

로로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시니 아가씨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요.”

릴리는 아주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명령했다. 더는 머물 이유가 없었다. 리쿠스는 세일린에게 상처에 바를 고약과 붕대를 건네주고 다시 상자를 꾸렸다. 그러고는 릴리를 향해 고개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꾸벅 인사를 한 후 무겁게 상체를 들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근위병이 철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세일린이 곧장 물에 적신 수건으로 릴리의 얼굴과 목 주변의 핏물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릴리는 얌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폐하가 향하신 곳이 어디죠?”

로로가 즉각 한발 나서서 공손히 대답했다.

“브롱힐즈입니다. 아가씨. 에인힐즈와는 달리 대륙의 서쪽에 있어 제법 거리가 됩니다.”

서쪽이라면 폭풍이 불어온 방향이다. 폭풍은 분명 서쪽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폭풍을 만나셨겠군요.”

“…예.”

로로의 대답이 고통스럽게 뜸을 들이다 내려앉았다. 착잡하고 두려운 마음 한편에 그럼에도 카르낙의 강함을 믿고 싶은 마음이 같이 존재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여러 번 모래 폭풍을 겪으셨습니다. 분명 이번에도 잘 견디셨을 겁니다.”

시시때때로 불어닥치는 모래 폭풍을 그는 잘 견뎌 왔다. 이보다 더 숱한 고난도 그는 이겨 왔다. 고작 이런 모래 폭풍에 매몰될 장부가 아니다.

“그래도 폐하의 안위는 확인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안 그래도 순찰병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폭풍이 가라앉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세일린이 피 묻은 수건을 내려놓고 릴리의 얼굴에 고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상처가 따끔거리고 열이 몰려 욱신거렸다. 해열에 좋은 약초를 찾아다 뭉개 얼굴에 바르면 좋겠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를 좀 정해야겠어요. 성 밖은 더 아비규환일 테니 폭풍이 지나간 후의 대책이 필요해요. 폐하께선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처리하셨죠?”

한참을 충격에 휩싸여 멍하던 에이가가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털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게다가 성의 살림은 자신의 책임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식수였다. 영특한 누군가가 성내의 우물에 천을 덮어 두었다면 어느 정도 보장되겠지만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술 저장고에 불이 났다니 당분간 질 좋은 술은 먹을 수 없겠지만. 부엌과 음식 저장고만 성하다면 술이야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러나 저장고의 바로 위에 부엌이 있어 창고가 폭발하며 분명 거기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나마 직조실로 불이 옮겨붙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적어도 귀한 옷감들만은 보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창고가 무사한지 살펴야지요. 그다음엔 가축의 안위도 살펴야 하고요. 그다음엔….”

에이가가 생각하느라 말을 흐리자 로로가 그것을 이었다.

“폐하라면 아마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 보셨을 겁니다. 부상자나 사망자 수를 파악하고 캘던성의 피해 상황도 확인하셨겠지요. 부서진 성벽이나 깨진 창문이 얼마나 되는지 같은 것을요. 그러고 나서는 아마… 아마도 성 밖의 상황을 살펴보셨을 겁니다.”

캘던 사람들을 구제하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이 그라면 분명 피해 상황을 살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수록 기뻐했을지언정 자신의 것을 파악하는 것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오래전 사막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성안의 상황부터 파악하고 나면 주민들을 구제할 방안을 내기에도 쉽겠네요.”

위의 이유로 로로는 릴리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카르낙이 과연 이런 때에 엘버그인들을 보살필 만큼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가. 차라리 기뻐했을 확률이 더 컸다. 드디어 사막에만 불던 모래 폭풍이 엘버그 내륙에 당도하였으니 진정한 인과응보라며 단 한 방울뿐인 술잔이라도 기꺼이 들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로로. 훌륭한 조언이에요.”

“저는 그저 여쭈시는 것에 답했을 뿐이랍니다.”

로로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보는 에이가의 낯빛이 어두웠다.

얼마나 말을 껴안고 엎드려 있었을까.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바람 소리가 멎었다. 덮은 망토 위에 모래가 쌓였다. 자신과 말이 내뿜은 더운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르낙은 자신을 누르는 모래의 무게를 이겨 내려 어깨와 허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절로 어금니가 다물리고 근육들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오코가 먼저 모래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제 주인의 판판한 가슴 안에 머리를 넣고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카르낙은 제 말의 머리를 지렛대 삼아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고마움의 표시로 오코의 콧등을 두드렸다.

콜록콜록 매캐한 먼지에 기침이 났다. 눈도 따가워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푸르던 초원은 모두 잿더미처럼 변해 있었다. 하얀 눈 대신 잿빛 모래에 쌓인 풍경이 익숙하여 진저리가 났다.

“카르낙!”

