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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화 (16/231)

16화

파니릴리는 서기관이 준 왕실 기록물을 읽다가 물었다.

“에이가, 알기어스 왕이 에인힐드에 신전을 세울 때 노예들을 모두 같이 묻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묻었답니다.”

그녀의 은발 머리를 정성스레 빗어 내리며 에이가가 대답했다.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신전 건축에 쓰인 노예 중 투로들도 있었지만 파산한 귀족과 고용된 자유민도 있었는데….”

릴리는 끔찍함에 뒷말을 흐렸다. 카르낙이 서쪽 탑에 가두고 떠나 버린 뒤 에이가는 살뜰히 릴리를 보살폈다.

정성 들인 신선한 식사를 매일 가져왔고, 열 살 이후 배우지 못한 엘버그의 고급 문자와 언어를 가르쳤으며, 왕국의 역사와 정치 등을 비롯한 교양서들을 늘 읽을 수 있도록 방 안에 비치해 두었다.

정숙하지만 불편함은 최소화한 드레스도 계속해서 만들어 왔고, 보석상을 데려와 그녀에게 격식에 맞는 장신구를 고를 수 있도록 도왔으며, 언제나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릴리의 머리에 향유를 바르고 정성스레 빗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녀의 백금발이 눈부시게 빛날 수 있도록.

“믿기지가 않네요.”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사람의 피가 제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단 한 사람의 광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미 없이 목숨을 잃었는가.

알기어스는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공포에 휩싸였다. 카르낙이 반란을 일으켜 알기어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미친 왕의 밑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카르낙을 좋은 왕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를 좋은 왕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비천한 신분에 모욕감을 느낀다. 왕국의 영주들은 반란을 모의하다 카르낙의 손에 죽었거나 혹은 여전히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

엘버그에서 카르낙의 편이 되어 줄 이들이라고는 오직 그와 같은 투로들이나,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에나가 보내 준 용병들 그리고 주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를 돕는 에이가 정도였다.

어째서 에이가가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저를 찾아 이곳에 끌어들였는지 이해를 하고도 남았다. 왕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피와 목숨을 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싸움이었다.

이 상황에 좋으나 싫으나 알기어스 왕의 핏줄을 이어받은 저는 어쩌면 카르낙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비록 본인은 그것을 원치 않고 있어도 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세상과 동떨어진 채 지낸 자신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던 자신이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카르낙에게는 정통성도 필요하지만 정세에 밝고 현명한 권위자도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에 잠겨 있던 릴리가 불현듯 물었다.

“카르낙은 글을 읽을 줄 아나요?”

그러자 에이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읽고 쓰는 것 모두 문제없이 하세요. 고문관인 로로가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고 하더군요. 영특한 분이라 금방 깨치셨대요. 하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은 끔찍이도 싫어하신답니다. 덕분에 엄청난 악필을 자랑하시죠. 웬만한 사람은 봐도 읽기 힘들 겁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요.”

릴리의 대꾸에 에이가가 웃었다.

“불행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지요. 제 노안은 가속화되겠지만 보안만은 철저하게 지켜질 테니까요.”

“이 기록물은 알기어스 왕이 광증을 앓았던 때까지만 쓰여 있네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까닭이랍니다. 서기관들이 열심히 기록 중이니 곧 매듭지어질 거예요.”

알기어스 왕 통치 시절의 기록물은 모두 날조되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 아닌 신 그 자체로 기록되기를 원했고, 그에 관한 기록물에서는 에나의 존재도, 여신 아마네스의 존재도 모두 지워져 있었다.

또한 왕가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물에도 손을 대 최초의 인간인 라미레스의 존재조차 지워 버렸다. 그 대신 직접 알기어스 왕 자신이 달에서 내려온 신이자 용으로 변해 세상의 불길을 잠재웠노라 기록하게 했다.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한동안 기록실의 양피지는 모두 피에 물들어 붉은빛을 띠었다고 했다.

“카르낙은 여인에게 폭력적인가요?”

릴리의 물음에 에이가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요, 아가씨. 폐하는 여자에게 폭력적이지 않으세요. 절대요. 그렇다면 저 같은 년은 살아남을 수 없었겠죠.”

그러나 첫 대면에서 카르낙은 릴리를 일컬어 ‘계집’이라 했다. 그뿐인가? 대답하지 않자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리 많은 사내들을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제게 그토록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릴리가 만나 본 어떤 이보다도 무례했다.

왕이라는 자가, 그것도 곧 자신의 남편이 될 자가 그런 사내라니. 혼인을 치르기도 전에 그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내내 두려웠다. 차라리 그가 전쟁터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그분은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무지하세요. 아니, 바른대로 말씀드리자면 여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시죠.”

에이가가 릴리의 머리끝을 빗으며 말을 이어 갔다.

“투로들에게는 여자가 귀했어요. 평생 살면서 여자를 구경해 보지 못한 이들도 많을 거예요. 폐하께서도 여자를 본 일은 있어도 여자와 가까이 지내 본 일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저 같은 늙은이를 제외하고는요.”

“…….”

