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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9화 (29/231)

29화

세상에, 파니릴리 아가씨. 어쩜 이토록 독하십니까. 정말 끝까지 말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집요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 정말로 독종이다. 어마어마한 독종이 나타난 것이다. 카르낙 발투만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파니릴리 알기어스에 비하면 카르낙 발투만의 고집과 집요함은 벼룩의 때만도 못한 것이다. 그는 차라리 비아냥거리며 화를 돋우기라도 한다.

어떻게든 에이가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만들며 그것으로 이죽거리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가지만 적어도 그는 저의 기분을 살펴 달래 줄 줄은 안다. 그런데 제 여주인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다.

어르고 달래기는커녕 제가 바닥을 구르며 억지를 써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할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설마 매사에 이렇듯 카르낙 발투만을 대신해 파니릴리 아가씨를 상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편히 주무세요. 아가씨.”

에이가는 인사만 남기고 재빨리 파니릴리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사실 도망쳤다는 것이 맞다. 멍청하게 있다가 잡히면 파니릴리의 손에 말라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새로운 기분으로 파니릴리를 대하는 것이 나았다.

밤사이 릴리 아가씨의 생각이 바뀔지 누가 아는가. 또 저도 분명 지금보다는 더 이성적이리라. 그러니 파니릴리도 푹 쉬는 것이 좋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분명 이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리라. 좀 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리라. 에이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이가 님이 아가씨께 소리 지르는 것은 처음 보았어요.”

세일린이 근심 섞인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폐하의 역성을 들어 준다 생각하실 테죠.”

“그것보다는 아가씨의 이해를 구하지 못해 속상하신 듯 보였어요.”

“비가 내려야 이 모든 사달이 끝날 텐데….”

세일린은 마른 수건으로 릴리의 발을 깨끗하게 닦아 내고 푹신한 양모로 속을 채운 가죽 슬리퍼를 가져와 신겼다. 그러고는 그녀가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도운 후 단정히 묶었던 리본과 머리 장식을 풀어 주었다.

하루 종일 당겼을 두피를 부드러운 브러시로 두드리듯 빗어 주고 나니 릴리는 이만 물러가도 좋다며 세일린의 취침을 허락했다.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불러 달라며 물러가자 릴리는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사방이 고요하여 온전히 비워진 그녀만의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릴리는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얼마든지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큰 행복이고 축복인 줄도 모른 채 오롯이 그 시간을 누렸다.

방 안에 앉아 아까 다 완성하지 못했던 샌들을 마저 그리고 잠시 아롱거리는 촛불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다가 양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세일린이 방으로 돌아가고도 한참 후의 일로 그녀가 이미 곤히 잠에 빠져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몇 개의 좁은 복도와 계단을 돌아 성의 뒤편으로 향했다. 오늘은 부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간절히 물 내음이 나기를 바랐다. 그녀는 슈미즈 위에 덧입은 실크 가운을 꼭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쯤 다다랐을까. 환한 빛이 보였다. 분명 평소라면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할 곳이 대낮처럼 환했다. 근위병들이었다. 근위병 몇 명이 무장을 한 채 횃불을 들고 도열해 있는 것이다.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저렇게 불을 밝히고 모여 있는 것일까. 혹여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릴리는 이쯤에서 몸을 사려 방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입술을 씹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방을 살피는데 근위병들 사이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카르낙.

그가 보이자 릴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 않겠다더니. 설마 근위병들을 끌고 나타날 줄이야. 릴리는 슈미즈 자락을 갈무리하고 걸음을 떼었다.

얼마 정도 지나자 카르낙이 먼저 릴리의 기척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옷을 덧대 두꺼워진 사내들의 어깨 사이로 작고 가녀린 실루엣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폐하.”

릴리가 그를 발견하고 공손히 인사했다. 카르낙 역시 얇은 슈미즈에 가운 차림이었다. 길게 풀어 헤친 검은 머리는 그의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에이가가 원하는 그녀의 머리 길이가 딱 저 정도였으리라. 1년 만에 기르기엔 아무래도 불가능에 가까운 길이지만 매일 밤 저의 머리를 빗으며 분명 에이가가 꿈꾸던 길이는 저만큼이었으리라.

릴리는 문득 에이가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카르낙의 긴 머리를 빗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지 않도록 머리끝부터 살살 빗어 내리다가 조금씩 조금씩 범위를 넓혀 올라가는 거다. 그렇게 헝클어진 곳을 섬세하게 풀어낸 뒤 정수리에서부터 아래까지 쭉쭉 빗어 내리면 얼마나 매끄러울까.

