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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6화 (26/231)

26화

세일린은 릴리의 시선을 따라 울창한 침엽수림의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았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수많은 빛들이 다채롭게 움직였다.

“아름답네요. 꼭 보석 같아요.”

세일린이 황홀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맞아요.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죠. 이 빛을 갖고 싶어 모두 보석을 탐내는지도 몰라요. 세상에 반짝이는 빛을 그렇게라도 갖고 싶어서요.”

세일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저 반짝임이 갖고 싶어서 우리는 그토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건을 탐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보석도 세상의 반짝임을 흉내 내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이 가지고 있어도 더욱 갖고 싶어지나 보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아가씨는 정말 똑똑하세요.”

“그렇지 않아요.”

세일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아가씨는 정말로 똑똑하세요.”

단지 지식이 많고 아는 것이 많고….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꼭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전혀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꼭 저 반짝이는 햇살 같은 것이다. 그녀는 결코 살 수 없는, 그리고 흉내 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끔 그래서 가슴이 벅차다. 릴리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새롭고 신기하고 또 소중했다.

이 시간 역시 결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세일린은 릴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싫었다. 오직 릴리에게만 해당되었다. 터무니없게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 목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영광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다. 세일린이 기꺼이 저의 주인에게 끝없는 찬사를 덧붙이려는데 릴리의 시선이 별안간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누가 나를 찾아왔네요.”

세일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얇은 리넨 튜닉에, 브레, 정강이까지 감싼 양말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칭칭 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복장만을 갖춘 카르낙이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여며지지 않은 튜닉 안으로 단단한 가슴팍이 선명하게 보였다.

세일린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릴리의 치맛단을 끌어 내려 그녀의 맨발을 감춰 주고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릴리의 스타킹과 구두를 제 가슴팍에 꽉 끌어안은 채 허리를 숙였다. 어느덧 카르낙이 둘의 앞까지 당도하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카르낙이 대뜸 말을 건넸다. 그다음에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눈치가 빠른 세일린은 뒷걸음질을 해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 제 주인을 살펴볼 수는 있되 그들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카르낙은 세일린이 물러나고도 한참 동안 입을 떼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는 릴리의 옆에 저도 같이 앉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멀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릴리가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끙 소리가 날 만큼 몸에 딱 맞는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릴리의 머리통은 카르낙의 허벅지쯤에서 그의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문하세요, 폐하.”

카르낙은 나무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댔다.

“비가 언제 올 것 같아?”

비? 릴리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궁리하는 사이에 카르낙이 한 번 더 물었다.

“아직도 비 냄새는 안 나?”

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낙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난 에이가가 내는 대부분의 의견을 받아들인단 말이야. 왜냐하면 에이가는 대단히 현명한 노인네거든. 그런데 결혼식 문제에 관해서는 약간 이성을 잃는 것 같아.”

“예….”

결혼식에 무엇이 문제인 걸까.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낙의 대답을 기다렸다.

“북쪽에서 얼음을 사 오자더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고가 텅 비었다며 바가지 긁는 여편네처럼 나를 쥐어뜯었으면서. 고작 결혼식에 올 고관대작들 비위나 맞추자고 모웨나에서 가져온 전리품을 다 탕진할 순 없어. 차라리 돈을 공중에 뿌리고 말지.”

“…….”

“에이가는 엘버그의 문화와 질서에 자긍심이 강해. 나와 로로는 엘버그에 대해서는 좆도 모르지. 우린 사시사철이 절절 끓는 사막에서 지냈어. 가뭄이고 열사병이고 난 하나도 못 느끼겠단 말이지. 당초에 캘던이 어땠는지조차 몰라.”

“…….”

“당신은 카스티 제도에서 온 사람이잖아.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이 필요해. 에이가와 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줄 수 있는.”

이제야 확실히 이해했다. 에이가는 완벽한 국왕의 결혼을 원했고 카르낙은 형식적인 절차 이외에는 무엇에도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특히나 그와 관련된 돈 낭비에 관해서는.

“그것에 관해서는 확실히 제 의견을 말할 수 있겠네요. 폐하.”

그렇게 말하고 릴리는 제 치맛자락을 들어 보였다. 스타킹과 구두를 벗어 던진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자 카르낙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그라타에서는 가능한 한 옷을 간소하게 입었죠. 살을 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엘버그는 대대손손 옷을 껴입는 것을 좋아했다는 걸요.”

