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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화 (15/231)

15화

“나는 코르넬리오의 안주인이야! 내 아버지는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브리다스 가문의….”

“남편이 뒈졌으니 넌 이제 뭣도 아니지. 부디 내 소중한 병사들을 즐겁게 해 주길 바라오, 코르넬리오 부인.”

“마님! 마님!”

끌려가며 몸부림치는 제 주인을 보고 시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울분을 토했다. 카르낙은 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시녀의 목소리가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빌었다.

“폐하, 부디, 부디 마님을 용서해 주십시오.”

“너도 막사로 던져지고 싶으냐?”

“마님이 잘못되시면 저도 죽습니다!”

종이란 무릇 제 주인의 손에 목숨이 달려 있는 법. 막사 안에 들어가 같이 조리돌림을 당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요, 이렇게 주저앉아 있다가 욕을 본 주인을 보살피게 되어도 죽은 목숨이요, 주인을 두고 저 혼자 돌아가도 죽은 목숨이었다.

비록 저만큼은 아니어도 평생 인생을 저당 잡혀 비천하게 살다 가야 할 갈색 머리의 계집. 단지 타고나길 흰빛을 띠지 않았다고 하여 평생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을 계집.

“돌아가 꼬마에게 내 말을 똑똑히 전해라.”

“…….”

“네놈의 어미는 이미 죽었으니 목숨을 구하고 싶거든 동이 트기 전에 성문을 열어 놓으라고.”

히끅거리며 시녀는 울음을 삼키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 않으면 모웨나에는 풀 한 포기조차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그녀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카르낙이 시선을 떼자 주섬주섬 일어나 막사의 반대편으로 달음박질쳤다. 밖에서 사내들의 왁자지껄한 고함과 미망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단둘이 남게 되자 핀은 도저히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코르넬리오 부인은 엘버그에서 손에 꼽히는 미녀야. 게다가 혼인을 치르자마자 코르넬리오에게 장자를 낳아 줬다고. 그런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와 너에게 충성하겠다는데 어떻게 그걸 마다할 수 있어?”

“평생 몸을 섞어 온 제 남편을 하루도 안 돼서 배반한 여자야.”

“자식새끼를 위해 이런다는 말 못 들었어?”

카르낙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어미라. 엘버그인들에게 그런 게 있긴 할까. 자식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랑 같은 걸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단지 비천한 천민이라고 아무 이유 없이 투로의 아이들을 학대하고 사냥하지 않았을 것이다.

벌레라 하여 함부로 짓이겨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 못 하는 짐승도 아프고 힘들면 돌봐 주는 법이다. 뛰는 심장을 가진 이라면, 피가 흐르고 감정이란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저처럼 말을 하고 저처럼 뛰고, 저처럼 행동하는 같은 생명을 그토록 멸시하며 능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망인의 그 말은 거짓이다. 그들이 모정 따위를, 그런 고귀한 감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래.코르넬리오가 비록 남편에 대한 충성심은 없다고 쳐. 하지만그녀가 엘버그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어. 브리다스 가문은 엘버그의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게다가 가주인 브리다스는 제 딸을 끔찍이 아껴. 네가 조금만 자비를 보였으면 테르조의 기세가 조금은 꺾였을 거야. 그러다 저 여자가 네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브리다스는 제 핏줄들을 반목할 수 없어 뒤로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난 이미 에이가가 점찍어 둔 약혼녀가 있어.”

“그래! 빌어먹을 그 약혼녀!”

핀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검지를 곧추세우며 그는 비난의 날을 더 날카롭게 갈았다.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안부조차 묻지 않는 그 약혼녀를 또 들먹여!네가 서쪽 탑에 죄인처럼 가두어 놓으라고 했던 그 여자!그 눈썹도 머리도 없던 그 대머리 여자 말이야! 핑계를 대려면 좀 설득력 있는 핑계를 대시지요! 발투만 폐하!”

그러고 보니 에이가에게서 지속적으로 편지가 왔었는데…. 뭐라고 적혀 있더라. 언제나 편지의 말미에 그 대머리 계집에 대한 이야기를 무어라 무어라 적어 놓곤 했었는데 매번 읽지 않고 덮었다. 카르낙은 에이가에게서 온 가장 최근의 편지를 찾으려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를 뒤졌다.

“에이가의 닦달에 못 이겨 그 여자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는 거 다 알아.애초에 그 여자랑 결혼할 맘도 없잖아. 이제 와 충성스러운 척하지 말라고. 차라리 네놈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 그럼 더 편해질 테니까!"

카르낙은 마침내 에이가가 가장 최근에 보낸 편지를 발견하고 핀이 무어라 떠들어 대든 읽지 않고 넘겼던 파니릴리에 대한 구절을 처음으로 읽어 보았다.

