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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31화 (31/231)

31화

뿌린 것은 온전히 거두어야 한다. 투로의 피를 뿌렸다면 마땅히 그 위에 뿌린 자의 피를 뿌려야 한다. 여인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마땅히 앗아간 자의 목숨도 앗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 해도 카르낙은 반드시 그 끝을 볼 작정이었다.

자신이 죽어 다시금 세상이 그가 죽기 전 모습으로 회귀한다 하더라도 더는 비천한 생명이라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숨을 앗아갈 순 없는 세상을 만들리라. 그의 턱 끝에 칼을 겨누고도 한 번쯤 망설이게 만들 것이다.

이자가 언젠가 카르낙 발투만이 그랬던 것처럼 저를 죽이고 밟고 올라가 다시 한번 왕좌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이후에 카르낙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왕족과 귀족을 도륙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 주리라. 카르낙이 원하는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그 앞에서 마음의 평화니, 행복이니, 잡히지도 않는 두루뭉술한 것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같은 풍경이었으나 분명 담기는 모양은 다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영원히 비 따윈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들이 우리에게 준 고통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게.”

카르낙이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릴리는 저를 감싸고 있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별빛이 반짝이는 새까만 하늘, 풀벌레들이 찌르르 우는 뒤편의 풀숲, 단단하고 신비로운 주목 나무와 두툼한 슬리퍼 아래 밟히는 풀잎에서 알싸한 향이 났다. 멀리 절벽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쓰고 비린 향기들.

“그라타에선 사람의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자유를 얻는다고 믿어요. 바람이나 공기, 풀이나 나무 같은 것과 섞여 함께 살아간다고요.”

카르낙도 릴리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는 듯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위엔 나를 증오하는 영혼들뿐이겠군. 모두 내 손에 죽은 자들일 테니.”

영혼이란 것이 말을 할 줄 안다면, 혹은 그것을 느끼고 있다면 분명 그들은 증오와 슬픔에 잠겨 있을 것이다. 한 맺힌 절규와 곡소리로 사위가 진동하리라.

“부르테는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에 카르낙이 릴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염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면 어떠한 순간에도 길을 잃거나 방황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 영혼이 대답해 준다고 했어요.”

카르낙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캘던에는 폐하의 손에 죽은 자보다 제 핏줄에 의해 죽은 자들이 훨씬 많을 거예요. 알기어스 왕의 광증이 심해질 때면 성의 내관들을 살육했다 하니 말 그대로 비명횡사였겠죠. 어떤 영혼은 제게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수도 있겠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신부로군. 왕에 걸맞은.”

카르낙의 농담에 릴리는 소리 죽여 웃었다.

“마른 바람 냄새가 나요. 목 안이 따가울 정도로 건조해요.”

아아. 하고 카르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지 알아.”

“어떤 것이요?”

“마른 바람 냄새. 사막에서 많이 느껴 봤지. 어쨌든 내일도 비가 오긴 글렀단 이야기로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낮고 굵은 목소리를 냈다.

“폐하.”

카르낙과 릴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횃불을 든 병사 한 명과 나란히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사내는 카르낙과 마찬가지로 무장하지 않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붉은 횃불 아래에 더 붉게 빛나는 곱슬머리에 거뭇한 주근깨가 희미하게 비쳤다.

“핀.”

카르낙이 그를 알은체했다. 핀은 작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붉은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에나가 보내온 편지였다. 카르낙이 핀의 제법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한번 힐끗 보고서 촛대를 릴리에게 넘겼다. 그가 편지를 펼 동안 릴리는 카르낙 가까이 촛대를 가져다 댔다. 사방이 어두워 편지를 읽지 못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

카르낙은 말없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신중한 눈동자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 몇 구절인가를 재확인했다.

“나를 만나고 싶다는군.”

“이런 때에? 무엇 때문에?”

“테이먼 테르조 때문에.”

“믿을 수 없어.”

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야. 성혼식 집전은 거절해 놓고 정작 식을 치르기도 전에 이런 밀지를 보낸 것도 수상해. 테이먼 테르조와 짜고 치는 수일지도 몰라.”

두 남자가 나직이 속삭이는 것을 릴리는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 심각하고 언짢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만일의 경우 우린 에나를 제거하는 방법까지 생각해 두었잖아. 함정일 가능성이 커. 그런 와중에 반드시 너와 만나야 하는 이유가 뭐야? 테이먼 테르조 따위 자기가 내보내면 그만이잖아.”

“명분이 없기 때문이겠지.”

“사치스러운 고민이잖아. 이런 시국에 중립을 지키는 것이 쉬워? 결국 그도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할 거라고.”

“아니면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 자금줄도 끊긴 마당에 테이먼 테르조가 기댈 곳은 에나뿐이잖아. 바퀴벌레처럼 성전의 곳간을 털어먹고 있을 거고 에나는 거기에 위협을 느꼈을 거야.”

“테이먼 테르조가 뒈지든 네가 뒈지든 그는 손해 볼 게 없는 싸움이야. 그 약아빠진 영감탱이가 너와 테르조를 장기짝으로 쓰는 게 분명해.”