저 멀리 동그란 구덩이가 생기더니 흙더미가 꿈틀거렸다. 카르낙은 제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그에게로 향했다. 손이며 얼굴이며 머리카락이며 모두 먼지투성이라 별 소용은 없었다. 카르낙은 대충 먼지를 털어 낸 손으로 핀의 팔목을 쥐었다.

핀도 카르낙의 팔목에 제 손을 단단히 감았다. 하나 둘 셋, 하고 박자를 맞춰 카르낙이 그를 있는 힘껏 당겼다. 핀도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켰다. 서로 손을 붙잡고 휘청일 듯 카르낙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난 후에야 핀의 모습이 흙더미 속에서 완연하게 드러났다.

“빌어먹을!”

핀이 숨을 헐떡이며 욕부터 뱉어 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잿빛이었다. 멀리서 보면 분명 회색 석고로 만든 조각상으로 보이리라. 핀은 제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며 침을 뱉었다. 멀게야 할 체액이 구정물처럼 혼탁했다. 그는 제 무릎을 짚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카르낙이 물었다. 핀은 고개를 흔들었다.

“퉤! 뒈지는 줄 알았어. 퉷, 퉤!”

몇 번이나 더 침을 뱉어 낸 후 핀은 제 입가를 닦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카르낙의 시선은 캘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혼탁하고 더러운 모래 먼지가 안개처럼 끼어 있었지만 분명 그가보는 곳은 캘던이었다.

“에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당장 서둘러야 해.”

핀이 카르낙을 향해 말했다.

“캘던에는 로로가 있잖아. 에이가도 있고. 모두 무사할 거야. 늘 그랬듯이 수습도 완벽하게 할 거고.”

“에이가는 이런 폭풍을 겪어 본 적 없어. 로로는 너무 늙어 누군가가 보호해야만 해.”

“캘던성이야.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요새라고.”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이라며 매일 밤 숲으로 향하던 릴리가 떠올랐다. 근심 어린 목소리로 젖은 냄새를 맡으러 나왔다고 했지.

그녀는 이런 재앙을 알고 있었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대지의 모든 것들이 죽는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을까. 그녀는 그라타에서 이런 것을 겪어 보았을까. 혹여 대비하지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고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카르낙,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족히 사흘은 걸려. 브롱힐즈가 코앞이야.”

카르낙은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혼돈이 핀의 눈에는 너무도 확연히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네가 고집한 일이잖아.”

먼 곳을 바라보며 골몰하던 카르낙이 한참 만에 핀의 초조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핀.”

저를 부르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하고 진지했다. 계략을 꾸밀 때 그는 늘 이런 표정을 했었다. 저 비열하고 약아빠진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걸까.“

“싫어.”

핀은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거절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늘 그렇듯 그의 대답을 무시한 채 씩 웃었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

카르낙 발투만. 이 망할 자식아.

***

폭풍이 지나간 후 캘던성은 빠르게 재정비를 시작했다. 깨진 유리의 파편들은 모두 깨끗하게 쓸어 없애고 유리창이 다시 보수될 때까지는 방수포로 막아 두었다. 소실된 술 저장고는 깨끗이 치우고 남은 나무 술통 모두 부엌으로 이동시켰다. 다행히 부엌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목재로 바닥을 덧대는 대신 벽돌로 타일을 만들어 깔아 둔 덕이었다.

릴리는 에이가에게 엘버그에서는 망자의 장례를 어떻게 치르느냐 물었고 에이가는 모두 땅에 묻는다고 하였다. 엘버그의 전통에 따라 릴리는 화재로 인한 사망자들을 깨끗한 천으로 말아 가족들의 품으로 보냈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 손을 잡아 준 후 위로의 말을 건넸고 거기에 더하여 장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몇 푼의 돈을 쥐여 주었다. 몇몇은 울음을 터트렸고 몇몇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모두가 릴리의 상냥함에 황송해하였다.

“토양이 대부분 모래에 덮였습니다. 수확할 수 있는 농작물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은 먹을 것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듯합니다.”

사방의 먼지 다발을 긁어내고 털어 내느라 분주한 가운데, 로로는 릴리를 따라 안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창고에 식량은 얼마나 되죠?”

“캘던성의 식솔들이 먹고살 수 있는 1년 치 식량이 들어 있지요.”

전시를 위해 보관해 둔 것이다. 한때 그 창고는 알기어스 왕의 동상과 호화로운 보석들로 꽉 차 있었다고 했다. 카르낙이 왕좌에 오른 후에는 그것들을 모두 처분하고 그것을 판 값으로 전시에 먹을 식량을 사들여 채웠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창고만은 가득 채워 두었다.

카르낙은 창고가 아주 조금이라도 비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곧 캘던의 법이요 모든 것의 진리였으므로 굶주림에 지쳐 흙을 퍼먹을지언정 누구도 그 창고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캘던의 모든 사람이 먹는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한 달?”

“…글쎄요.”

캘던은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만큼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과연 한 달이나 날 수 있을까. 어쩌면 2주도 못 버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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