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카르낙이 성으로 돌아오자 파니릴리는 비로소 비좁은 방 안에서 해방되었다.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카르낙이 돌아와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니 그녀는 이제 국왕의 약혼녀이자 곧 엘버그 왕국의 왕비가 될 고귀한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성안에 하나둘씩 릴리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가진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머리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단 한 명뿐인 신의 아이. 성안의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찬양했다. 왕가의 핏줄이 살아 있으니 이 땅은 신에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언젠가 재앙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다시금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벅찬 설렘이 가득했다.
파니릴리는 에이가가 붙여 준 시녀 세일린을 데리고 궁전 뒤쪽 정원으로 향했다. 성의 대정원은 정원사가 공들여 손질해 체계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반면, 뒤편의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릴리는 맨 처음 세일린이 저를 데리고 성의 이곳저곳을 소개할 때부터 이 정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꽃과 나무에 둘러싸여 자란 탓일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이곳에 오면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혼란한 가운데에도 어쩐지 자신을 잃지 않고 견뎌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생기고는 했다.
“아, 초롱이 꽃이네요.”
릴리는 몸을 굽혀 연보랏빛 꽃잎을 따 냈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생명력이 무척 강해요. 마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거든요. 어린 순을 따서 요리해 먹으면 참 맛있는데 말이죠.”
세일린은 그런 릴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아가씨는 숲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세일린은 꼭 그녀가 숲의 요정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숲에 오면 누구보다 평화로워 보였고 또 숲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어 보였다. 아름다운 나비나 딱정벌레는 물론 세일린은 이름도 모르는 곤충에 대해서도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았다.
맨 처음 그녀와 이 정원에 왔을 때 제게 만들어 준 화관을 세일린은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혹여나 마른 꽃잎이 바스러질까 벽에 걸어 두고 만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파니릴리가 준 것이 소중했다. 에이가의 말처럼 그녀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단지 왕가의 핏줄이어서만이 아니다. 그녀의 다정함과 평화로움에 감화되어 곁에 있으면 저의 마음 역시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릴리는 세일린의 질문에 빙긋 웃었다. 아직 자신이 어떻게 자랐는지는 비밀로 해 두고 싶었다. 혹여 저의 사연이 카르낙이나 에이가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염려된 까닭이었다.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조리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주실 거예요.”
“친절하네요.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도 음식은 충분히 맛있으니 괜찮아요.”
릴리는 방긋 웃으며 작게 나 있는 오솔길을 걸었다. 세일린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별로 먹는 것에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사실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야 하니 먹었다. 먹는 것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가.
“지금껏 제가 모신 분들은 모두 맛있는 음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셨거든요.”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 진귀한 것, 비싼 것을 수집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침구에 놓인 자수, 커튼의 재질, 책상을 만든 나무의 종류와 그것을 만들어 준 공예가의 명성도 중요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그러한 것들을 고민했다.
어떤 색의 드레스를 어느 디자이너에게 맡길까. 어떤 음식을 꼭 먹어야 할까. 어떤 구두가 가장 예쁠까. 누구에게 부탁해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를 가질 수 있을까. 하루하루 사는 게 버겁고 괴로운 세일린에게 그들의 고민과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뿐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세요. 저라면 온갖 사치품들로 치장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을 텐데요.”
“내 방에 쓰지 않는 보석들이 잔뜩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한번 구경해 볼래요?”
“예?”
세일린은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세일린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세차게 저었다.
“아니요, 아가씨! 그런 당치도 않을! 그런 말씀은 절대 하시면 안 돼요!”
“왜요?”
왜냐고 묻는 릴리의 무구함에 세일린은 더 기겁했다.
“어떻게 시종이 주인의 물건을 탐내겠어요. 죽을 각오로도 못 할 일입니다.”
“내가 선물하는 것인데도요?”
“그런 값비싼 선물은 종에게 주어서는 안 돼요!”
“내게 필요 없는 것인데도요?”
