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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화 (17/231)

17화

검은 깃발을 든 기수들의 뒤로 카르낙이 보였다. 성안의 관료와 시종들은 1년여 만에 귀환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 성문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왕의 귀환은 그다지 떠들썩하지도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적막하다는 말에 더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였다. 공포와 증오와 굴종이 한데 섞인 기묘한 광경. 캘던의 풍경은 이제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왕의 발아래에서는 엘버그의 모든 국민이 벌레였다.

“폐하.”

기쁨으로 환해진 에이가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로로의 바로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에이가. 로로.”

카르낙은 일찌감치 맨 앞에서 저를 맞이한 로로와 에이가에게도 잊지 않고 인사를 하고는 말에서 내렸다. 마구부장이 왕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았다.

“여긴 변함없이 을씨년스럽네.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에이가와 로로는 카르낙을 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요 근래 들어 엘버그의 수도인 캘던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비가 내린 게 언제였더라. 슬슬 농작물이 말라 죽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폐하의 명성 덕분이지요.”

에이가가 뼈가 있는 농담을 던지자 카르낙은 호쾌히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카르낙이 걸음을 옮기자 홍해를 가르듯 허리를 굽힌 시종들이 뒤로 물러났다.

“눈에 밟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이시니 다들 페하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무렴 내가 그 정도로 잔인할까. 눈에 밟히는 게 아니라 ‘심기를 거스르는’이겠지.”

그는 부러 뒷말에 힘을 주어 뱉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이 흠칫 놀라며 더 깊이 몸을 움츠렸다.

에이가는 그의 짓궂음에 혀를 찼다. 왕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위엄은 오간 데 없는 그의 행동이 더는 싫지 않았다. 이미 그와 너무 가까워진 탓이리라.

“궁전의 향신료가 바닥났어요. 후추나 정향은 그렇다 치더라도 소금과 설탕이 부족한 것이 문제예요. 시종들의 급여는 왕실의 귀중품을 팔아 충당하고 있지만 당장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국고가 텅 빌 거예요. 게다가 망가진 왕실의 병영을 보수하려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할 일은 많은데 자재는 물론이거니와 일손도 부족해요. 다른 지역에서 숙련된 인부를 데려와야 하는데 문제는 역시 돈이 부족하다는 거죠.”

에이가는 카르낙을 보자마자 1년간 산적해 있던 왕실의 문제점들을 속사포처럼 뱉어 냈다. 단락을 마무리 짓고 부족한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며 호흡을 깊게 고른 뒤 그제야 궁금한 것을 물었다.

“모웨나는 함락하셨나요? 돈도 돈이지만 모웨나의 항만은 꼭 필요해요. 귀한 향신료와 비단들은 모두 그곳을 거쳐 들어오니까요.”

“설마 내가 빈손으로 돌아왔겠어?”

카르낙은 시종 하나가 건넨 와인 잔을 들고 대꾸했다. 그들은 막 회랑을 돌고 있었다.

“코르넬리오 백작은?”

“아아, 그의 머리는 모웨나의 성문 앞에 잘 걸어 두었지.”

“그 식솔들은요?”

“코르넬리오의 처는 사랑하는 남편의 곁에 나란히 걸려 있고, 그의 장자는 아마 누군가 종자로 삼았을 텐데 말이야…. 누구의 종자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거윈.”

뒤에서 핀이 말했다.

“그래. 그놈이 종자가 필요하다더군.”

“이제 모웨나는 누가 관리하는 건가요?”

“우만.”

에이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우만이란 자가 있었던가?

“그게 누구죠?”

“코르넬리오 부인의 시녀였지, 아마?”

“…여자를 영주로 앉혔어요?”

에이가가 기함했다. 우뚝 멈춰 서려는 에이가를 끌어당기며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알고 보니 주인에게 불만이 많았더군. 좀 멍청하긴 하지만 약아빠진 것보다야 낫지.”

