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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34화 (34/231)

34화

사막에서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겪었지만 매번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했다. 어째서 모래 폭풍이 사막과도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밀어닥쳤는지 알 길이 없다.

이곳을 통과하면 곧장 캘던이었다. 성에 남아 있는 에이가와 로로, 릴리가 떠올랐다. 그들은 이것을 보았을까. 불어난 몸집이 어디까지 가 소멸할지 생각할 찰나도 없었다. 폭풍을 피해 달아나기에도 이미 너무 늦었다. 카르낙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따란 평야에는 폭풍을 피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이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에 바짝 엎드려 있는 수밖에.

카르낙은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발로 힘껏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히힝, 하고 흥분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곧 말은 주인의 뜻대로 언덕 방향으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더 빨리! 더! 카르낙은 계속해서 박차를 가했다. 뒤따라오는 핀의 말이 내는 말발굽 소리가 더해져 다그닥거리는 소리는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히히히힝! 하는 말의 신경질적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르낙!”

핀이 부름과 동시에 새까만 모래가 시야를 가렸다. 카르낙의 흑마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신경질적으로 울고 앞발을 들어 몸부림쳤다. 움켜쥐었던 고삐를 놓치며 카르낙이 말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곧 말이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쓰러졌다. 사방이 암흑이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입과 코 안으로 모래가 밀려 들어왔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몸이 몇 번이고 이리저리 구르고 밀려났다.

“핀!”

카르낙은 있는 힘껏 소리치며 그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는 망토 자락을 힘껏 잡아당겨 제 얼굴을 가렸다.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바람에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절로 났다. 바람의 저항력을 낮추기 위해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선 앞으로 천천히 포복 전진했다. 몇 번이고 바람에 밀려 몸이 뒤집혔다. 멀리서 말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카르낙은 그곳을 향해 기었다. 어금니를 사리문 채 얼마나 기었을까. 더듬거리는 손에 말발굽이 잡혔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말이 날뛰었다.

“오코!”

카르낙이 제 흑마를 부르며 그의 다리를 더듬어 올라갔다. 이대로 두면 놈은 모래에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배와 가슴을 차례대로 더듬어 올라가 그의 주둥이를 찾아내었다. 그러더니 제 망토 안에 종마의 머리를 집어넣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모래알이 바늘같이 그의 몸을 찔러 댔다. 자꾸만 몸이 밀려 말의 머리를 꽉 붙잡았다. 카르낙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악다문 채 신음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핀.

곧 캘던성에도 모래 폭풍이 밀어닥쳤다. 쾅! 하고 창문에 부딪히더니 마치 북을 두드리듯 굉음이 지속되었다. 그 바람에 시종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개중 한 명이 놀라 손에 든 촛대를 떨어뜨렸다.

“안 돼!”

에이가가 비명을 질렀다. 세일린이 곧장 뛰어가 심지를 발로 짓밟았다. 다행히 불은 나무 바닥에 옮겨붙기 전에 꺼졌다.

“껐어요! 괜찮아요!”

세일린이 몇 번을 연거푸 초를 짓이기고 소리 질렀다. 목에 핏대를 세울 만큼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사방이 폭풍으로 소란했다. 어쩌면 그 안에 캘던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들었는지도 모른다. 곧이어 무언가가 부서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날카롭게 충돌하고 갈가리 부서지는 신경질적인 소리. 그 이후 몇 번이고 덜컹거리던 덧문이 기어이 활짝 열렸다.

꺄아아아아아악! 하고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웅크렸다. 깨진 유리 조각이 모래에 섞여 내부로 들이닥쳤다. 날카로운 것이 릴리의 팔과 얼굴을 긁고 지나갔다. 몸을 뒤로 돌렸지만 바람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아가씨!”

곁에 서 있던 세일린이 하얗게 질려서는 몸을 돌려 바람을 막았다.

“피해요! 구석으로 가요! 어서요!”

릴리는 눈조차 뜨지 못한 채 고함쳤다. 세일린이 릴리를 벽 쪽으로 이끌었다. 방 안으로 침입한 바람은 무참하게도 모든 것을 헤집었다. 유리는 모두 부서지고 천이란 천은 모두 바람에 흩어지고 펄럭였다. 자욱한 먼지가 사방에 내려앉았다.

모두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기다리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에이가! 릴리 아가씨!”

로로가 성치 않은 몸을 절뚝이며 들어왔다.

“로로!”

에이가는 반가움에 신음처럼 그를 불렀다. 그의 뒤로 무장을 한 근위병 두 명이 뛰어 들어와 방패로 간신히 창문을 막고 두 명은 각각 릴리와 에이가를 부축했다.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노안이 와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와중에도 릴리의 얼굴에 흐르는 선혈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로로는 근위병의 부축을 받아 다가오는 릴리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아니요! 괜찮지 않으세요! 유리 파편이 아가씨를 덮쳤어요!”

세일린의 그녀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며 애써 평온한 릴리의 음색을 가로막았다.

“성의 창문이 모두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실의 장미창도 전부 다 부서졌어요.”

“세상에. 아마네스 님이여.”

