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25화 (25/231)

25화

“귀하게 아끼시되 예의를 지켜 달라는 겁니다!!”

“내가 예의가 어딨어? 못 배워 먹은 투로 주제에.”

그렇지 않다. 비록 카르낙이 출신을 빌어 여느 왕족이나 귀족들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갖고 있진 않더라도 그에게는 자신만의 친절함과 배려가 있었다. 적어도 그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다.

앞에선 세상에 다시 없을 성자처럼 굴다가 돌아서면 매음굴로 뛰어드는 속물들과는 결부터가 다른 이였다. 비록 남녀 간의 사랑에는 무지할지언정 분명 그는 사랑을 안다. 그 마음으로 저의 형제들을. 동료들을, 로로를 그리고 저를 아끼고 있음을 에이가는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마음으로, 적어도 그러한 마음으로 릴리를 대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1년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지냈으니, 당신의 뜻을 기꺼이 받들며 인내하였으니, 어질고, 착하고, 담대하며 또 당신처럼 결이 고운 사람이니 부디 저를 아끼듯, 로로를 아끼듯, 당신의 형제를 아끼듯, 파니릴리를 아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카르낙이 질문했다.

“그나저나 얼음을 가져오자고?”

“아.”

그래. 참 그 이야기 중이었지. 에이가는 서둘러 머릿속의 상념을 지웠다.

“네. 시종들 몇몇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졸도했어요. 이러다 성혼식에 온 귀빈들까지 더위에 정신을 놓을까 걱정입니다. 예배당 곳곳에 얼음을 배치해 두면 적어도 그 걱정은 덜겠지요,”

“돈은 있고?”

“네. 넉넉하진 않지만요.”

“얼음 한 덩이가 300겔링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네.”

북쪽 성전은 사시사철 얼음이 녹지 않는 만년설 위에 지어졌다. 그리하여 엘버그는 성전의 근처에서 캘던성에 필요한 얼음을 공수해 온다.

하는 것이라고는 기도하기와 책 읽기뿐인 학자와 사제들이 득시글대는 북쪽 땅이 부유한 것은 그곳의 얼음을 대륙 곳곳에 비싼 값으로 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음의 값은 날이 갈수록 비싸졌다. 가물어 가는 날씨 때문이리라.

성벽의 벽돌만 한 얼음 한 덩이가 300겔링. 엘버그의 장정 1인이 1년에 내야 하는 세금이 100겔링이다. 300겔링이면 무려 장정 3인의 1년 치 세금이었다. 장정의 정강이 길이만 한 얼음 한 덩어리가 말이다.

“예배당을 얼음으로 채우려면 모웨나에서 가지고 온 전리품을 다 탕진해야 할 텐데?”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로로가 카르낙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곳엔 테이먼 테르조가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때에 에나가 과연 왕실에 얼음을 팔도록 승인을 해 줄지 모르겠군요.”

“마치 에나님이 이미 테이먼 테르조와 내통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에이가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엘버그에서 나고 자란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반감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모셨던 주인은 로레인 하게너. 에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가문이 아니던가.

“엘버그 국왕의 결혼입니다. 대관식만큼이나 중요한 왕실의 행사예요. 단지 돈 몇 푼 때문에 이 성혼식을 망칠 수는 없어요.”

“좋아.”

카르낙은 얼음을 하나 더 입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에이가와 더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라미레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건드려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항전의 표시를 했다.

“이 문제는 로로와 둘이 해결해보라고.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내가 먹을 것만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하고 카르낙은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잔 속에 남은 얼음은 두 노인네가 정답게 나눠 먹든 녹게 내버려 두든 알아서 할 것이다. 에나에게서 얼음을 사 오는 문제도 알아서 해결하듯이.

그러고는 복도를 저벅저벅 거닐었다. 그는 제 주변의 누구라도 들릴 큰 목소리로 물었다.

“파니릴리 어디 있어?”

“뒤뜰에 계십니다!”

누군가 카르낙의 벼락같은 고함에 잔뜩 겁을 먹은 채 대답했다. 카르낙은 곧바로 몸을 꺾어 중앙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왕이 진노한 것일까 겁이 난 시종 몇이 눈치를 보다 그의 뒤를 따랐다. 혹여나 카르낙의 심기를 거스를까 발소리조차 조심했다.

***

제법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들어왔으리라.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채워져 볕이 제법 땅에 닿지 않을 만큼 오자 릴리는 기다렸다는 듯 신발부터 벗어 던졌다.

세일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스타킹을 끌어 내리는 릴리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본성에서부터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부터 불안감이 시작되기는 했다. 한 번도 이렇게 멀리 나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성에서 멀어질수록 이곳은 동쪽 절벽과 가까워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알기어스 왕에 의해 죽은 그의 정적과 관료들의 시체가 탑처럼 쌓였던 곳.

