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하지만 모두 애인을 만들잖아요. 그러니 저 같은 사생아들이 태어났을 테고요.”
릴리의 말에 카르낙이 조소했다.
“그러고는 아무 곳에나 가져다 버리겠지. 배설물을 버리듯이.”
그런가. 릴리는 카르낙의 조소에 이렇다 할 대꾸를 생각해 내지 못해 쓰게 웃었다. 엘버그는 사생아에게 친절한 땅이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를 올라와 함께 멀고 먼 땅에 버려 놓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겠지.
사생아로 태어나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이 저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나마 저에게는 올라가 있었고 부유한 모친이 보내 주는 돈이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없는 아이들은 모두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아니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홀로 죽어 가고 있을까.
“이곳은 썩었어. 온통 오물 천지야.”
앞서가는 카르낙의 목소리에 증오가 배어 나왔다. 제 아랫도리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짐승 같은 자들이 단지 검은 머리를 지녔단 이유로, 남보다 탁한 피부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저와 저의 형제들을 경멸하고 증오하고 학대하고 죽였다.
새하얀 피부에 화려한 옷을 걸쳐 입어도 그 안은 더럽고 썩은 오물인 주제에. 제힘으로 노력하여 얻은 껍데기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타고난 것뿐인데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의 모든 것인 양.
릴리는 분노에 침잠되어 있는 카르낙을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곳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카르낙은 다시 한번 조소했다.
“좋아할 이유가 없어. 사는 내내 이곳은 내게 지옥 같아.”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을 가지려 하세요?”
릴리는 진정으로 궁금했다. 그토록 모두가 싫다면 차라리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차라리 떠나서 잊어버리면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설령 비겁할지라도 불행의 안에서 고집을 부리며 천천히 시들어 가느니 하루라도 빨리 썩어 가는 뿌리를 잘라 내고 새로운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낫다.
“복수하려고.”
카르낙이 다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 같은 천하고 비루한 자식의 발아래에 엎드려 죽고 싶을 만큼 치욕스럽고 부끄럽도록. 모멸감으로 혀를 깨물고 싶을 때까지 고통받으라고. 그래서야.”
“…….”
“오직 그뿐이야.”
그렇게 답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분명 강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사내인데 문득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단 생각이 들었다.
“도울게요.”
릴리가 그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카르낙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돕겠다고 하는 건가. 나의 복수를? 삐뚤어지고 비도덕적인 저의 치기를?
“폐하께서 어서 빨리 평화를 찾고 행복해지시기를요.”
카르낙은 허탈히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도 투로가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투로가 행복해하는 것은 곧 신에 대한 죄악이었다. 그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그들이 고통받음으로써 신실한 엘버그의 국민들은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고, 모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른다.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 평생 그 감정이 거세되어 살아온 이들은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저 행복이란 신의 사랑을 받아 새하얀 피부와 밝은 금발 머리를 휘날리는, 신에게 선택된 엘버그의 국민들의 것이라 여겼다. 감히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바라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었다. 치욕을 느껴야 했다. 죄인이 되어야 했다.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행복 따위는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거세되어 박탈당하였으니 평생 몰라도 된다. 대신 그들도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다. 그들에게 행복을 거세하여 박탈하고 싶다. 똑같은 고통 속에 신음을 흘리게 만들고 싶다.
보라. 너희가 뱉어 놓은 너희의 죄악이 다시 너희에게 돌아왔다. 온몸에 거머리처럼 붙어 피를 빨아먹으러 왔다. 온몸이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벌레들이 왔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신음하여라. 비명을 지르며 자비를 구걸해라. 신의 구원을 기도해라. 그는 결코 듣지 않는다. 그는 결코 보지 않는다. 그는 결코 너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하루빨리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길 바라지.”
“…….”
릴리는 걸음을 멈췄다.
“파니릴리 양.”
카르낙은 친절한 말투로 공손히 그녀의 이름을 한번 부르고 그대로 멀어져 갔다. 카르낙이 행복해지는 것과 파니릴리가 하루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 그 공통점을 모를 리 없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것.
카르낙이 말한 것은 그것이었다.
***
세일린은 캘던의 노서쓰 백작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녀였다. 백작의 집에서 바닥을 쓸고 닦거나 설거지를 하고, 닭이나 거위를 잡아다 털을 뽑는 등의 잡일을 하다가 노서쓰 백작이 왕궁에 바칠 세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 파산하자 세일린은 다른 고가의 물품들과 함께 국왕청에 압류당해 성으로 들어왔다.
몇몇은 다시 값이 매겨져 다른 귀족이나 상인들에게 팔려 가거나 노예로서 타국으로 이송되었다. 또 몇몇은 세일린과 같이 젊고 건강하여 캘던 성안에 남아 왕가의 시종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편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한다는 캘던 성에서 국왕과 그 왕비를 모시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캘던 성안에서의 시종살이는 결코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캘던 성은 언제나 알기어스 왕의 광증으로 공포에 잠겨 있었다. 어제까지 함께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던 동무가 다음 날 아침 시체가 되어 나타나거나 갑자기 사라지거나 했다.
