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이가는 릴리에게 시종을 먼저 보내 곧 왕이 방문할 것을 알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몇 명의 시종을 더 보내 릴리의 방을 아주 깨끗하게 청소하고 향기로운 꽃과 장식품으로 단장토록 했다. 마치 신혼부부의 신방이라도 꾸며 주려는 듯 말이다. 호사스럽지만 하는 이도 고역이요, 보는 이도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저기….”
릴리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시녀들 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가 공손히 말했다.
“예, 아가씨.”
“혹시 오늘 폐하를 뵈었나요?”
“예. 에이가 님, 로로 님 그리고 핀 님과 함께 회랑을 걸어가실 때 뵈었습니다.”
“어때 보이시던가요?”
시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좌우로 굴렸다. 무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리기 전에 릴리는 다시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던가요? 아니면 화가 나 보이시던가요?”
그제야 시녀는 반색하며 바로 대답했다.
“아,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에이가 님께 다정히 팔을 두른 채 몇 번이나 웃으셨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그자가 또 심사가 뒤틀려 제 의자를 발로 찼던 것처럼 서 있는 저의 정강이를 찰지도 모르니 기분 상태 정도는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준비가 되어 있으면 충동적인 상황이 벌어져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아가씨, 에이가 님이 이것을 몸에 발라 드리라고 하셔서요.”
다른 시녀 하나가 조심조심 다가와 제 품에 든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이게 뭔가요?”
“향유 같은데 저도 그저 주신 대로 받아 온 것이라…. 발라 드려도 될까요?”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곁으로 다가와 코르크 마개를 병에서 빼냈다. 곧 향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릴리는 미간을 가늘게 구기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풀잎 내음 같기도 하고, 달콤한 내음 같기도 하고.
“잠시 실례합니다, 아가씨.”
시녀는 손끝에 향유를 묻혀 드레스 위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에 펴 발랐다. 혹시 릴리가 불쾌해할까 저어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에이가 님이 꼭 이곳에 바르라 하셔서….”
“향이 무척 독특하네요.”
릴리가 계속 킁킁거리며 말했다. 시녀는 그녀의 쇄골까지 향유를 듬뿍 바르고 물러섰다.
“됐습니다, 아가씨.”
이제 릴리의 가슴은 젖은 설탕을 문질러 놓은 듯 탐스럽게 빛났다. 왕을 위한 치장이겠지. 몸을 도구로 쓰는 닳고 닳은 여자처럼 보여야 한다니 조금 서글픈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스스로 목걸이를 골라 목에 건 것과 같다. 다소 경박하게 느껴지더라도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에이가에게 사치스러울 만큼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릴리는 에이가가 어떤 마음으로 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지 안다. 그녀는 카르낙이 로레인의 딸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로레인의 딸이 왕의 옆에 서서 왕비로서 응당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누리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마 이것은 로레인을 위한 일이리라. 비록 죽어 사라진 이일지라도 에이가는 평생 제 주인을 사랑했기에 그녀가 바라 왔던 모든 꿈을 이루어 주고 싶은 것이다.
피로 이어진 혈육보다 더 두터운 사랑이었다. 저와 올라가 그랬듯 어머니와 에이가 역시 이 넓은 세상에서 단둘뿐이었겠지.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말이다.
막 시종이 마지막 꽃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릴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곧 이렇다 할 기별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시종들은 재깍 방구석으로 등을 붙이고 고개를 한껏 숙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카르낙과 눈이 마주쳤다. 릴리는 그의 푸른빛 눈을 피하지 않고 한참 응시하다가 곧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폐하.”
카르낙은 릴리가 인사를 마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그러더니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그때의 그 볼품없는 계집과는 달랐다.
풍성한 백금발의 머리는 곱게 빗어 뒤로 묶었고, 그보다 짙은 잿빛의 눈썹이 딱 알맞은 자리에 그려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백색의 드레스는 제법 우아했으며, 쇄골을 지나 앙가슴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선명한 보라색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윤기가 흐르는 풍만한 가슴골에서 앙증맞게 빛이 났다.
카르낙은 이제야 릴리의 얼굴에서 로레인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알기어스 왕의 유려한 턱선과 오만하게 빛나던 눈매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 여자는 /분명 그 둘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빚어 놓은.
“이제야 좀 사람 같아졌군. 계지….”
“크흠!”
뒤에서 에이가가 헛기침을 했다. 아, 맞네.
“파니릴리 양.”