늘 성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도맡아 하는 캘던성의 관료와 시종들이 어째서 뒤뜰은 이토록 방치하는지 릴리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과연 에이가 님이 알려 주셨을까. 하지만 파니릴리는 이곳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가. 괜스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수야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나 께름칙하여 세일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근심스레 물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요?”

“뭐가요?”

릴리는 나머지 한쪽 스타킹도 벗어서 커다란 나무뿌리 위에 올려 두었다. 발바닥이 그늘진 땅 위에 닿자 비로소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릴리는 크게 숨을 돌리고 방그레 웃었다. 세일린이 벗어 둔 그녀의 스타킹을 마저 집어 들며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아가씨, 혹 길을 잃을까 겁이 납니다.”

“걱정 마요. 세일린. 저기 저 뾰족한 첨탑을 보며 걸으면 되는걸요.”

릴리의 손가락이 문루 위에 드높게 나부끼는 검은 깃발을 가리켰다.

“날 믿어요. 길 찾는 건 누구보다 잘하니까요. 그것보다 세일린도 구두를 벗지 그래요? 여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 체면 차릴 것도 없잖아요.”

그러나 세일린에겐 허락되지 않은 일탈이었다. 침대 안에서조차 맨발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시녀들의 주택은 늘 좁고 어두워서 아무리 청결히 침구를 관리한다고 해도 언제나 곰팡이가 피었다. 상전들의 침구를 관리하기도 바쁜데, 저의 침구를 관리할 틈이 어디 있으랴. 때문에 세일린은 자신의 몸에 걸치는 것들 위주로 청결을 관리했다.

스타킹, 슈미즈처럼 피부에 직접 닿는 것들은 늘 깨끗하게 빨아 몸에 착용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시는 주인에게 불쾌감을 줄까, 그 때문에 쫓겨나 비렁뱅이가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세일린은 릴리의 스타킹을 탁탁 털어 흙을 제거하며 그녀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녀는 혹여 주인의 스타킹이나 구두가 더러워지면 어쩌나, 혹여 릴리가 갈증을 내거나 갑자기 현기증이 생기면 어쩌나 등등 온통 걱정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닥에 깔 모포와 음식을 조금 챙겨 올 것을 그랬습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어리석어서 깊게 생각하질 못했어요.”

그러자 릴리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그런 것이 필요했다면 내가 준비했을 거예요. 전 단지 맨발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구두와 스타킹을 벗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엘버그의 법도에 어긋난다니 하는 수 있나요? 남들 몰래 하는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릴리는 아침부터 갑갑한 드레스 때문에 불평을 했었다. 어떤 일에도 의연하던 그녀가 인상을 구기는 것은 처음 보았다. 더위에 지쳐 보여 세일린은 귀부인들이 쓰는 깃털이 달린 부채를 쥐여 주었지만 릴리는 그런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만일 파니릴리가 아직 앳된 공주님이었다면 세일린은 궁정의 분수대나 작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년을 넘긴 조숙한 처녀를, 그것도 곧 왕비가 될 귀한 주인을 성의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치맛자락을 적시며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간절히 그것을 원하여도 말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탈진하지 않도록 물을 건네거나 부채질을 해 주는 일뿐. 어서 빨리 비가 와 이 더위를 식혀 주기만을 바라야 했다.

혹은 이 숲의 작은 웅덩이들을 채울 만큼의 가랑비라도 내려 주었으면. 그러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주인의 치맛자락을 적시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아주 약간의 위험만 각오한다면 말이다. 세일린은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하며 가만히 릴리가 잔디를 매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잔디는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버스럭 소리를 내며 금세 바스라졌다. 아, 그러고 보니….

“풀잎이 노랗게 바래기 시작했네요.”

세일린의 말에 파니릴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겨울이 오기도 전에 모든 것들이 죽어 가겠죠. 당장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요.”

“며칠 전에 주방 보조 시녀 한 명이 쓰러졌어요.”

세일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릴리는 깜짝 놀랐다. 설마 했는데 벌써 염려하던 일이 생긴 건가 근심이 몰렸다.

“쓰러져요?”

“불을 피우다 열병으로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다행히 곧 정신을 차렸지만 열이 식지 않아 룸메이트가 종일 젖은 수건으로 몸을 문질러 줘야 했대요. 그 후로 주방의 모든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어서 총주방장님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에이가 님과 독대하셨다는데 이렇다 할 방책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에요.”

“모두 다 머리라도 밀었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세일린이 웃었다. 농담으로 들은 듯했지만 내심 진담이었다. 겪어 봐서 안다. 머리카락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얼마나 천지 차이인지. 머리를 묶는 것과 풀어 헤쳐놓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왜일까요?”

“무엇이 말씀이세요? 아가씨?”

“왜 고작 머리카락 따위가 중요한 걸까요?”

“여신 아마네스 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눈부시게 아름답잖아요. 아가씨를 보세요.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아름다움을 갖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난… 신은 모두를 사랑한다고 배웠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요. 사랑해서 하늘을 만들고, 대지를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꽃을 만들고 열매를 만들고…. 봐요. 세일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