“그럼요!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간 필시 도둑으로 몰려 손목이 잘릴 거예요.”
어째서? 릴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필요하지만 내겐 필요 없는 것을 선물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엘버그에서 귀하다는 것은 비싸다는 뜻인가요?”
세일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가씨. 비싸니까 귀한 것이지요.”
“여기 있었네.”
누군가 불현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일린은 뒤를 돌아보더니 곧장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굽혔다. 카르낙이었다.
“한참 찾았잖아.”
나를 왜? 릴리는 의아함에 휩싸여 그를 쳐다보았다. 카르낙은 그녀의 회색 눈동자를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는 읊조렸다.
“대단히 언짢아 보이네.”
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릴리는 고개를 털며 황급히 미간의 힘을 풀었다.
“아니요. 세일린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요.”
그러자 카르낙의 시선이 세일린에게로 닿았다. 그녀는 움찔 떨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며 눈을 빛내던 아이가 겁을 먹은 채 덜덜 떠는 것을 보니 릴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서 빨리 그녀를 카르낙에서 해방시켜 주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릴리가 묻자 카르낙이 ‘아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고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어요.”
릴리는 세일린에게 당부하고 곧 카르낙을 따라 걸었다. 그는 시종 무리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입을 열었다.
“에나가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대.”
에나. 릴리는 역사서와 기록물에서 본 그 단어를 재빨리 상기시켰다.
“에나라면 북쪽 신전을 지키는 사람이죠?”
“글쎄, 신전을 지키는 사람인지, 아니면 신전을 사유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맞아. 그 사람이 에나지.”
카르낙은 파니릴리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 국왕의 결혼식은 늘 에나가 집전했다더군. 하지만 내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을 모양이야. 그래서 아무나 사제 서품을 받은 자가 집전하도록 할 거야.”
“네….”
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과 에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 왕의 결혼식을 늘 에나가 집전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에나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아마 결혼식의 전후로 잡음이 많아지겠지. 카르낙에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어쩌면 저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릴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섭섭하다거나 서운하다거나 걱정스럽다거나 하는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치러져도 상관이 없었다. 흥미도 없었고, 의례 중 자신이 해야 할 것 이외에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에 저를 찾으신 건가요?”
오히려 카르낙이 몸소 그러한 사실을 전해 주려고 저를 찾아온 것인지가 더 궁금하고 신경 쓰였다. 그런 일은 에이가나 다른 신하들을 통해 전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고.
“에이가가 닦달을 해서 말이야. 결혼도 전에 왕이 제 아내를 두고 내외한다는 소리는 들리게 하지 말래. 그래서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은 널 찾아와야 할 것 같아. 불행히도.”
릴리는 그의 말을 곰곰이 듣다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에이가와 결혼하는 것은 어떠세요?”
아무리 봐도 카르낙은 에이가를 무척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을 장자를 원하지도 않고, 부부로서의 정을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니 차라리 이럴 바에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그러게.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닌데 거절당했어.”
“저런.”
릴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러자 카르낙이 대뜸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카르낙은 그녀의 무구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농담이야, 진담이야?”
“어떤 것이요?”
에이가가 몇 살인데. 결혼식을 치르기도 전에 송장을 치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해야 할 나이인데. 오랫동안 엘버그 땅을 떠나 있어서 개념이 영 다른 것일까.
“그 나라에선 그랬어? 스물한 살짜리 사내가 환갑이 넘은 할머니를 신부로 맞이하고 그래?”
“네.”
“뭐?”
카르낙은 진심으로 놀랐다. 릴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가족이 되기 위해 그러기도 해요. 그라타는 여러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가능하거든요.”
“…….”
“그러니 늙고 병들어 혼자 남은 노인이 있다면 가족으로 맞이하기 위해 결혼할 수도 있죠. 형태는 다르지만 그것도 엄연히 사랑이니까요.”
카르낙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긴 달라. 여긴 한 사람의 남편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아내만 허용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