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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화 (14/231)

14화

“코르넬리오 부인.”

카르낙이 저의 이름을 부르자 미망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모습은 그릴 수 있어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는 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왕의 목소리는 꿈속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음란하고 달콤했다.

“데리고 온 샤프롱은 저 계집이 전부인가?”

의심스럽다는 카르낙의 물음에 코르넬리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낙은 핀과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꿍꿍이로 이곳에 달랑 시녀 하나를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호기심은 일었다. 미망인은 핀의 존재가 불편한지 연신 그를 곁눈질하며 마른 입술을 씹어 댔다. 핀이 묘한 뜻이 담긴 미소를 띤 채 카르낙에게 물었다.

“비켜 줄까?”

“아니.”

카르낙이 단호히 그의 배려를 거절했다. 핀의 미묘한 표정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카르낙이 화제를 전환시키며 미망인과 딸려 온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종은 무엇이 두려운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제 주인의 망토 뒤로 슬쩍 몸을 숨겼다.

“무엇을 도와드릴까, 코르넬리오 부인?”

미천한 벌레가 뱉었다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세련된 어투였다. 그 안에는 심지어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눈앞의 사내는 이제 더 이상 벌레가 아니었다. 완연한 왕이었다. 미망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꼭 쥐고는 한번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저는 모웨나의 여주인으로서 모웨나를 대표해 당신과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그 말에 핀과 카르낙은 웃었다.

“협상? 우리가 서로 주고받아야 할 것이 있던가? 어차피 동이 트면 모웨나의 성문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열릴 테고, 당신과 장자의 목숨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야.”

“아들은 겨우 여덟 살이에요.”

미망인이 겁을 먹은 와중에도 언성을 높였다.

“몇 살이든 간에. 어쨌든 코르넬리오의 아들이지. 코르넬리오가 뒈진 이상 이제 꼬마는 모웨나의 영주야. 내가 토벌해야 마땅한 적이지.”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교육시킨다면 자신이 모웨나의 영주란 사실도 잊게 될 거예요.”

“…….”

핀이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 말은 뭐지? 아들을 교육하겠다고? 그렇다면 뭐야. 남편의 유지를 배반하겠다는 뜻인가?”

미망인은 핀의 말에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이제 남편은 죽었고 저와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택해야 해요.”

“그렇다면 모웨나의 영지민들은?”

카르낙이 물었다. 그러자 미망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영지민들에겐 저항하지 말기를 요구할 겁니다.”

카르낙은 미망인의 푸른색 눈동자를 가늠했다. 청아한 빛을 담은 것은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납득을 할까?”

“…….”

“자신의 아들을, 남편을, 친우를, 연인을 도륙한 적들에게 얌전히 항복하라는 명령을 수긍하겠냐고.”

“똑똑한 이들이라면 지혜롭게 대처할 거예요.”

그렇게 단서를 붙이는 것은 사실 그들이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코르넬리오의 미망인은 제 남편처럼 자신의 영지에 애착도, 자긍심도 없어 보였다. 죽은 그치가 좀 불쌍해질 지경이랄까.

“폐하께서 저희 모자를 받아 주신다면 단 한 톨의 어려움도 없이 모웨나의 땅 전부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핀은 미망인을 바라보는 카르낙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길게 내려온 짙은 머리색에 가려져 표정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팔짱을 낀 그의 단단하고 굵은 팔뚝만 촛불에 아롱져 확연히 보일 뿐이다. 미망인의 눈길이 그곳에 닿아 있다는 것도.

“너희 모자를 받으라….”

카르낙은 그녀의 말을 되읊었다. 그러더니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그건 폐하께서 정하시기에 달렸죠.”

뭐? 카르낙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핀이 조용히 그의 곁에 다가가 속삭였다.

“궁에 데리고 가 달란 뜻입니다, 폐하.”

뭐?

“왜?”

카르낙이 여전히 미간을 펴지 못한 채 물었다. 왜 저 여자와 그 아들을 궁에 데려가야 하지?

“제발 분위기 좀 읽으시죠. 코르넬리오의 미망인은 지금 댁의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둔한 왕이여.”

“…….”

카르낙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핀은 분명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르낙은 다시 미망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눈꺼풀을 내린 채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무엇이 그렇게 속이 타는지 입술을 잘근거리는 것을 관두지 못했다.

“내가 정하기에 달렸다고?”

“예, 폐하.”

미망인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핀이 자세를 고치며 눈썹을 한번 들어 보였다. ‘그것 봐.’라는 뜻을 담아서.