이런 복잡한 문제는 딱 질색이다. 테이먼 테르조는 북쪽에서 이를 갈고 있지, 그 테이먼 테르조를 받아 준 에나는 만나자는 밀지나 보내지, 그래 놓고 결혼식 집전은 하지 않는다지, 양손에 떡을 쥔 채 어느 걸 더 먼저 먹을까 궁리나 하는 약아빠진 영감탱이 같으니.

그것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많다. 성을 보수하고 재정비할 막대한 자금도 마련해야 하고 거기에 더불어 보란 듯이 릴리와 결혼도 치러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복잡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씨까지 말썽이다.

이런 일을 곧잘 해결하던 에이가는 결혼식 문제로 사이가 벌어졌다. 게다가 그녀는 종교에 관해서라면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지라 에나 자식의 목을 비틀어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그와는 매번 대립하기만 하리라.

모르겠다. 도저히.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성전으로 쳐들어가 그 영감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 그러고선 아무나 붙잡고 ‘네가 에나 해라.’ 하고 에나의 모자를 씌워 버리고 끝내고 싶었다.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평생 신에게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는 역할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하다고 다들 이렇게 몸을 사리는지. 에나가 하는 말과 행동이 신의 뜻과 목적이라면 그 신은 참으로 옹졸하고 궁색하지 않나. 그런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모욕이요 굴욕이다.

“돈을 주고 너를 엘버그로 데려온 사람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는군.”

“신뢰할 수 있는 성직자라면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하지도 않아. 이미 거기서부터 불합격이라고.”

카르낙은 웃으며 밀지를 꼬깃꼬깃 접었다.

“어쨌든 이걸 무시할 수는 없어. 테이먼 테르조와 손을 잡고 거기에 또 돈을 주고 너 같은 용병을 들여오면 곤란하니까.”

“어쩌면 저 여자를 요구할지도 몰라.”

저 여자. 핀은 그렇게 말하며 릴리를 쳐다보았다. 아직 카르낙과 결혼하지 않았으니 그녀를 가리킬 만한 지칭은 그것뿐이었다. 카르낙이 핀을 따라 릴리를 쳐다보았다.

“만일 너의 지위나 명분이 공고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분명히 그럴 테지만 저 여자와 너의 결혼을 막으려 들 거야. 테이먼 테르조는 너에게서 자신의 사촌을 지키려고 하겠지. 지금 상황에 너에게 더 힘이 실리는 것이 좋을 리가 없잖아.”

“한 침대를 쓴다고 하세요.”

릴리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뭐?’ 하고 핀이 되물었다.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로서 몸을 섞은 지 한참 되었다고 하면 결혼식을 막아 보았자 소용없지 않겠어요?”

“카스티 제도의 그라타에서 온 여자야.”

넋이 나간 핀에게 카르낙이 다시 한번 그녀의 출신을 상기시켰다. 아, 맞아. 그랬지. 너무 엘버그스러운 외모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도 사실 이 땅의 이방인인 저나 카르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그라타란… 꽤나 개방적인 곳인가 보네.”

“마음만 먹는다면 노파와도 혼인이 가능하대.”

“뭐?”

핀이 기함했다. 카르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는 듯 카르낙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것도 여럿과.”

“…….”

“홀로 남은 노인을 보살피기 위한 절차란 이야긴 빼먹으셨네요.”

“별로 중요한 이야긴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제일 중요해.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핀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머릿속에 저와 노파와의 난잡한 장면이 떠올랐음이 분명했다. 불경하고 천박하나 사람의 머릿속까지 재단할 수 없으니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핀은 끔찍하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멀리 떨쳐 내고 싶어 온몸을 흔들고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 가만, 무슨 이야기 중이었더라? 아 그래. 부부. 혹시 자신을 요구하면 이미 부부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라 했었지. 다시 거기서부터 생각하면 된다. 핀이 물었다.

“그래도 당신을 요구하면요?”

릴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아이를 가졌다고 하세요.”

허, 카르낙이 헛웃음을 쳤다. 핀은 그녀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비를 닮아 벌써 광증이 오는 걸까. 아니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뻔뻔하게 그런 거짓말을 하라고? 몹시도 경건하고 우아한 얼굴과 입술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가.

“과연 몸 안에 우주가 들어 있는 여인답군.”

그러니 그토록 거짓말도 과감하고 정도가 없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거짓말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자니 영 쓸모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카르낙의 아이를 밴 여자를 구태여 돌려받으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테이먼 테르조의 사기를 한풀 꺾을 수도 있다. ‘나쁘지 않은데?’ 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카르낙이 그의 발끝을 툭 찼다.

“말려들지 마. 말했잖아. 말솜씨가 좋다고.”

그제야 핀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잠시 넋이 나갔다. 아니 이건 말발에 홀린 건가? 아니면 황당무계한 말을 하는데도 진지하고 아름다운 저 얼굴에 홀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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