그러나 과연 누가 그의 머리를 함부로 매만질 수 있을까. 카르낙 발투만이 그토록 순순히 제 곁을 내어 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 보통의 남편과 보통의 아내라면 가능한 거리일지언정 왕인 카르낙과 곧 그의 비가 될 저는 가능하지가 않았다.

그가 일전에 말하길 왕과 왕비일 뿐 부부가 될 리는 없다고 했다. 릴리는 그가 쌓아 올린 그 견고한 벽을 부수어야만 했다. 진실로 그의 신뢰와 애정을 얻어야만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카르낙이 말을 걸었다.

“다행히 아직 에이가가 목을 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더군.”

그의 음성은 어둠 속에서 유독 낮고 부드러워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 태평한 어조에 달콤함이 숨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이거든요.”

“승기는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어?”

마침내 릴리는 저벅저벅 걸어 그의 앞에 당도하였다. 카르낙의 보라색 눈동자 안에서 횃불이 일렁거렸다. 그 안에 비친 제 모습도 그처럼 일렁거렸다. 그 덕에 릴리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째서 이토록 근사한 사내가 벌레만도 못한 ‘투로’로 불리게 되었을까. 신이 사랑하여 정성껏 빚은 것이 틀림없는 피조물인데도.

“말해 봐, 릴리. 판세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지?”

그가 독촉했다.

“상대방이 작전상 후퇴하였을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하나요?”

흐음, 하고 그가 제 턱을 매만졌다. 궁리하는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그런 경우엔 흔히 뒤통수를 조심해야겠지. 무슨 꿍꿍이를 감추고 나타날지 모르니.”

“사방에서 기름 냄새가 나요.”

그 말에 카르낙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여섯 명의 근위병들이 횃불을 든 채 정확한 간격을 지켜 도열해 있었다.

“에이가가 말하길 어두운 밤에 남녀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라더군. 그래서….”

카르낙이 손으로 주위를 한번 휙 훑었다.

“보시다시피 샤프롱들을 데려왔지.”

“대단히….”

파니릴리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갑옷을 껴입은 근위대를 훑어보며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대단히 사려가 깊으시군요.”

카르낙이 픽 웃었다. 달리 현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르낙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유난 떨지 말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제 겉치레는 이만하면 됐고.”

카르낙은 릴리의 손에서 부드럽게 초를 빼앗아 갔다.

“따라와. 보여 줄 게 있어.”

그가 먼저 앞장서자 별수 없이 파니릴리도 그를 따르며 뒤를 힐끗거렸다. 횃불을 밝혀 든 근위병들은 말뚝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카르낙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라타에 있을 때도 절대 느린 걸음이 아니었건만,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더 빠르게 산길을 내달렸건만 릴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폐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릴리는 숨을 헐떡이며 카르낙을 불렀다. 그가 뒤를 돌아 무릎을 짚고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는 릴리를 보았다.

“너무 빠른가?”

그동안 탑 안에만 갇혀 있어 제 체력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카르낙이 특출나게 걸음이 빠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다간 조만간 초 하나 없이 어두운 숲속에 방치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카르낙이 다가와 제 팔을 내밀었다.

“자.”

“…….”

“잡아.”

실크 가운 아래 단단한 그의 팔뚝과 손등이 자리한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릴리는 잠시 주저하였다. 카르낙의 행동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감사해하며 잡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파니릴리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카르낙의 눈가가 움찔하더니 찰나의 순간 당황하여 바짝 얼었다. 뭐야 이 여자.

그러라고 내민 손이 아니다. 팔뚝이나 손등 위에 손을 얹으라고 내민 것이다. 여느 귀부인들이 그러하듯이, 엘버그의 여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렇게 덥석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뭐 이렇게 대책 없는 여인이 다 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잡은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잡으라고 내민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너무나 엘버그다운 외형이라 그녀가 외지에서 자랐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한 면이 저와 통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불현듯 당황하고 만다. 그래, 당황이다. 겪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겪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바로 그 감정 말이다.

“폐하.”

파니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이상한 태도를 알아차린 것일까. 카르낙은 자신이 당황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스스로에게도 절대 나는 당황한 게 아니라며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지경인데 하물며 다른 이에게 들킨다니.

그런 상황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카르낙은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걸음을 뗐다. 마치 처음부터 손을 붙잡으라고 내밀었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맞잡은 손의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너무 작고 보드라워서 지금껏 그의 손에 움켜쥔 것들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여인의 손을 어떻게 투박한 쇳덩이나 아니면 기름기가 그득한 고깃덩어리들과 비교하겠는가. 그것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촉이었다.

꽉 잡으면 바스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웠으며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말랑거렸다. 부디 그녀와 손을 잡은 모양새가 어색하지나 않아야 할 텐데,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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