에이가가 한 번만 더 릴리를 일컬어 계집이라 표현하면 성벽에 목을 매 죽을 거라고 했다. 늘 제 목을 자르라던 사람이 제 손으로 목을 매단다니 좀 섬뜩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째 허투루 들을 수 없어 카르낙은 곧바로 호칭을 변경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인사에도 릴리는 공손히 대답했다. 에이가는 방 한구석에 몰려 있는 시종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그들을 데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이제 방 안에는 릴리와 카르낙만 남게 된 것이다.
한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둑한 방은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카르낙은 눈으로 방을 한차례 훑었다. 높게 솟은 천장부터 여전히 곰팡이 내가 나는 축축한 돌벽 그리고 간소하지만 깨끗한 릴리의 침대와 꽃이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까지도.
카르낙이 한참 만에 말했다.
“여긴 처음 와 봐.”
그는 에이가가 둘만 남겨 놓고 나간 것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릴리는 짐짓 불안해져 두 손을 힘껏 모아 쥐고 바스락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곳이군.”
카르낙이 걸음을 옮기자 릴리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혹여 그에게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 봐 시선은 내내 바닥에 고정해 두었다. 카르낙은 연약하게 떨리는 릴리의 눈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을 보았다.
“이곳은 주로 왕의 심기를 거스른 왕족을 가두어 두는 곳이었대. 네가 들어오기 바로 전에는 알기어스 왕의 대비가 지냈다고 하더군.”
“…….”
“그녀는 여기에서 병들어 죽었지. 미쳐 가는 아들의 냉대 속에서 말이야.”
카르낙은 그녀의 쇄골과 앙가슴에서 빛나는 보석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곳은 병을 얻기 좋은 비참한 환경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사치스러울 만큼 안락한 공간이야. 비를 피할 수 있고 바람을 막아 줄 수 있고 몸을 뉠 수 있는 따듯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되어 주니.”
그러더니 다시금 시선을 올려 그녀의 동그란 콧방울을 바라보다가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릴리는 그에게서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카르낙은 물었다.
“그라타란 곳에 있었다고 하던데 어때? 그곳은 여기보다 사치스러운 곳인가?”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곳은 마른 나무줄기를 엮어 작은 움막을 지어 살거나 나무로 작은 초막집을 지어 삽니다. 저는 깊은 산속에 있는 작은 초막집에서 살았지요. 이곳과는 비할 데 없이 작고 볼품없었습니다만 부족한 것 없이 지냈습니다, 폐하.”
“그것 흥미롭네. 나도 움막에서 살았거든. 글쎄, 움막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나뭇가지에 지붕만 얹어 놓았으니 움막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
카르낙은 조소하며 릴리를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벌레처럼 마른 땅을 기어 다니던 나와 나무로 만든 초막집에서 살던 네가 이 왕궁의 주인이라니.”
“…….”
“사람들이 모두 기겁하겠지. 화병으로 몸져누운 이들도 꽤 될 거야. 투로와 왕의 사생아라. 알기어스 왕이 무덤에서라도 벌떡 일어나겠군. 아, 하긴 목 없이 살아나 봤자 알아볼 이도 없겠네.”
“…….”
“내 아내가 되려면 아비에 대한 모욕은 견뎌야 할 거야. 어머니에 대한 것은 제외하지. 로레인은 정숙하고 상냥한 여자였어. 비록 내 손에 죽었지만.”
일부러 도발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식으로 말을 뱉어내는 것이 그의 대화 방식일까. 알기어스 왕의 통치에 대한 것은 이미 역사서와 기록을 통해 많이 알고 있다. 그가 본받을 만한 왕은커녕 본받을 만한 아버지도, 인간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또한 카르낙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에이가에게 이미 들었다. 거의 자결에 가까운 죽음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저를 향해 조소를 하며 말하는 그를 보니 여느 여자들처럼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울음이라도 터트려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네.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친부모님을 뵌 적이 없어서 두 분의 이야기에는 그다지 큰 감흥이 없답니다. 다만 전 왕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별로 폐하께 득이 되는 언행은 아닐 것 같네요.”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짐짓 오만한 미소에 아이 같은 천진함이 같이 감돌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너는 내가 별로 무섭지 않은 모양이야?”
“무섭진 않습니다. 불편할 뿐이지요.”
릴리의 대답에 카르낙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하기야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은 매우 다행 아닌가. 기분이 좋다면 이제부터 제가 하는 부탁을 그가 흔쾌히 들어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폐하.”
릴리가 공손히 그를 불렀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폐하의 반려가 되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카르낙이 그녀를 응시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 릴리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폐하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가진 왕족의 핏줄뿐이라는 것도요. 비록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온 것은 제 운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왔다고요. 그러니 폐하.”
릴리가 숨을 한번 골랐다.
“제가 이곳에서 폐하의 아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면, 그렇다면… 저를 다시 그라타로 보내 주실 수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