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농담이 아니에요. 릴리 아가씨. 엘버그에서는 정숙한 여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가려요. 혼인을 한 여인들은 심지어 머리카락마저도 감춘다고요.”
“에이가.”
“그것이 이곳의 예의예요. 하물며 그런 성스러운 자리에서 어떻게 맨살을 다 드러내 놓고 성혼을 치른단 말씀이세요? 그것은 명백한 신성 모독이에요.”
“예배당을 얼음으로 채우는 것보다는 실용적이에요.”
에이가는 입을 떡 벌린 채 릴리를 쳐다보았다. 흡사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냔 표정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편협한, 소수만을 위한 대처법이잖아요. 차라리 위험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방법을 택해야죠.”
“더위는 곧 가실 거예요.”
에이가는 결연히 말했다.
“엘버그의 가뭄이 올해가 처음인 줄 아세요? 이보다 더한 가뭄도 많았어요. 비록 기근에 시달리더라도 문화와 정신과 규범은 늘 지켜졌다고요. 아가씨, 이건.”
에이가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지 고개를 털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안 그래도 모두가 카르낙 폐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엘버그의 규범을 깡그리 뒤바꾸면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낄 거라고요. 정통성은 더 위협받을 겁니다. 아가씨가 대체 무엇 때문에 카르낙 폐하와 정략결혼을 하러 오셨는데요. 폐하의 위태로운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그 사람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아가씨.”
“알고 있잖아요. 그가 엘버그를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요. 사람들이 반발해 주기를 바랐다가 그것을 이유로 모두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도요. 그는 모두가 고통받길 원한다고 알려 준 건 바로 당신이죠. 그는 엘버그의 왕이 아니에요. 에이가, 그는 투로의 왕이에요.”
에이가의 얼굴이 서글퍼졌다. 그녀가 무엇을 희망하는지는 잘 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때였다. 가령 그것이 어떤 상처를 준다 하여도 말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하셨죠?”
릴리의 물음에 에이가는 로레인을 떠올렸다. 한없이 선하고 아름답던 그녀는 죽으면서도 희망을 가졌다. 아아,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녀의 바람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네. 맞아요.”
“카르낙 발투만이 엘버그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않는 한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아요. 차라리 우리 모두가 카르낙의 투로가 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죠. 로레인이 원한 것도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잖아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요.”
“아니에요, 아가씨.”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말에 에이가의 안면이 하얗게 질렸다.
“로레인 마님이 미워한 것은 알기어스 왕 집권하에 이루어진 잔인무도한 학살과 탄압이었어요. 그의 광기와 그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이었어요. 로레인 마님은 라미레스의 핏줄인데 어떻게 엘버그를 증오할 수 있겠어요. 로레인 마님이 원한 것은 아마네스 님이 태초에 엘버그를 만들 때 원하셨던 세상이 되는 것이었어요.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부유한, 완벽한 엘버그요.”
을 맺음과 동시에 에이가는 릴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그녀를 올려보았다.
“아가씨. 저는 마님을 잃고 목숨을 끊고 싶을 때마다 아가씨를 생각했습니다. 로레인 마님이 차마 품에도 안아 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아가씨를요. 저는 로레인 마님의 주검 앞에서 맹세를 했어요. 마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요. 내게 그럴 힘이 있다면 반드시, 반드시 마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에이가.”
릴리는 부드럽게 에이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그녀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내내 제게 친절하고 헌신적이셨죠.”
“맹세컨대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릴리는 고된 세월이 깊게 주름진 에이가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에이가.”
이미 오래전의 일. 이제 와 새삼 충격받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에이가는 마치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 듯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이제 당신은 카르낙 발투만의 신하이지요.”
그러니, 하고 릴리는 한 번 더 에이가의 어깨를 쓸었다. 굳건하고 정직하여 거침없는 눈길이 흐릿한 눈동자와 맞닿자 어쩐지 아찔해져 에이가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가씨?”
알면서도 의심스러워 되묻는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파니릴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설마 모를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고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맹세를 했다. 로레인의 못다 한 꿈을 이루어 주겠다. 단 하나 남은 그녀의 딸을 보살피겠다. 수도 없이 맹세했다.
“신하는 무릇 두 군주를 섬길 수 없다. 당신이 내게 준 엘버그의 군신론의 첫 문구잖아요.”
“그것은….”
에이가가 뒷말을 흐렸다. 릴리가 엘버그로 온 후 에이가는 가장 먼저 <군신론>을 읽기를 권유했다. 왕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론서이기에 당연히 파니릴리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설마 열심히 공부하라 건네준 책이 부메랑이 되어 저에게 날아올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얼이 빠질수록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틀린 말이 없으니 반박할 수 없었고 무슨 이야기를 한들 결국엔 변명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얼굴을 붉히며 입만 벙긋거리게 만들었다.
