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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7화 (27/231)

27화

릴리는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 뜻은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부디 이 안에서 행복하길 바라. 파니릴리, 진심으로. 당신이 그럴 수 있다면 분명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 말은 그라타로 돌아가는 것을 단념하란 뜻이었다. 엘버그를 벗어나는 자유를 포기하면 이 성벽 안에서의 자유는 허락하겠다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제가 폐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지만 그 말을 뱉은 파니릴리도, 카르낙도 그 안에 진정한 의미의 복종과 수긍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카르낙은 그녀를 경계한다. 잔잔한 미소와 평온한 음성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카르낙은 언제나 그녀에게서 엘버그가 아닌 그라타를 본다. 그 빽빽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숲과 계곡을 본다.

풍부하지만 결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 저 작은 몸 안에 기꺼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렵고 난해하고 때론 그래서 기괴하게 느껴졌다.

또한 파니릴리는 그리하여 카르낙이 말하는 ‘친구’의 안에 진실된 우정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지금껏 거세되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다른 숱한 감정들처럼. 파니릴리는 그가 진정한 평화를 찾고 그 모든 감정을 다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터였다.

조급하거나 초조하지도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부르테에게 파니릴리는 그러한 것들을 배웠다. 버려야 할 감정과 취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카르낙이 정확히 저와 반대라는 것 역시 안다. 그는 절벽 위에 서서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제 발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전율과 광기가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임을 안다. 결코 평화롭지도 안락하지도 않은 세계.

”오늘 밤에 나오실 건가요?“

릴리가 물었다. 지난밤 함께 밤 산책을 하자던 그녀의 제안이 떠올랐다가 곧이어 저를 잡아먹을 듯 굴던 에이가의 귀신 같은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도 엘버그의 도덕에 관하여 무지하지만 에이가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파니릴리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녀가 훨씬 더 무지하다고 봐야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어떤 여자도 감히 카르낙에게 먼저 함께 무엇을 하자고 제안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생전 가져 본 적이 없던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뭔가가 통하는 것 같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카르낙은 대답하는 대신 조금 더 물러났다.

”그러시군요.“

릴리는 기민하게 그의 의사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맞다. 거절의 뜻이다. 그럼에도 카르낙은 싫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황당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쉽게 뾰족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또한 거부하였음에도 평온해 보이는 릴리의 얼굴 역시 그를 당황하게 했다. 그녀에게서 로레인 하게너가 보였다. 자식과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침착했다. 원수인 카르낙을 속으로는 증오했을지언정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고요하여 더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여자였다.

‘난….’ 하고 입을 떼려다 말고 카르낙은 몸을 돌렸다. 하려는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다만 속내가 복잡하고 시끄러워 그는 애꿎은 제 머리카락만 쓸어 올렸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혼란함이었다.

카르낙이 릴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세일린이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앞에 구두를 내밀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조급하게 달아나는 카르낙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세일린의 근심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릴리는 안심하라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조금만 더 걸어요. 우리.“

그러고는 몸을 돌려 걸었다. 세일린이 그녀의 구두를 다시 품에 안아 들고 릴리의 뒤를 따랐다. 세일린은 자꾸만 멀어지는 카르낙이 신경 쓰여 뒤를 몇 번이나 힐끗대었지만 정작 뒤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은 릴리는 한 번도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오히려 유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겼다. 찰나의 순간 세일린은 카르낙과 릴리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있는 환각을 보았다. 단단히 묶이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위태로운 것. 곧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세일린은 그것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비록 무엇이라 정의 내려야 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

예상대로였다. 카르낙의 칙령에 에이가는 기함했다. 진지하지 못하다, 장난이 심하다, 격식이 없다, 예의에 어긋난다를 비롯해 종국에는 천박하다, 불경하다, 그 이후에는 드디어 목을 매겠다고 했다. 그래서 카르낙은 준비한 대로 와인을 들이켜며 읊었다.

”당신이 목을 매겠다면 파니릴리는 머리를 밀겠다고 하더군.“

히익, 하고 에이가는 숨을 들이켰다. 내내 붉었던 노인의 얼굴이 이번에는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치맛자락을 붙잡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기어이 확인을 하러 간 것이다.

”정말이야?“

에이가가 씩씩거리며 방을 나서자 핀이 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뜻 반, 에이가가 저러다 졸도할까 걱정되어 묻는 것이 또 반이었다.