“여성은 영주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영지에 묶여서 그녀를 강탈하는 누구라도 영주가 될 수 있게 만드셨잖아요! 차라리 지난번처럼 노예에게 주었으면 지금보단 안심했겠네요!”

“걱정 마, 에이가. 병사들끼리 제비뽑기를 해서 한 놈이 우만과 첫날밤을 치렀으니까. 이젠 그자가 영주가 될 거야. 근데 그놈은 성이 없다더군. 조만간 괜찮은 성을 지어서 놈에게 하사해 줘.”

에이가는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낯빛을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언제나 왕에 대한 이런저런 변수를 생각하고는 하지만 카르낙은 늘 그보다 더 최악의 변수를 가져오곤 한다. 이제 더는 바닥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하면 그는 여지없이 그보다 더 아득한 밑바닥을 보여 준다.

“참, 그러고 보니 그놈 엘버그의 글을 읽고 쓸 줄 모르지?”

카르낙이 핀에게 물었다.

“아마 말도 잘 못 할걸요.”

핀이 대답했다.

“폐하!”

에이가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의 충동적인 결정에는 이력이 났는데도 아직도 그에게 기함할 일이 남아 있다니!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그 계집은?”

“네?”

“내 약혼녀 말이야.”

카르낙은 에이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적절한 화제를 찾아 이야기를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잘 먹혀 잿빛이던 에이가의 얼굴이 돌연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릴리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죠?”

심지어 입가에 미소가 감돌기까지 했다. 호락호락하지 않던 에이가에게 드디어 카르낙이 쥐고 흔들 만한 약점이 생긴 것이다.

“그분은 폐하가 명하신 대로 내내 서쪽 탑에 계셨어요. 그동안 한 번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으셨답니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깊은 분이시죠. 또 얼마나 똑똑하신지 제가 가져다 드린 역사와 교양 책은 물론이고 왕실의 기록서까지 모두 읽으셨답니다. 게다가 머릿결은 어찌나 비단 같은지… 만질 때마다 감탄을 한다니까요. 피부색은 또 얼마나….”

그대로 두면 릴리에 대한 찬양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카르낙은 에이가의 손에 술잔을 건네며 말을 가로막았다.

“일단 좀 씻고 싶군.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약혼녀를 만나러 가도록 하지.”

그러자 에이가의 눈빛은 감격에 겨워 반짝였다.

“네. 물론이죠, 폐하. 따듯한 물을 당장 대령하라고 명령해 둘게요. 아주 좋은 옷과 구두도요! 폐하의 머리를 단장해 줄 시종도 같이 들여야겠네요!”

에이가는 술잔을 들고 반대편으로 달음박질하듯 뛰어갔다. 로로는 흥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에이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카르낙에게 말했다.

“저렇게 기운찬 에이가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군요.”

그러자 카르낙이 답했다.

“동의하는 바야.”

“나도.”

핀이 거들었다.

카르낙은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돌돌 말린 채 왕의 손길을 기다리는 양피지들이 차곡히 쌓여 있었다. 그는 양피지에 찍힌 인장들을 살폈다. 대부분 캘던의 상인이나 귀족들의 것이었다.

보나 마나 자신의 처지를 읍소하는 내용일 터였다. 중차대한 일이 아니니 전선으로 배달되지 않고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을 테지. 카르낙은 대충 아무거나 골라 인장을 뜯고 양피지를 폈다.

“반란군들이 점점 북쪽으로 모여들고 있다더군요.”

로로가 말하는 동안 카르낙은 남성만을 받는 캘던의 도제 교육을 비판하는 어느 부인회의 읍소문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아마 그들은 테이먼 테르조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듯합니다.”

테이먼 테르조는 밝은 금발과 벽안을 가진 사내로서 라미레스 가문에서부터 파생된 유서 깊은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알기어스 왕보다는 로레인 하게너와 더 가까운 핏줄일 테지만 지금 와 그것을 따져 무엇하랴.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카르낙의 손에 사멸당한 알기어스 왕의 핏줄 대신 단 한 방울의 피라도 그와 가까운 테르조 가문의 장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알기어스 왕의 청년 시절을 연상시킬 만큼 젊고 용맹한 미남자라 하니 왕으로 내세우기엔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을 터였다.