파니릴리 아가씨의 머리는 이제 많이 자라 모양을 내기에 적합할 정도입니다. 청아한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백금발이 정말이지 탐스럽답니다. 그러니 비겁하게 도망칠 마음이 아니라면 조속히 성으로 돌아와 폐하의 약혼녀와 재회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신께 청하옵건대 페하께서 이 구절을 읽으실 수 있다면요. - 에이가로부터.

“그 여자의 머리가 자랐다는군.”

“뭐?”

한창 혼자 열을 올리며 훈계를 하던 핀이 여전히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되물었다.

“그 대머리 말이야. 이제 머리가 자랐대.”

“…자랐다고? 무슨 색이래?”

그동안 내내 궁금했다. 그 대머리는 정말로 알기어스의 딸일까. 핀은 에이가가 판박이라고 하던 로레인이란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미친 왕이나 그 외모만큼은 누구나 감탄사를 흘릴 정도로 출중했다는 알기어스 왕도 본 일이 없다. 그는 에나에게 고용되어 카르낙에게 오기 전까지 이 대륙 저 대륙을 떠돌던 용병단의 단장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카르낙이 이 왕국에서 얼마나 비천한 대우를 받았는지 익히 듣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사실 제대로 실감해 본 적은 없다. 가끔 도저히 카르낙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러한 까닭이리라.

카르낙은 알기어스 왕을 증오했다. 사실 엘버그 왕국의 모든 것을 증오했지만 알기어스 왕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자였다. 그를 죽이는 것이, 그래서 엘버그의 왕국을 고통과 비참함에 빠트리는 것이 카르낙의 목표였다.

그리고 핀은 그러한 카르낙의 광기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궁금했다. 정말로 그 여자가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라면 카르낙이 과연 그녀와 결혼을 할 것인가.

코르넬리오 부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스스로 찾아와 몸을 날려도 경멸하며 치를 떠는데, 하물며 제가 늘 증오해 마지않던 사람의 딸에게 과연 그가 형식적으로라도 그 곁을 내어 줄까.

“백금발이라는군.”

“그렇다면 역시….”

역시 알기어스 왕의 핏줄이 맞다. 에이가가 말한 대로다. 이제는 왕의 사생아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고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동이 트면 모웨나로 향할 거야. 어린 코르넬리오 놈이 얌전히 성문을 열어 놓고 있길 바라자고.”

핀이 물었다.

“그러고 나면?”

카르낙은 여전히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리고 나면 어린 영주 놈에게 선택권을 줘야지. 여기서 뒈질 건지, 아니면 위대한 엘버그 왕국의 충성스러운 노예가 될 것인지.”

아이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카르낙은 엘버그의 모든 인간을 증오했으나 아이에게만은 비교적 관대했다. 로로로부터 투로들에게 아이가 무척 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척박한 서쪽의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절벽의 아래로 버려진 검은 머리의 아이들은 대부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투로들끼리 살을 비벼 낳은 아이들보다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버려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투로의 사내들은 대부분 노예로 끌려갔지만 투로의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포주들에 의해 포획되어 창녀로 살아갔다.

그렇게 몸을 팔다 벤 아이들은 다시 사막에 버려졌다. 개중 계집들은초경을 치를 즈음 다시 왕국으로 끌려갔다.투로의 씨를 뿌릴 일도, 그들의 씨를 배에 잉태할 일도 없었다.

카르낙은 저에게 무릎 꿇지 않는 엘버그인들의 대부분을 그 사막에 버렸다. 그들이 투로들을 가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가두었다.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투로의 여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도 엘버그의 여자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해 주었다.

카르낙은 그것을 ‘공평하다’고 말했고, 핀은 그것을 반박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이 된 아이, 그것도 막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은 반역자의 자식에게 과연 관용을 베풀까.

“약점을 보일 순 없어.”

카르낙이 말했다. 핀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모든 이들이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그가 등을 돌리기만을, 방심하기만을 바라며 그때가 되면 언제가 되든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카르낙은 엘버그의 모든 이들이 저를 두려워하기를 바랐다.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면 살려 두지 않으려 했다. 그는 강인한 왕을 넘어서 엘버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폭군이 되려 했다. 그렇게 아주 오래오래 엘버그인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해 주려는 것이다. 그것이 스물한 해, 투로로서 살아온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삶의 이유요, 욕망이며 그가 소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핀은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분노의 바닥을 핀은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엔? 그 이후엔 어쩔 거야? 캘던(엘버그의 수도)으로 돌아갈 텐가?”

카르낙이 내내 훑고 있던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야지. 과연 약혼녀가 제법 사람의 몰골을 하고는 있는지 구경이나 해 보자고.”

천막의 틈새로 여전히 코르넬리오 부인의 비명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밤의 어두운 빛깔은 고통을 수반한 채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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