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사내와 처음 손을 잡은 것은 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손길이라고는 올라나 부르테 같은 노인의 주름지고 앙상한, 그럼에도 언제나 따듯한 손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루나와 같은 제 또래 여자들의 보드랍고, 마주 잡으면 서로 쌍둥이처럼 일치하는 자그마한 손 정도였다.
일생 사내와 손을 잡아 볼 일이 없었다. 엘버그에 있을 때는 올라가 전부였고 그라타의 산막에서도 마찬가지로 늘 여인들끼리만 자랐다. 그곳까지 올라와 릴리와 손을 마주 잡을 사내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굳이 그것을 잡아 보지 않고도 사내의 손이란 늘 험한 것을 만지거나 투박한 것을 쥐고 있어 딱딱하고 거칠고 지저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카르낙의 손길이 저의 생각과 영 다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도 여느 사내들과 같이 딱딱하고 거칠었다. 다만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무척이나 뜨겁다는 것이었다.
거칠고 투박하고 커다래서 제 손을 다 감싸고도 남을 만한 손바닥은 쥐고 있는 곳마다 땀이 흐를 정도로 열기가 넘쳤다. 사내의 손이란 참으로 생기가 넘치는구나. 이토록 뜨거운 열기를 담고 있으니 그렇게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것이다.
릴리는 이제야 왜 그리도 사내들이 거칠고 공격적이며 잔인한지 이해가 되었다. 이런 것을 몸 안에 담고 누르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빠르지 않아?”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걸어가던 카르낙이 갑자기 물었다. 릴리는 마치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크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폐하.”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무언가 보여 줄 것이 있다더니 이 울창한 숲속에서 길 한 번 헤매지 않고 간다. 마치 여러 번 와 봤던 사람처럼 말이다. 분명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숲이라 하였는데.
“폐하는 이 숲에 관해서 잘….”
“다 왔어.”
그가 어느 지점엔가 멈추었다. 희미한 촛불에 새까만 밤하늘이 드리워졌다. 빼곡히 차 있던 나무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밟고 있는 땅은 여전히 풀이 우거져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당도해 버린 것 같았다. 끝도 없이 하늘로 이어진.
“봐.”
그는 눈앞의 광경에 넋이 나가 버린 릴리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가 초를 들어 비추어 준 곳은 아주 거대한 나무의 기둥. 벼락을 맞아 쪼개진 듯 가지도 풀잎도 없는 마른 나무의 기둥을 억센 넝쿨이 칭칭 감고 있었다. 그마저도 사실 넝쿨이라기보다 질긴 뿌리 같은 것이었다. 릴리는 그 기묘한 광경에 곧 영혼을 빼앗겼다.
“…주목이네요.”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을 산다는 나무. 거대한 둘레로도 그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나무는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죽은 이후에도 말이다.
아마네스 여신이 제 아이를 땅에 내려보낸 바로 직후일까. 아니면 불지옥과 같던 땅 위에서도 말라 바스러지지 않고 질기게 목숨을 이어 천 년을 넘어 또 다른 천 년이 지나길 기다려 온 것일까.
릴리가 주목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카르낙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릴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주목의 껍질을 매만졌다. 바스러질까 조심하던 손끝이 어느새 거친 나무의 촉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주목은 처음이에요. 앙상하게 껍질만 남은 주목은 그라타에서도 몇 번이나 봤지만… 이렇게, 이렇게 거대하고 큰 주목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넝쿨에 감긴 것도요.”
정말 신기했다. 썩어 진작 흙으로 돌아갔어야 하는 주목일지도 모른다. 제명을 다해 쓰러져야만 했던 것을 넝쿨이 휘감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토록 억세고 강하게 땅을 딛고 서 있을까. 그 자태가 지금부터 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 듯 강건했다.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요? 이곳에 성이 지어지기 훨씬 전이었겠죠? 이 땅에 캘던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훨씬 더 전이었겠죠?”
릴리는 저 혼자 끝없이 질문을 쏟아 내며 나무를 빙빙 돌았다. 눈동자가 어두운 밤하늘 위의 별처럼 빛났다.
“믿을 수 없어요. 이래서 누구도 이 숲을 건들지 않았군요. 방치한 것이 아니라 차마 손댈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건 마치 캘던성의 수호자 같은 걸까요? 캘던성이 지어지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테니 분명 캘던성은 이 나무를 품기 위해 축조되었을 거예요.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까 가능한 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 남겨 두었겠죠. 그러곤 잊혀진 거예요. 마치 비밀처럼요. 어떻게 이 나무를 발견하신 거죠?”
지금껏 들어 본 그 어떤 음성보다 높고 생기발랄했으며 지금껏 들어 본 그 어떤 질문보다 길었다. 자신의 처지도 신분도 잊은 모습이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생경하나 거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는 이도 즐거워지게 만들었다.
