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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화 (19/231)

19화

카르낙의 눈동자가 좌우로 조금씩 움직였다. 릴리는 그의 기분이 언짢아질까 두려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좋습니다. 성심껏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장자를 낳아 왕비로서의 책임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이후엔 부디….”

“파니릴리 양.”

카르낙이 릴리의 말을 가로막으며 다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그의 시린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사이엔 아이가 없을 거야.”

“…….”

연약한 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냐하면 우린 왕과 왕비일 뿐 결코 부부가 되진 않을 테니까.”

“…….”

처음으로 릴리는 모멸감에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꺼낸 말인데. 사내에게 안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이 아내의 의무이며 왕비의 존재 의미라기에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 것인데. 수백 번 수천 번 이 상황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었다.

에이가가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그녀를 밀치고 뛰쳐나가면 도망칠 수 있을까, 저 좁은 탑의 창문을 통해 혹여 돌벽을 타고 도망갈 수는 없을까. 에이가에게 제발 저를 내보내 달라고 빌어 볼까.

그녀가 마련해 오는 온갖 장신구들을 수중에 쥐고 있다가 그것을 미끼로 불충한 신하들에게 도움을 얻어 볼까. 그러다가 어느 날은 도망치는 것은 나약하고 비겁한 자들만이 하는 짓이라고, 도망치려 했었다면 부르테가 도와준다고 했을 때 진작 달아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니릴리는 이미 너무나 늦어 버렸다며 자신을 달랬다.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침착해지려 애썼다. 처음의 목적을 잊지 말자고. 제 두 발로 이곳에 온 이유를 절대로 잊지 말자고. 변심하지 말자고 수백 번, 수천 번을 다짐했다.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그라타로 돌아갈 수 있나요?”

릴리는 절망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느냐고.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간절히 잡고 싶다는 듯이 열렬히 호소했다.

카르낙은 그것이 매우 생소하게 느껴졌다. 목숨을 구걸하던 계집들의 처연한 얼굴이야 많이 보아 왔다만 그녀의 얼굴은 그것들과 매우 달랐다. 그녀가 은발을 지닌 왕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보다 더 밝은 피부와 눈동자 때문일까.

“왜 그라타로 돌아가려고 하지?”

“그곳이 제집이니까요.”

엘버그 왕국에서 자란 것이 십여 년, 그 후 그라타에서 산 것이 또 십여 년이다. 굳이 어디가 고향이냐고 따지자면 당연히 엘버그가 그녀의 고향이었다. 그라타는 그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도피처에 불과하지 않은가. 왜 그곳에 가고 싶은지 카르낙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고향이란 늘 척박하여 치열하게 생존해야만 했던 지옥 같은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제부터는 이 성이 그의 집이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그와 함께 고통받았던 투로의 형제들과 그의 자손들까지 이곳에서 지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엘버그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내가 너와 결혼하기로 한 건 에이가가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거든.”

“…….”

“굳이 따지자면 너는 나의 적이 아닌가. 너는 알기어스와 라미레스 가문이 섞인 엘버그의 고귀한 혈통이니 너 역시 내게 혐오감을 느껴야 마땅하지.”

파니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는 절박함마저 엿보였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저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저를 특별하다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유일 뿐이에요. 이곳에서 해야 할 제 수고에 대한 마땅한 대가로 자유를 사겠다는 것뿐이에요.”

“에이가도 알아? 네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호의들, 지극정성으로 대하던 그녀의 친절과 헌신에 대고 나는 당신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노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까 두려워 주저하였다.

“이미 에이가는 너를 평생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어. 네가 이 땅을 떠난다면 에이가는 지체 없이 너를 따라갈 거야. 그런데 나는 에이가가 필요하거든.”

“…….”

“애석하게 되었네. 우리의 바람이 서로 상충하니 말이야.”

카르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제 발치에 주저앉아 있는 릴리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르도록 하지. 에이가가 감격해서 눈물을 쏟을 만큼.”

자신의 할 말을 마치자 카르낙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렀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릴리는 정신을 차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카르낙은 이미 떠난 뒤였다. 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

며칠째 정원이 분주했다. 정원사들은 총괄자의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꽃과 나무에 물을 뿌려 댔다. 정원에서 날아드는 버석한 모래들이 자꾸만 창문에 달라붙어 성안의 시종들은 종일 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낙은 창밖으로 꼭대기까지 솟아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아도 현기증이 날 만큼 따가운 빛이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물었다.

“오지 않겠다고?”

카르낙은 서신을 쥔 채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씹고 있는 로로에게 다시 물었다. 분명 들었음에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다.

“네, 폐하. 에나님께서는 성혼식을 거행할 수 없으시답니다.”

“…….”

에이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질렸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버그 국왕의 성혼식을 집전할 수 없단 말입니까? 신의 대리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고 의무인 것을….”

“나는 알기어스가 아니잖아, 에이가.”

카르낙은 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서서 다소 심드렁히 말했다. 마치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것 때문에 거절했겠지. 게다가 테이먼 테르조란 또 다른 경우의 수가 있으니 차마 공개적으로 내 편에 서긴 힘들 거야.”