“마찬가지야. 나도 사막에선 최소한의 것만 걸치고 다녔어. 무엇보다 입을 게 없어서였지만 옷이 있었다 해도 그 더위에 껴입는 건 미친놈이나 하는 짓이지. 지금이야 보다시피 에이가의 등쌀에 못 이겨 가능한 한 갖춰 입고는 있지. 왕은 언제나 품위 있고 신비해야 한다나 뭐라나. 아무도 내가 차려입는다고 해서 품위가 생길 거라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맨발에 샌들, 속옷을 제외하고는 가벼운 튜닉 한 벌이요.”

릴리는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샌들이 뭐야?”

“폐하의 양말을 동여맨 그 끈처럼 발바닥에 가죽을 고정시키는 거예요. 그라타에서는 주로 그것을 신고 다녀요. 통풍에 제격이죠.”

흥미로웠다. 카르낙은 손으로 제 턱을 매만지며 궁리했다.

“좋아. 그럼 난 소매가 없는 튜닉에 그것만 신겠어. 우아하게 망토 정도는 둘러 주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신이 나는지 그의 눈이 유쾌함으로 번뜩였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칙령을 내릴 거야. 샌들에 튜닉만 입으라고 말이야.”

“망측하다고 여기겠네요.”

“천박하다고 결혼식에 오기도 전에 졸도하겠지.”

“그래도 얼음은 살 필요가 없으니 손해는 아니에요.”

“게다가 천 값도 줄어들지. 낭비할 일이 없어.”

“에이가에게 부디 기쁜 소식이어야 할 텐데요.”

“에이가를 위해서라면 만약을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줄 수 있어. 졸도할 것을 대비해서 말이야.”

“폐하의 깊은 배려심을 부디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요.”

카르낙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거슬리거나 불편해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완연하였고 눈에는 유쾌함이 가득했다. 그는 릴리를 제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에이가가 목을 매려고 하거든 말려 줄 수 있겠어? 내 말은 도통 들어 먹질 않아서.”

“그럼 머리를 밀겠다고 하면 돼요.”

카르낙이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엘버그로 와 릴리의 민머리를 발견했을 때의 박장대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땐 어딘지 모르게 히스테릭하여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주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릴리는 이제야 비로소 제 약혼자의 진실된 웃음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카르낙이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곁을 내어 주는 그의 행동에 릴리는 잠시 놀랐다가 내색 없이 곧바로 그의 팔등에 손을 얹었다. 릴리는 한 손으로는 제 치맛단을 잡고 카르낙의 속도에 맞춰 폭신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기대가 되네. 사람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모욕감에 치를 떨겠지. 그럼에도 숨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웃는 얼굴로 경박한 왕을 숭배하고 그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토록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밤새도록 파티를 열어야지. 술잔을 부딪치며 계속해서 축하의 덕담을 건네도록 하리라.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날이 새도록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리라.

“가장 좋은 건 그 전에 비가 내리는 거예요. 한차례 비가 쏟아지고 나면 더위가 조금은 가시겠죠. 그러면 농작물이 마를까 초조해하지도 않을 테고 에이가도 얼음에 관한 생각은 접어 두겠죠. 아무도 고통받지 않는 결혼식이 될 거예요.”

“그리고 재미없는 결혼식이 되겠지.”

“그렇지만 평화롭겠죠.”

“지금이라도 다시 머리를 밀어 보는 건 어때? 난 별로 당신의 머리색 따위 상관없는데 말이야. 왕권의 안정 같은 건 바라지도 않고.”

“그건 곤란해요. 에이가가 목을 맨다고 할 때 설득할 구실이 없어지니까요.”

“아직도 그라타로 돌아가길 바라?”

카르낙이 불현듯 물었다. 그가 그런 것을 물을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 릴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대답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자 카르낙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릴리가 애써 미소 지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네. 언젠가는요.”

그러자 카르낙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릴리를 향해 몸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금 둘의 거리가 벌어졌다.

“난 당신이 싫지 않아.”

릴리는 대답할 말이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카르낙은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누구보다 엘버그에 부합하는 껍데기를 가졌지만 그 속은 어느 누구보다도 엘버그 사람답지 않거든. 심지어 나보다도.”

윤기가 흐르는 눈부신 은발. 새하얀 피부에 딱 어울리는 더없이 눈부시고 더없이 깨끗한 회색 눈동자.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래. 그래서 에이가는 릴리가 필요하다고 했겠지. 모두의 넋을 홀려 놓을 만한 아름다운 이 외형 때문에.

그러나 이 외형 때문에 카르낙은 그녀를 믿을 수 없다. 그녀의 핏줄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카르낙이 혐오하는 것들을 한데 축약해 놓은 것이 바로 눈앞의 여자가 아닌가.

”난 당신을 구속하지는 않을 거야.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도 좋아. 설령 궁정 안을 벌거벗고 뛰어다닌다고 해도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난 기꺼이 그 뜻에 따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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