“방치된 시체를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했거든. 그러기엔 낭떠러지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지.”
그렇게 말하며 카르낙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성을 감싸고 있는 깊고 거대한 협곡처럼 보였다. 이 절벽의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을 거라 카르낙은 짐작했다.
그것이 어느 순간 말라붙더니 결국 풀과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육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듯하게 깎인 절벽은 누구도 감히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까마득했다.
그 아래로 멀리 도시 캘던의 모습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옹기종기 모인 작은 흙집들과 짙푸른 강. 도시를 감싼 성벽 뒤로 푸르른 언덕과 숲까지. 캘던성은 과연 위압적인 동시에 신이 만들어 준 가장 완벽한 요새임에 틀림이 없었다.
릴리는 카르낙을 따라 주목의 뒤편 절벽으로 향했다. 발밑이 까마득했다. 그 아래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황무지. 을씨년스럽게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체들과 함께 숲을 불태웠어. 그래야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숨을 구석이 없거든.”
절벽 아래로 펼쳐진 커다란 강줄기만 한 두께의 황무지는 마치 빈 양피지처럼 깨끗했다. 단 한 방울의 잉크라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말끔했다. 카르낙이 살았던 투로의 사막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여기엔 성벽이 없군요.”
“오랫동안 방치해 둔 탓이겠지. 설령 보수를 하고자 하더라도 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었을 테고.”
“폐하께선 성벽을 재건할 생각이세요?”
“때가 때이니만큼 가능한 한 빨리 보수해야겠지.”
언제 반란군이 캘던성을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때가 아닌가. 싹이 자라기 전에 제거하고자 언제나 발 빠르게 출정하고는 했지만 그들은 죽여도 죽여도 끈질기게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세를 넓히고는 했다.
에이가의 말대로 끝도 없는 싸움이다. 테이먼 테르조에게는 고결한 명분이 있다. 투로에게 빼앗긴 신성한 왕좌를 다시 되찾겠다는 명분.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테지.
에이가의 말대로 알기어스 왕의 핏줄인 파니릴리와 결혼한다고 하여 그들의 기세가 꺾일까. 카르낙은 아마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카르낙 발투만을 죽이고 제 가엾은 사촌을 구하겠노라며 명분 위에 명분 하나를 더 쌓을 것이다.
어쩌면 릴리에게도 차라리 테이먼 테르조가 왕이 되는 것이 이로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라면 왕좌의 정당성을 이유로 그녀를 억압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작에 그라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을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녀를 찾아 엘버그에 데려올 일도 없었겠지.
“이곳을 왕비의 정원으로 만들까 하는데.”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릴리는 헛것을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예?”
“워낙 을씨년스러운 곳이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이곳에 알기어스 왕의 시체를 버려서인지 아니면 둘 다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곳이니 네가 가꾸면 어떨까 해. 네 맘대로.”
“그러니까 이 숲을 제가 돌보란 말씀이신가요?”
“아니 이곳이 너의 소유란 이야기야. 파니릴리의 정원이지.”
“…….”
소유? 이곳을 내가 갖는다고?
“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죠?”
파니릴리는 땅을 갖는다는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지를 어떻게 갖는단 말인가. 대지의 위에 자라고 번식하는 것을 잠시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풀을, 나무를, 하늘을, 그곳에 나는 꽃과 나비와 벌들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 쌓이는 비와 눈, 작은 도랑이나 샘물을 어떻게 온전히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엇 하나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어찌 그것을 소유한다 말할 수 있는가. 그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저의 몸과 정신과 마음뿐, 무엇이든 손에 쥐었다고 하여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한때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가 버릴 뿐이었다.
“왜 못 해? 봐.”
그는 주목을 가리켰다.
“네가 저것을 원치 않는다면 장정들을 불러 저것을 쓰러뜨리면 돼. 그 자리에 꽃을 심어도 되고 네가 원하는 종류의 묘목을 얻어 다시 심을 수도 있지. 네가 이 정원이 사막이 되길 원한다면 불을 붙여 모조리 태우면 돼. 원하지 않는 것은 다 잘라 내거나 뽑은 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 정원은 온전히 너의 것이 되지. 네가 허락한 것들만 자라게 하는 거야.”
원하는 것만, 허락한 것들만 자라게 한다. 릴리는 카르낙의 말을 곱씹었다.
“통치가 별건가. 뭐든 맘대로 하는 게 통치 아니겠어? 난 엘버그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생각이야. 지배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멍청한 자들이니 지배해 주는 수밖에.”
“폐하가 원하는 엘버그는 어떤 모습인가요?”
릴리는 물었다. 카르낙은 멀리 강과 달빛이 맞닿은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누구도 나를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세상.”
“…….”
“더는 나의 형제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는 세상.”
“…….”
“눈에는 눈으로, 피에는 피로, 목숨에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