예배당의 성화마저도 부서졌다니…. 에이가가 신음을 흘렸다.

“지하로 모시겠습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할 겁니다.”

핏물이 릴리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로로가 신호를 보내자 근위병이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고약과 깨끗한 천을 챙기고 치료사를 데려오도록 해.”

“네, 로로 님.”

세일린이 재빨리 대답했다. 로로도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이내 몸을 돌렸다.

“서두릅시다.”

부디 성벽이 폭풍을 잘 견디길. 로로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릴리는 병사의 품에 안긴 채 지하 갱도로 들어왔다. 단단한 철창을 열고 좁다란 계단을 몇 개 내려왔을까. 동굴처럼 둥글고 편편한 구간이 나타났다. 로로는 곳곳에 초를 켜며 말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왕의 은신처입니다, 릴리 아가씨. 아가씨의 선조들께서 비밀스레 만들어 둔 곳이죠. 갱도를 끝까지 따라가면 곧바로 강줄기가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캘던시를 관통하는 아주 긴 갱도라 하더군요. 저도 끝까지 도달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짐작은 합니다. 아주 긴 갱도니까요.”

“치료사는 아직 멀었나요?”

에이가가 애가 타 발을 동동 구르며 제 손수건으로 릴리의 얼굴을 지혈하며 물었다.\

“이런 때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답니까! 무슨 일이 나면 즉각 성주의 곁을 지켜야지요!”

“에이가, 괜한 고집 부리지 말아요.”

성마른 소리를 해 릴리가 만류했지만 덕분에 늙은이의 감정은 더 격해지고야 말았다.

“얼마나 귀한 몸인데! 차라리 이년의 얼굴을 긁어 놓을 것이지! 이러다 흉이라도 지면 저는 제명에 못 삽니다!”

그때였다. 철컹, 하고 철창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발걸음에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섞여 있었다. 필시 치료사와 물동이를 든 세일린이리라.

“이쪽이에요!”

에이가가 재촉하듯 고함을 질렀다. 굴 안에 들어서자마자 금발의 치료사 리쿠스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릴리의 앞으로 다가와 에이가의 손수건을 조심스레 치웠다. 사내에게서 탄 내음이 났다.

릴리는 의심스럽게 코를 킁킁거렸다. 그 와중에 리쿠스는 안경알 너머 릴리의 얼굴에 박힌 유리 파편 몇 조각을 발견하고 몸을 굽혀 가는 집게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릴리가 킁킁거리다 물었다 리쿠스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집게를 깨끗하게 세척하며 대답했다.

“작은 파편 몇 개가 얼굴에 박혀 있습니다, 아가씨. 일단 파편부터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그것 말고요. 탄 냄새가 나요. 무슨 일이에요?”

“난리 통에 술 저장고에 불이 붙은 모양입니다.”

치료사는 바지런히 집게를 놀렸다.

“뭐라고요?”

에이가가 파랗게 질려 되물었다.

“저장고는 폭발했고요. 옮겨붙은 불길은 다행히 크게 번지지 않고 잡혔습니다.”

“다친 사람들은요?”

그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막 릴리의 얼굴에서 제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파편을 마지막으로 빼낸 참이었다.

“얼마나 죽었죠?”

릴리가 물었다.

“다섯입니다. 아가씨.”

리쿠스의 대답에 에이가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었다.

“파편은 다 빼냈나요?”

“예, 아가씨. 이제 상처 난 부위를 깨끗하게 닦고 고약을 바르면….”

릴리는 손으로 대충 눈가를 문질러 흐릿하게 눈을 뜨더니 리쿠스의 손에 들린 젖은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됐어요. 나머진 세일린이 해 줄 거예요.”

“예?”

릴리는 세일린을 향해 수건을 내밀었다. 세일린은 즉각 그것을 받아 들고 리쿠스를 바라보았다.

“저장고로 가 보세요. 거기 있다 오셨을 테죠?”

“예. 하지만….”

“아가씨!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아가씨 얼굴에 흐른 피도 다 닦지 못했어요!”

에이가가 기함하며 나섰다. 노기를 띤 그녀의 안색에 릴리를 제외한 모두가 뻣뻣하게 굳었다.

“겨우 핏자국 좀 닦아 내고 연고를 바르는 일이에요.”

“그 일을 하라고 치료사가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성에 상주하는 이유는 바로 아가씨와 폐하를 위해서라고요!”

“그런 법은 없어요!”

릴리가 고함을 치자 내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같은 계절이 돌아올 동안 에이가도, 로로도 그리고 세일린도 릴리가 화를 내거나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평안하고 온화했으며 언제나 침착했다. 더러는 얄미울 정도로 태평하기도 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여 숨도 쉬지 못하는 것은 그런 릴리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폐하의 부재 시 제가 이 성의 성주가 아니던가요? 내가 있는 한 치료사는 성주뿐 아니라 캘던성의 모든 자를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의 경중을 지위에 따라 나눌 수 없어요. 반대편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나 하나 좋자고 사람 살릴 손을 붙드는 일은 절대로 용납 못 해요! 절대로요! 아시겠어요?”

모두가 얼어붙어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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