어느 날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불려 가 새빨간 피로 칠갑이 되어 있는 방을 청소해야 했다. 처음엔 구역질이 밀려왔고 두 번째부터는 온몸이 떨려 왔다. 모두 쉬쉬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알기어스 왕의 광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성벽의 한구석에는 언제나 시체들이 즐비했다. 거의 매일같이 시체가 썩는 냄새나 혹은 시체를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성벽을 기어오르려다 죽임당한 시녀들도 있었다. 단지 심기가 어지러운 왕의 곁에 있었다 하여 사지를 도륙당한 관료의 시체를 치워야 할 때도 있었다.
왕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반드시 피비린내가 났다. 언제부턴가 시체의 냄새를 맡고 모여든 쥐들이 궁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세일린도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죽을 용기라도 달라고 매일 밤 신께 기도했다.
그러다가 반란이 일어났다. 카르낙 발투만은 성문을 부수고 광기에 가득 찬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미친 왕은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둔했다. 알기어스의 목은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투로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떨어져 나갔다.
하루아침에 새로운 왕가가 들어섰다. 악명 높은 투로. 카르낙 발투만. 이제 세일린은 발투만 왕가를 모셔야 했다. 검은 머리의 그을린 피부를 지닌 천하고 비루한 자들의 왕. 그가 이제 엘버그의 왕이 된 것이다.
“세일린.”
딱딱한 잠자리에 앉아 촛불 하나를 불빛 삼아 자수를 놓고 있는데 함께 방을 쓰는 캐시가 들어와 숄을 벗으며 물었다.
“뭐 해? 웬 자수?”
“릴리 아가씨께 드리려고.”
캐시도 릴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쪽 탑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머리색과 눈동자는 왕궁의 가장 커다란 이야깃거리였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알기어스 왕가의 마지막 핏줄. 단 하나 남은 신의 아이. 그것은 왕실의 시종과 관료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캐시도 릴리 아가씨를 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일하는 곳은 성의 가장 구석에 자리한 향신료 저장고여서 마주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어땠어?”
“늘 그렇듯 상냥하셨지.”
세일린이 기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캐시는 세일린이 공들여 머리맡에 걸어 둔 화관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화관을 잘 만드는 여왕님이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생소했다.
“그분이 폐하와 결혼하면 곧 둘 사이에 아기씨가 생기겠지?”
“그렇겠지.”
세일린은 초롱이 꽃을 표현할 연보라색 실을 천에 얽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검은 머리? 흰머리? 피부는?”
“캐시.”
세일린은 누가 들을까 무서워 나무라듯 불렀다. 하지만 캐시는 재미있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넌 안 궁금해? 생각해 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피와 세상에서 가장 비루한 피가 섞이는 거잖아.”
“캐시, 쉿! 그만해. 그러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나겠어.”
“넌 왕을 좋아하는구나?”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세일린은 눈동자를 굴리고 다시 자수에 열중했다. 그러자 캐시는 침대 위에 발라당 드러누워 제멋대로 이야기를 해 댔다.
“하긴 폐하의 내실에서 일하는 동무들 중에도 폐하를 흠모하는 애들이 꽤 있어. 어떤 애는 폐하의 알몸도 봤대. 주무실 때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더라. 그래서 때를 잘 맞춰 들어가면 폐하의 알몸을 볼 수 있대.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폐하는 아주 거대한….”
“그만해. 난 안 듣겠어.”
“사람들은 폐하가 천민 출신이라고 수군거리지만 사실 난 약간 희망을 얻기도 해. 왜냐하면 그분은 누구나 공평하게 대하시잖아. 모두 다 시정잡배처럼.”
더는 듣지 않겠다고 했는데 세일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맞아. 폐하는 모든 이들을 하찮게 대하신다. 그가 귀하게 대하는 이들은 늙고 등이 굽은 여인 에이가, 저와 같은 천민 출신 로로 그리고 그의 근위대장 핀뿐이다. 그 외에는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귀족이건, 시종이건 누구건 간에. 분명 귀족들은 그래서 그를 싫어할 것이다. 그의 근본을 따지며 경박하고 몰지각하고, 무식하고 비천하기 짝이 없다며 욕을 해 댈 것이다.
그러나 시종들에겐 아니었다. 전과 달라지지 않는 대우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그들은 귀족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아닌가. 그들이 끌어내려지건, 아니면 자신들이 거기까지 올라가건 상관없이 말이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꾸겠지만 나도 잘생긴 기사님과 혼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어 보는 거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
세일린은 릴리를 떠올렸다. 선뜻 저에게는 필요 없으니 보석을 구경해 보겠냐고 제안하던 그녀의 상냥한 말투에서 가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어쩌면.
“그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파니릴리가 이 왕국의 안주인이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