“에나의 힘을 빌리려 할 거예요.”

로로가 조심스레 예측했다. 그러자 핀이 반박했다.

“하지만 에나는 우리 편이잖아. 물론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그가 바라는 것은 엘버그 왕국이 다시 충성스러운 신의 국가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왕실 예배당을 계속 비워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에요. 정세가 불안정하니 사제들의 안전을 위해 예배당을 비우겠다는 폐하의 뜻을 이해하는 듯 굴지만 속으로는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여차하면 그는 테이먼과 손을 잡을 수도 있어요.”

“그자가 약삭빠르다는 건 알아.”

카르낙이 양피지를 도로 말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말 못 하는 돼지와도 손을 잡을 사람이지.”

카르낙은 신을 믿지 않았다. 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먼 이국에서 온 핀도 같았다. 당장 알기어스 왕에게 위협을 느꼈기에 에나는 카르낙의 편에 선 것일 뿐, 사실 에나의 입장에서 새로운 왕과 그의 일원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한 번의 반역을, 그것도 가장 비천한 자를 왕으로 만든 성공적인 경험이 있으니 테이먼 테르조를 통해 다시 왕을 세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테르조 가문은 에나와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

로로는 생각에 잠겨 뒷말을 흐렸다. 테이먼은 그 이유로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북쪽은 모두 신의 땅이었으므로 그곳에서 전쟁을 치를 순 없다. 신의 대리자인 에나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테이먼도 그것을 알기에 그곳에 주둔하는 것이다. 명분과 힘을 키우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핀이 물었다. 로로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어쨌든 테이먼의 세가 더 불어나지 않도록 견제해야겠지요. 가장 강력한 동맹이자, 가장 부유한 아군이었던 모웨나의 코르넬리오가 죽었으니 당분간은 내부를 단속하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코르넬리오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드넓은 모웨나의 대지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어 엘버그에서 독립하고 싶어 했다. 테이먼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반대하면서도 전략적인 아군으로 만든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코르넬리오는 테이먼의 가장 큰 자금줄이었다. 코르넬리오가 죽음으로써 테이먼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에이가가 보낸 시종일 터였다. 카르낙은 부인회의 양피지를 로로에게 넘겼다.

“캘던의 부인들이 도제 교육을 받고 싶으시다는군. 관료들과 상의해 보도록, 로로 고문관.”

“…대체 상의할 관료들은 어디에….”

그렇다. 대법관을 맡아 줄 성직자는 아직 캘던의 땅을 밟지도 못했고, 왕의 조언자가 되어 줄 추밀원 기구와 그 의장도 공석이었다.

“에이가가 있잖아.”

에이가는 현재 재무와 시종장직까지 겸하고 있는 데다가 카르낙의 약혼녀를 돌보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1년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긴커녕 마주친 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의 일을 시종을 통하거나 필담을 통해 처리했다.

“폐하, 원치 않아도 책임감을 가지고 처리하셔야 할 일들이 있어요.”

카르낙이 국가의 번영이나 안정, 정치 따위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왕좌를 차지한 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싫다 해도 말이다.

공석은 모두 채워져야만 한다. 카르낙이 현재 어울려야 할 자들은 전쟁터의 병사들이 아니라 이 갑갑한 성안의 사람들이었다. 믿을 만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성안과 수도인 캘던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줄 왕의 대리인들을 뽑아야만 한다.

“일단 핀과 이야기해 봐.”

카르낙은 대충 뱉어 내고 집무실을 나섰다. 로로는 황당한 얼굴로 핀을 쳐다보았다. 핀은 제 붉은 머리카락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쳐다보지 마세요. 저는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

로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너무 길어 자칫 신음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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