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과연… 이런 방식이라면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이길 만하다. 계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전장에 잔뼈가 굵은 저도 넋이 나갈 정도이니. 아무튼 심상치 않은 여자임에는 분명하다.
“아무튼, 때가 때이니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어, 카르낙.”
“때가 때이니 더 궁금하잖아. 왜 보자고 했나. 안 그래?”
카르낙의 물음에 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군인이다. 정치에 대한 얄팍한 호기심이나 속셈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위험하냐, 아니면 안전하냐 그 둘뿐이었다.
“나라면 에나와 만날 때 근위대를 데리고 가겠어.”
“은밀히 만나자는데 근위대를 데려갈 순 없어. 너 하나 정도라면 괜찮겠지.”
“때와 장소가 쓰여 있나요?”
둘의 대화에 다시 릴리가 끼어들었다. 카르낙이 다시 한번 편지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쯤 에인힐드 예배당에서 만나자는군.”
“때와 장소를 다시 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의외의 장소에서, 가능한 한 매우 촉박한 시간으로요.”
“동의해. 잔머리 굴릴 시간을 줘서 좋을 게 없지.”
릴리의 말에 핀이 주저 없이 찬성하자 카르낙이 긍정의 뜻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에나에게서 받은 밀지를 태우기 위해 초로 가져갔다.
“폐하.”
그러자 릴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떤 이들이 보았다면 감히 왕의 손을 막았다며 기함했을 장면이었다.
“그 편지는 만약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여 보안이 걱정되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될는지요?”
성내에 적이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없다. 은밀히 오고 간 밀지들을 훔쳐보는 자들이 없을 거란 장담도 못 한다. 그래서 카르낙은 가능하면 이런 것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태웠다. 그럼으로써 정보가 흘러나가는 원천을 차단하고는 했다.
그런 이유로 평소의 습관대로 에나에게서 받은 밀지를 태우려 했다. 릴리가 만약이라는 가설을 세우며 말리지 않았다면 응당 그리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말이 카르낙의 생각을 바꾸었다.
저와는 다르게 파니릴리에게는 적이 없다. 누구도 감히 이 여자에게 적대감을 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진 피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엘버그의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그녀가 가진 혈통만으로도 그녀를 칭송할 것이다. 제 옆에 있기에 그 가치는 더 빛나리라.
만일 이 밀지를 태우지 않고 지닐 수 있다면 이것은 필시 만약의 경우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안전하고 은밀하게 보관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 까닭에 카르낙은 밀지를 태우는 대신 릴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여인으로서 그녀가 어떤 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그녀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에 서도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실보다는 득이 더 많을 것 같은 느낌. 그 순간 카르낙은 갑자기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감정을 제어해야만 할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레 그녀에게 곁을 내어 주는 것은 아닐까, 너무 갑작스레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그어 놓은 선을 너무 빨리 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것을 무어라 해야 하는지 카르낙은 도저히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잃어버리지 마.”
카르낙이 덧붙여 말하자 릴리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고도 진솔한 얼굴이 신뢰감을 주었다.
“자.”
크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바닥에 밀지를 얹어 주고는 꽉 쥘 수 있도록 그녀의 손가락을 오므렸다. 한 번 힘주어 꾹 누르고 물러나는 손끝이 뜨거웠다. 명치에서부터 골반 아래까지 아릿한 무언가가 훑고 내려갔다. 그 느낌이 기묘해 릴리의 한쪽 눈 밑이 떨렸다. 언뜻 카르낙의 손끝도 제 눈가처럼 떨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릴리는 받아 든 밀지를 제 슈미즈 소매 안에 감추고 자연스레 가운 자락을 여몄다. 카르낙이 앞장서고 핀이 릴리의 뒤를 따라 왔던 길을 돌아갔다. 마침내 근위병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당도하자 카르낙이 몸을 돌려 릴리에게 말했다.
“근위병이 침실까지 안내할 거야.”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과한 친절이십니다.”
“이럴 때 왕 노릇 한번 하는 거지.”
카르낙이 근위병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번개 같은 속도로 근위병 하나가 몸을 움직여 릴리의 뒤에 섰다. 카르낙은 숲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가 거두며 잊을세라 말을 덧붙였다.
“내일 적당한 때에 당신의 방으로 정원사를 보내도록 하지. 자세한 것은 그치와 상의해 봐.”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릴리 양.”
“편안한 밤 되십시오. 페하.”
파니릴리가 공손히 인사하며 무릎을 굽혔다. 땅에 떨구었던 시선을 다시 들었을 때는 이미 카르낙이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 후였다.
곧이어 근위병들이 벽이라도 치듯 그 둘의 뒤를 가렸다. 철컹철컹, 그들이 걸을 때마다 판금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가 무겁게 메아리쳤다.