“그러니 그저 아가씨께도 사내를 대하듯 대하신 거예요. 왕에게 맞는 기본 소양은 제쳐 두고서라도 엘버그 왕국의 기본적인 예의범절 정도는 배워 두시면 좋을 텐데 전혀 흥미가 없으세요. 그저 칼을 휘두르는 것만 좋아하는 열 살배기 사내아이 같으시죠.”

릴리는 조용히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에이가는 릴리의 머리를 단정하게 모아 리본으로 묶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좋은 분이세요. 그분은 저 같은 천한 사람도 친구처럼 귀히 여겨 주신답니다. 고문관 로로도, 근위대 총사령관인 핀도 모두 신분이나 출생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해 주시죠. 그 점이 엄격한 신분제로 운영되는 엘버그 왕국의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지만 저 같은 이에게 폐하는 은인이나 다름이 없답니다.”

“제가 지내던 곳도 계급이 없었어요. 엘버그의 신분제는 제게도 낯선 제도예요.”

“하지만 엘버그 왕국은 오랫동안 신분제를 유지해 왔고 이 왕국은 그 근간을 토대로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사람들의 반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죠.”

달이 자신의 아이를 내려보낸 특별한 땅.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고귀한 왕족의 혈통. 엘버그의 뿌리가 왕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되는 한 이곳은 신분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라타에는 왕이 없다. 그곳의 사람들은 세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 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안에서 꽃과 짐승과 사람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모든 것이 대지의 창조물로 공평하게 대우받을 뿐이다. 그 고귀한 신비로움을 감히 파헤쳐 보지도, 거역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누려 오고 앞으로도 누리고 싶은 세상은 카르낙이 꿈꾸는 세상에 속하지만 그녀의 뿌리는 철저히 엘버그 왕국 신분제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결국 그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가의 유일한 핏줄. 이곳에서 그녀의 생김새와 머리색은 철저히 알기어스 왕가의 상징이기에 그것으로 이곳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어야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이 속한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되어야 했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것으로 제 역할은 끝일까.

“어떠세요?”

에이가가 그녀에게 거울을 내밀었다. 릴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요.”

“연보라색 리본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어서 머리가 더 길면 좋겠네요. 예쁘게 틀어 올려 보석으로 장식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에이가는 벌써 황홀하다는 듯 말했다. 릴리는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실 긴 머리는 싫었다. 머리를 감거나 말리는 것도 힘들 뿐 아니라 활동을 하는데도 거추장스러웠다. 거기에 머리를 틀어 올려 그 위에 보석까지 얹으면 얼마나 무거울까.

생각만 해도 목과 어깨가 결려 왔다. 차라리 보석 대신 화관을 만들어 얹으면 어떨까. 그렇다면 무겁지도 않고 보석처럼 아름다울 텐데 말이다.

뿌우우우, 하는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났다. 에이가와 릴리는 동시에 작게 나 있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세요.”

에이가가 뭐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이 긴 나팔 소리는 분명 왕의 귀환을 알리는 소리였다. 근 일여 년 만이다. 전쟁터에서 사냥하듯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사실은 굳이 파발이 가져온 서신이 아니더라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의 행적은 수도에도 그리고 성내에도 파다하게 퍼지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승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몸을 사리며 침묵했다. 대외적으로 카르낙의 악명은 더더욱 높아지기만 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어요.”

치맛자락을 붙드는 에이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드디어 오셨어, 드디어. 그러고는 감격에 겨워 파니릴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와 다르게 파니릴리는 그다지 카르낙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처럼 감격에 겨워 기뻐할 이유가 없었고, 힘을 실어 마주 잡은 두 손의 온기에 답해 줄 여력도 없었다. 그저 그의 갑작스러운 귀환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제가 매일 서신을 보냈답니다.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답게 변했는지 머릿결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드디어 폐하께서 아가씨를 보실 모양이에요.”

기뻐하는 에이가에게 웃어 주어야 하는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으나 그것이 웃는 얼굴로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에이가는 공들여 꾸민 인형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사실 자신의 처지가 에이가가 공들여 꾸민 인형과 다름없기도 했다. 에이가는 서둘러 릴리의 머리를 한 번 더 매만지고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곧 모시러 올게요.”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가는 들뜬 걸음으로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릴리는 홀로 방 안에 앉아 에이가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가 곧 다시 거울을 들어 보았다. 그라타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걸 매번 깨닫기도 싫었고 굳이 거울을 보며 꾸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비가 고여 있는 물웅덩이나 맑은 샘물에 제 얼굴을 비춰 보고는 했다. 물방개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굴곡지는 제 얼굴이 우습고도 신기하여서.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던가.

어딜 가나 그저 하얗기만 해서 눈에 띄던 얄궂은 제 외형이 이곳에서는 귀하게 취급받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껍데기일 뿐. 이곳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겉모습뿐이라는 것이 서글펐다. 릴리는 거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에이가가 진열해 놓고 간 팔찌와 반지,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왕은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이라 하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의 아내가 될 것이라면 그와 부러 척을 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릴리는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에이가는 이 보석이 정말로 귀한 것이라 하였다. 릴리는 카르낙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빛은 이것과 꼭 닮아 있다.

그녀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시 한번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새하얀 피부 위에서 선명한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이제 그를 보아야 한다.

왕이자 저의 남편이 될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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