“당신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지 선택해야만 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너무나도 당연히 아가씨를 따릅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칙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
다시 또 말문이 막혔다. 아니야. 이건 달라.
“폐하는 백전 무패의 뛰어난 무장이시지만 통치에 대해서는 무지하세요. 그분이 원한다고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는 것은 위험하고 순진한 생각이세요.”
“폐하의 의견이 아니에요. 칙령은 엄연히 내 의견이었어요.”
아아, 하고 에이가는 신음했다. 이제 정말 정신이 혼미해진다. 두 사람이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밀해지길 바란 것은 저이건만, 되레 그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제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마 로레인의 딸이 저와 대립할 줄은 몰랐다. 주인으로 섬기겠노라 맹세를 해 놓고도 제 주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저 로레인의 딸이니 그녀와 닮았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만 있었다.
“수도 없이 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잖아요.”
아니, 닮았던가. 젊을 때의 로레인도 세상에는 이토록 궁금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했다. 그래도 저와 대립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숙하고 얌전한 여인이었다. 그 속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불길을 지녔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름대로의 방책을….”
“북쪽에서 얼음을 사 오는 것 말이지요? 캘던성에 도착할 때까지 과연 성할지 다 녹아 없어졌을지 모를 것을요?”
“…….”
다시 또 에이가가 할 말을 잃었다. 혼미하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눈만 연신 바쁘게 깜빡거렸다.
“오랫동안… 얼음이 얼지… 얼지 않도록 유지하는… 비책이… 비책이란 것이 있….”
“비가 와 기온이 떨어지면 다들 자연스레 옷을 껴입겠죠. 굳이 누군가 칙령을 거두지 않아도요. 하지만 상인에게 지불한 돈은 어떤가요? 갈취가 아니고서는 다시 돌려받을 방법이 없잖아요. 얼음이 녹아 없어지든, 쓸모가 없어지든 관계없이요.”
깜빡, 깜빡.
“폐하의 생각은 합리적이세요.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아무리 정숙함이 중요하다지만 그것도 살아 있어야 지키는 것 아닌가요? 죽은 사람이 정숙해 봤자 관에 눕기밖에 더하겠어요?”
거침없는 언사에 에이가가 히익 소리를 내며 기함하였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고요.”
에이가는 벌떡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폐하께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분은 천둥벌거숭이 망나니예요! 세 치 혀에 놀아나 목이 달아난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요! 그분이 아가씨를 마음대로 휘두르게 두시면 안 돼요!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폐하를 상냥하고 온화하게 대하되 반드시 엄격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먹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든 가지고 노세요. 폐하가 그나마 저를 어려워하는 건 제가 그분에게 엄격하기 때문이에요. 가장 많이 화를 내고 쓴소리를 하기 때문이라고요,”
“폐하는 당신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에이가. 그분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귀하게 대하시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그러시든 저를 어려워하시는 건 같아요!”
“아니요. 같지 않아요. 그분은 당신을 호의로 대하고 있어요. 두려움과 호의는 전혀 다른 감정이잖아요. 폐하는 당신을 아끼기 때문에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거예요. 당신이 무섭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아니라요.”
또박또박 말하는 한 구절, 한 마디, 한 글자에 침착함이 어려 있다. 누가 보아도 감정적으로 구는 이는 아마도 에이가 자신이리라. 그 생각이 들자 더는 언쟁을 할 용기가 없었다. 릴리의 주장은 너무도 확고하여 무슨 말을 해도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토록 카르낙 발투만에게 홀리셨나. 정숙하든 천박하든 상관없이 성안의 모든 여인과 계집들이 머릿속으로 카르낙을 탐한다더니 그것이 결국 릴리 아가씨에게도 통했나. 그 번들번들한 구릿빛 피부와 근육 앞에서는 제아무리 현명한 여인일지라도 이렇듯 속절없이 무너지는 건가.
“아가씨는 폐하를 전혀 모르십니다.”
“때론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도 있지요.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들 말이에요.”
이젠 돌려 까기까지! 에이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이느라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러는 사이 콧구멍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결혼 준비로 종일 피곤하셨을 테지요. 제가 아가씨의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네요.”
“에이가.”
“내일도 고되실 테니 더는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는 좀 더 몸과 마음이 명료하였을 때 다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나 피곤해 쓸모없이 감정적인 소모만 하는 거 같군요.”
“내 입장은 언제가 되어도 같을 거예요.”
“…….”
“그럼 이 문제는 더 입에 담지 않는 거로 알고 있어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