“그동안 아주 깊은 믿음을 쌓았나 봐? 둘이? 에나의 밀지를 넘겨줄 만큼?”
핀이 걸음을 재촉하는 카르낙에게 둘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아군이지. 그것만은 확실해.”
“호오? 그래? 그래서 그렇게 과한 친절을 베푸시나, 카르낙 발투만?”
능글거리는 목소리였다. 카르낙을 골리려 작정한 듯했다.
“머리털이 자라난 약혼녀를 보고 나니 이제 거시기가 동하기 시작했나 보지?”
“네놈의 덜 자란 거시기를 보고 있는 것보다야 확실히.”
“뭐… 야!”
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꽥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근데 매번 징그럽게!
“네가 봤냐? 봤어!?”
그러나 카르낙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이건 내 자긍심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신체 부위보다 더 훌륭하다 자부한단 말이야!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황당하여 우물거리는 새에 그는 발 빠르게 핀과 거리를 벌렸다. 핀은 이를 사리물었다.
“젠장.”
그러고는 카르낙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계단을 두세 개씩 껑충껑충 올랐다.
***
카르낙은 인편을 통해 때와 장소를 바꾼 밀지를 에나에게 보냈다. 두 도시의 중간쯤이었으나 성전과는 조금 더 멀고 캘던과는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밀지를 받을 즈음엔 꽤나 서둘러야 약속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밀지를 보낸 후 사흘이 지나자 카르낙은 늦은 밤 샛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갔다.
왕이 성을 비우고 며칠이 지난 아침, 에이가는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말했다.
“성혼식 집전을 거절한 것이 꽤나 마음에 쓰이신 게 틀림없어요.”
릴리는 카르낙이 보내 준 정원사와 함께 빗물을 모아 순환시킬 수 있는 수로와 물웅덩이를 만드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널따란 테이블 위에는 정원사가 놓고 간 여러 가지 도면들이 정신없이 펼쳐진 채였다.
“뭐라고 했어요, 에이가?”
고개를 돌린 에이가의 낯빛에는 미약하지만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비쳤다.
“에나께서 폐하를 뵙자고 한 이유 말이에요. 분명 마음이 쓰이셨을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계시지만 어쨌든 에나께서도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그 뜻과 의지가 있으셨던 거잖아요.”
무어라 대답해 줘야 할지 몰라 릴리는 고개만 한 번 갸우뚱했다.
“그래서 직접 폐하를 뵙고 양해를 구하려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 말고는 굳이 만날 이유가 없어요. 안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에나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혹여나 나쁜 뜻이 있어 불렀다면 부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길 바랄 뿐이다.
“결혼식을 집전할 사제는 구했나요?”
“아, 그거요.”
에이가의 표정이 영 마뜩잖았다. 여전히 그 부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몇 명의 사제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집전을 꺼려 하더군요. 폐하의 출신 성분을 이유로 들면서 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나 뭐라나. 본인이 지금껏 목을 건사하고 있는 이유는 알지도 못하고서 말이에요.”
그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카르낙이 알기어스의 폭정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유일신이라며 섬기길 거부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캘던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던 사제들은 모조리 그렇게 죽었다. 아마 카르낙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알기어스의 칼날은 더 먼 곳을 향했을 테고 그랬다면 그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에이가에게도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있다. 모든 엘버그인이 그러하듯이. 그도 달의 여신인 아마네스를 사랑하고 숭배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에이가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신 신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이다.
아마네스의 존재조차 지우려는 자를 함락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였다. 모름지기 진정한 신앙이란 그것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신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진정한 신자라면 이교도인 카르낙을 기피하며 거부하는 대신 그에게 아마네스의 사랑과 헌신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니 멍청한 사제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무엇이 진정 아마네스를 위한 길인지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들뿐이었다.
쯧, 하고 에이가는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란 자들은 모두 다 그렇다. 눈앞의 이익에만 전전긍긍하여 멀리 생각하지를 못한다.
“너무 고관대작들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고요?”
“무려 왕의 성혼식이에요. 에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명망 있는 분을 모셔야죠.”
“그러면 나는 캘던성의 노처녀로 늙어 죽겠군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세요.”
“돌아가는 것이 그렇잖아요. 명망 있는 사제를 찾아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원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거절을 미덕으로 여겨요. 그래야 자신이 고귀해진다고 믿는 거죠. 두고 보세요. 두드려서 안 열릴 문은 없으니까.”
릴리는 에이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면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에나가 거부한 집전을 누가 선뜻 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어요? 관료들에게는 왕의 뜻이 가장 중요하듯 사제들에겐 에나의 뜻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캘던 내에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파다해요. 곧 왕국 곳곳에 번져 나가겠죠. 그때쯤 되면 사제들도 별수 없을 거예요.”
마치 릴리의 존재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임에는 확실하지만 과연 에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존재일까. 에나 역시 파니릴리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