“파니릴리 아가씨는요?”

에이가가 항변했다.

“아가씨는 적법한 알기어스 왕족의 후계자예요. 테이먼 테르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귀한 혈통이시라고요.”

물론 에나도 그것 때문에 꽤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설마 먼 타국에 왕의 사생아가 존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게다가 그 사생아를 카르낙이 찾아 결혼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얻으려 할 줄은 더더욱 몰랐겠지.

그러니 이런 때에 그가 카르낙의 결혼을 집전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테이먼 테르조와는 완전히 등을 돌리겠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나의 땅에 테이먼 테르조가 있었다. 바로 코앞에 칼과 방패로 무장한 수만의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이가 어디 있으랴. 또한 에나는 언제나 분쟁과 거리를 두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것은 엘버그의 건국 때부터 내려온 이 땅의 근간이요, 뿌리와도 같은 원칙이었다. 에나는 신의 사람이다.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엄연한 신성 모독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에나가 왕가의 몰락을 위해 반역자에게 뒷돈을 대 주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것도 신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투로와 손을 잡은 것이 들킨다면?

단지 죽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가족과 형제까지 처형될 것이며 그의 가문은 영원히 엘버그 왕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에나가 결혼식 참석을 거부한 것은 그러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혹여나 카르낙과의 은밀한 거래를 들킬까 두려운 것이다. 카르낙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입을 뗐다.

“테이먼 테르조도 지금쯤이면 캘던에 제 사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엄연히 카르낙 발투만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말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을 거예요. 자금줄인 모웨나가 함락되었으니 내부를 단속하기에도 바쁠 겁니다.”

핀은 작은 단검 하나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에나가 테이먼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걸까요?”

에이가는 불안했다. 왕좌를 둘러싼 엘버그의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 왕실의 재정으로는 부역인들의 급료와 군비를 대기에도 빠듯했다. 에나의 도움이 아니라면 카르낙은 결국 반란군의 공세에 밀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카르낙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생각이 꽤 많아 보였다. 로로는 양피지를 매만지며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

“결혼식을 거행하려면 반드시 사제가 필요하잖습니까.”

“네, 반드시요.”

에이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이것은 엄연한 왕실의 가장 큰 행사였다. 그리고 카르낙은 반드시 엘버그 왕국의 전통대로 혼례를 치러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가 진실로 엘버그 왕국의 왕임을 사람들에게 공표할 수 있다. 카르낙이 물었다.

“반드시 에나여야만 해?”

에이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원칙은 사제 서품을 받은 자로 되어 있지요. 하지만… 왕의 성혼식에 에나가 아닌 이가 집전을 한 경우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럼 아무나 사제 서품을 받은 자로 데려와.”

“아무나라뇨!”

에이가가 기함했다.

“왕의 성혼식을 어떻게 아무 사제에게 맡길 수 있겠어요! 에나님께 다시 한번 편지를….”

“소용없을 거야.”

“아직 해 보시지 않았잖아요.”

“그는 나와 테이먼을 양손에 쥐고 맘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거야. 그의 욕망은 내가 가진 것보다 클지도 몰라.”

카르낙은 단지 자신이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는 자리에 올라서서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혐오와 슬픔에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그러고 가능한 한 더 오랫동안 그것을 즐기기 위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나는 아주 먼 미래까지를 내다보며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코 다시는 왕이 신에게 혹은 신의 대리자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위협적인 권력의 탄생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엘버그 왕국의 가장 꼭대기, 신 다음의 절대 권력자가 되려하는 것이다.

“혹시 릴리 아가씨께서 에나님께 서신을 보낸다면….”

“내 말대로 해, 에이가. 서품을 받은 자를 찾아와.”

“…….”

에이가는 망설였다.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줄 생각은 없어.”

에나가 자신의 권력을 키울 생각이라면 카르낙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두 번 다시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순응하며 살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도 카르낙은 마땅히 그를 도륙해 제 발아래로 끌어내릴 심산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단호하였다.

그깟 결혼식 따위 아무렇게나 치르면 어떠랴. 사람들이 저를 경멸하든 말든 인정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격식에 맞지 않는 결혼식이 저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 편이 두고두고 엘버그인들의 치욕이 되겠지.

“사제들에 대해서는 나나 로로보다 당신이 더 잘 알 테니 믿고 맡기도록 할게.”

“네, 폐하.”

에이가는 카르낙의 고집을 꺾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왕이었다. 에이가는 그의 조언자이자 친우인 동시에 그의 신하였다. 군주의 말을 따르는 것이 기본적인 그녀의 임무인 것이다.

에이가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카르낙이 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에나를 감시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해.”

감시? 로로는 근심스레 내리깔린 눈을 번쩍 들었다. 카르낙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에나와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그와 반목하는 자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가능하면 훌륭한 가문에 욕심은 많고 아둔한 자로.”

“그 말은….”

진의를 물으려 했으나 어쩐지 두려워 로로가 뒷말을 흐렸다.

“제거해야지.”

카르낙이 선뜻 대답했다. 별로 고민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그게 누구든 내게 위협이 되는 자는 용납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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