”정말이야.“

그는 윤기 나는 마호가니 책상 위에 한량처럼 두 발을 올리며 대답했다. 정오 나절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났다. 핀은 창턱에 엉덩이를 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상관없지. 어차피 내 복장은 판금 갑옷일 테니.“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로로가 걱정스레 덧붙였다.

“에이가가 납득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폐하의 성혼식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데요.”

“그녀가 공을 많이 들이는 건 내 결혼식이 아니야, 릴리의 결혼식이지.”

그러며 카르낙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손에 든 와인 잔을 빙빙 돌리는 손길이 퍽 신중했다.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어. 나처럼 말이야.”

오랫동안 제 손으로 키워 온 사내를 살펴보는 로로의 눈동자가 기민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러자 카르낙이 설핏 웃었다. 미약하지만 분명했다.

“릴리가 그녀를 설득할 거야.”

“어떻게?”

미심쩍어 하며 핀이 물었다.

“말솜씨가 좋거든. 생각보다 쓸모 있는 여자인 것 같아.”

카르낙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은밀한 즐거움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래. 확실히 그에게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있었다. 지금껏 보아 오지 못한 모습에 로로는 그것을 눈치챘다.

“그동안 잊고 있었어. 전장에서 적장의 머리를 치는 것에만 골몰했지. 정작 알기어스를 죽이고 이 자리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는 내가 이제 엘버그의 왕이란 것을 말이야.”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쿡쿡 찍으며 웃었다.

“생각해 봐. 내가 이 망할 엘버그의 왕이잖아. 씨발, 내가 지껄이는 게 바로 이 나라의 법이라고. 그런데 뭐하러 엘버그의 도덕과 전통과 규범을 지켜야 하지? 알기어스는 이미 다 뒈졌는데 말이야.”

그러더니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이죽거렸다. 생기가 넘치는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라고 하면 그냥 닥치고 하는 거야. 내가 발가벗고 춤을 추라고 하면 누구라도 질펀한 궁둥이를 흔들면서 빌어먹을 춤을 춰야 한다고.”

핀이 키득거리며 동의한다는 듯 잔을 들었다. 드디어 카르낙이 내정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만수무강하소서. 엘버그의 위대하신 왕, 카르낙 발투만이여.”

사내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더 붉게 타오르는 촛불 같은 웃음이었다.

한편 오후 내내 궁정 화가에게 붙잡혀 있느라 완전히 진이 빠진 릴리가 쓰러질 듯 의자에 주저앉자 세일린은 따듯하게 적신 천으로 릴리의 발을 감싸 정성껏 주물렀다. 통풍도 잘되지 않는 구두를 종일 신고 있으니 발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잠시라도 그렇게 앉아 눈을 붙일 법도 한데 릴리는 양피지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는 위태롭게 산등성이에 걸려 이제 막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실루엣은 강렬하나 무엇이든 어스름해져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애매한 때. 저러다 눈이 나빠질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초를 좀 더 켜 드릴까요?”

세일린이 묻자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세일린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열심히 릴리의 발을 주물렀다. 그러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뭘 하시는 건지 여쭤보아도 돼요?”

릴리는 마치 궁금증이 많은 제자를 둔 자애로운 스승처럼 낮게 웃었다.

“샌들을 그려 보고 있는 중이에요. 카스티 제도에서 수입해 오기 전에 혹시 한 켤레라도 만들 수 있을까 해서요.”

그녀는 세일린이 잘 볼 수 있도록 양피지를 들고 설명했다.

“이렇게 가죽을 여러 겹 덧댄 후 밑창을 만들고, 가늘고 튼튼한 끈으로 연결해서 묶는 거예요. 바닥에 징을 박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너무 비쌀 테니 질긴 가죽을 여러 겹 덧대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게 안 되면 튼튼한 나뭇잎이나 줄기도 좋겠죠.”

“네. 그렇군요.”

세일린은 그녀가 그린 그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이게 샌들이라는 건가요?”

“네.”

“…하지만 이걸 왜 가져오는데요?”

“그건….”

“폐하와의 성혼식을 망치려고요.”

릴리가 대답하기 전에 분기탱천한 노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어 에이가를 발견한 세일린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에이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이것이 정말 아가씨의 생각이라는 폐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온 줄 몰랐네요, 에이가.”

릴리가 들고 있던 양피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그게 더 에이가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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