“내가 무엇을 정하든 따르겠단 말인가?”

“예, 폐하.”

“당신이 지금 걸치고 있는 모든 옷을 다 벗으라고 하면?”

꼭 잡은 여자의 두 손이 떨렸다. 오한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전율을 느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붉게 물드는 볼이 그녀의 열기와 욕망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사람들을….”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오자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너는 죽은 남편에 대한 아주 작은 신의 따위도 없어?”

경멸에 찬 카르낙의 어조에 미망인은 천천히 고개를들었다.카르낙의 얼굴에는 사내의 열기가 아닌 아슬아슬한 경멸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누구에게도 나쁜 방법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이곳에 네 죽은 남편의 목이 효수되어 있는 것을 분명 보았을 텐데 그것을 보고도 너는 네 남편을 죽인 자와 몸을 섞을 생각이 들어?”

“저는 한 아이의 어미로서….”

“난 임자가 있는 계집은 안지 않아.”

아니, 너는 어느 여자도 안지 않지. 핀은 목구멍에서 튀어 나가려는 말을 참으려 어금니를 꾹 물었다.

“만일 네가 네 남편의 머리를 돌려 달라고 했다면 어쩌면 그 뜻을 존중해 줬을지도 몰라. 참으로 이상하지 않아?”

카르낙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 귀족이란 자들. 그 잘난 껍데기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지? 너희 엘버그의 국민들이란 마땅히 벌레들도 가지고 있을 최소한의 도덕도, 도리도 모르는 거야? 남편의 핏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적장에게 다리를 벌리겠다? 진심이야?”

“몇 번을 더 말씀드려야 하는지! 저 역시….”

“그동안 네가 성에 머물며 부유하게 입고 마신 건 네 영토의 농노들의 고혈을 짜냈기 때문이 아닌가?그동안 뼈 빠지게 일해 먹여 살려 모셔 줬더니 이제 와 그들을 버리고 안락한 곳에 기생하시겠다?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년이다.”

“저는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한 겁니다! 내 영지의 주민들을 살리고 아들도 살릴 수 있는….”

“그들은 코르넬리오를 위해 자신의 피를 내놨어. 그들은 너로 인해 절망하고 비참해할 거다. 죽을 때까지도 고통스럽겠지. 결국 너는 네 영지민들의 불행과 너의 안위를 맞바꾼 것뿐이야.”

미망인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그녀는 카르낙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먹고 자고 입는 것을 해결해 본 일이 없다.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농노들에게혹은 영지민들에게 기생하며 산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기생이라니.그 얼마나 모욕적인 단어인가.

“그들은 내게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어요!그들은 우리 가문의 자비로 우리의 땅에서 일을 하며 먹고 삽니다!그러니 마땅히 그들은 나를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들의 주인이니그들이 내게 주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대신해서 저는….”

‘저는 그들을보호합니다.’분명 뒷말은 그렇게 끝내야 할 터였다.그러나 내뱉기 전,미망인은 그 끝맺음이 지금 이 순간과 얼마나 모순이 되는지 깨달았다. 코르넬리오 부인은 비로소자신이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밑질 것이 없는 거래라 생각하였다. 엘버그 왕국에서 그녀의 외모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출중했다.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코르넬리오에게 시집을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아름다움 덕택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는 늘 찬미의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던 기사들은 그녀의 손수건 하나를 받아 내려 열을 올렸다.

그녀는 코르넬리오의 자랑거리였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녀처럼 되고 싶어 그녀를 따라 했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 옷을 벗고 그의 침대에 뛰어들겠다고 하면 거절할 남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 짐승 같고 비천한 벌레에게는 그동안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천상의 열매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저 제 비단 같은 피부와 한껏 강조한 봉긋한 가슴을 보면 그 즉시 거기를 세우고 달려들 것이라, 짐짓 점잔을 빼더라도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 분명 그렇게 믿었다.

“코르넬리오가 퍽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게 말하며 카르낙은 제 턱을 매만졌다.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토록 아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 하니 그 뜻은 존중해 주지.”

카르낙은 미망인과 시종을 지키고 서 있는 사병 둘에게 명령했다.

“저 여자를 병사들의 막사에 넣어 줘라.”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미망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녀는 그녀를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감히!”

코르넬리오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카르낙은 냉정한 얼굴로 일갈했다.

“왜? 왕을 위해서는 기꺼이 벌려도 천한 병사들에겐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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