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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화 (13/231)

13화

때 이른 아침부터 거센 비가 쏟아졌다. 병사들의 사체와 쓰러진 말들이 진흙 구덩이를 뒹굴었다.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에는 사내들의 함성과 칼날끼리 부딪치는 쇳덩이의 파열음이 메아리쳤다.

“투로!”

적의 목에 검을 쑤셔 넣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카르낙을 불렀다. 그는 목이 꿰뚫린 시체에서 검을 빼어 내며 동시에 몸을 돌렸다.

깡! 하고 쇠붙이와 쇠붙이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코르넬리오.”

카르낙은 제 몸을 향해 내리치는 육중한 검을 막으며 사내의 이름을 조소했다. 커다란 덩치에 붉은 기가 섞인 블론드 계열 곱슬머리가 물에 젖어 그의 이마를 덮었다. 새하얀 얼굴 가득한 주근깨는 흙탕물에 뒤범벅이 된 채 그는 커다란 이를 드러내며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감히 내 이름을 입에 담은 네 목구멍을 쑤셔 주마.”

코르넬리오는 검에 자신의 체중을 더 실었다. 그 검을 버티며 조소하는 카르낙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왕의 단단한 팔뚝이 근육으로 더욱 부풀었다. 미끄덩거리는 진흙 탓에 발이 뒤로 밀리면서도 카르낙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내려친 코르넬리오의 손이 더 먼저 떨려 왔다.

“이이익….”

코르넬리오는 악물린 신음 소리를 냈다.

카르낙 발투만. 타고나기를 전사로 타고난 벌레. 수려한 외모와 단단한 육체를 가진 자.

코르넬리오는 저의 아내가 그를 끔찍이 혐오하면서도 그를 욕망한다는 것을 안다. 엘버그 왕국의 여자라면 누구나 그랬다. 투로들을 증오하는 심리의 반대편에는 투로들을 향한 천박한 욕망이 있었다.

카르낙이 왕좌를 차지한 이후 여인들의 더러운 욕망은 더 강해졌다. 엘버그 왕국의 모든 여자가 그를 원했다. 이 푸른 눈의 사내의 몸을 원했다. 그가 저를 더럽혀 주기를 원했다. 그를 보면 덜덜 떨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를 욕하며 마음껏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다가 밤이 되면 제 스스로 몸을 만지며 그의 이름을 불러 댔다.

“카르낙, 이 더럽고 짐승 같은 사람. 아아. 카르낙.”

그를 부르며 신음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코르넬리오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는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칼을 다시 치켜들었다.

“카르낙 발투만! 오늘 널 죽이고 잃어버린….”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묵직한 무언가가 옆구리를 뚫었다. 기다란 창이 날아와 그의 허리를 꿰어 버린 것이다. 핀의 것이었다.

코르넬리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렸다. 그러나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죽음은 너무나 황망하고 급작스럽게 그를 덮치고 말았다. 카르낙이 쓰러져 가는 코르넬리오에게 말했다.

“전쟁이 우리 둘만의 결투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지, 멍청한 코르넬리오.”

그렇게 머저리는 아니다. 전장이란 걸 몰랐던 것이 아니다. 한순간 증오와 그를 죽이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단 한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단 한 순간. 카르낙이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네 아름다운 아내의 몸은 오늘 밤 실컷 즐겨 주마.”

그러고는 한 발짝 물러나 검을 휘둘렀다. 코르넬리오의 머리는 공중에 조금 뜨더니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코, 코르넬리오 님이….”

누군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코르넬리오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이 더듬대며 소리쳤다.

“코, 코르넬리오 님이 죽었다! 코르넬리오 님이 죽었어!”

영주의 목이 떨어졌다. 우두머리를 잃은 병사들은 동요되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카르낙이 잘린 코르넬리오의 머리를 높게 들었다. 몇몇은 벌써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었다. 카르낙은 눈가에 튄 핏물을 닦아 낸 후 고압적으로 말했다.

“꿇어.”

마치 파도가 쓸려 가듯 반란군들은 카르낙을 중심으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코르넬리오의 반란은 그렇게 끝났다. 협곡에는 끝도 없는 굴욕과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카르낙이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시종들이 그의 갑옷부터 벗겼다. 온몸이 피와 빗물에 젖고 진흙이 튀어 엉망이었지만 따듯한 목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일 아침 동이 터 코르넬리오의 영지인 모웨나로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저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시종이 떠 놓은 물에 대충 얼굴과 손을 담그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물은 금방 혼탁해졌다. 마른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아 내는데 핀이 막사로 들어왔다.

“폐하.”

그가 부르는 폐하라는 칭호에는 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마도 핀은 아직 카르낙이 엘버그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핀의 그런 태도는 늘 카르낙으로 하여금 자신이 왕이란 독이 든 성배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덕에 카르낙은 숨을 쉬고 미소를 짓고 잠시 상념에서 벗어나곤 했다. 생사고락을 함께 넘은 전우이기에 가능한 감정의 교류였다.

“명하신 대로 코르넬리오의 목은 효수해 뒀습니다.”

카르낙은 다 쓴 수건을 시종에게 건네며 턱짓을 했다. 시종은 새 셔츠와 바지를 침대 발판에 가지런히 놓아둔 뒤 다 쓴 물그릇과 수건을 들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내가 안 도와줬으면 넌 뒈졌을걸.”

시종이 나가자마자 핀은 밝은 녹안을 빛내며 이죽댔다. 카르낙은 뻣뻣하게 세탁된 깨끗한 셔츠를 뒤집어쓰며 웃었다. 그러고는 팔을 한쪽씩 끼며 대꾸했다.

“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난 더 빠르게 코르넬리오의 목을 베었겠지.”

“아닐걸. 너는 코르넬리오랑 같이 진흙 바닥을 뒹굴고 있었겠지. 데굴데굴 구르면서 말이야.”

카르낙은 별 대꾸 없이 셔츠를 허리춤까지 끌어 내리고 침대에 앉아 부츠를 동여맨 끈을 풀었다. 핀은 그것이 영 마뜩잖았다. 도발하기를 관두고 그는 투덜거렸다.

“그런 건 시종을 시키면 되잖아.”

“…….”

이번에도 별 대꾸는 없다. 그저 묵묵히 끈을 풀어낼 뿐이다. 핀은 약간의 틈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왕이야, 카르낙. 네가 엘버그의 모든 인간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네 손발이 되어 주는 이들에겐 곁을 내어 줘야 해. 마땅히 왕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은 누려. 그건 네 의무이기도 하잖아.”

“난 투로잖아.”

카르낙은 진흙이 눌어붙은 부츠를 벗어 던지며 덧붙였다.

“엘버그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

“그리고 지금은 왕이지.”

“그래서 더 증오하겠지. 다들 내가 어서 죽어 버리길 바랄걸. 그리고 날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될 테고. 만일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핀.”

카르낙은 길게 깔린 짐승의 가죽 위를 뚜벅뚜벅 가로질러 테이블로 갔다. 그러고는 섬세한 공예가 돋보이는 은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누군가 엘버그의 영웅이 되는 꼴은 못 봐. 절대로.”

그는 건배를 하듯 잔을 위로 들어 보이고는 단숨에 그것을 마셔 버렸다. 카르낙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동이 트면 코르넬리오의 목을 들고 그의 성으로 향할 거야. 성주가 뒈졌으니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알아서 성문을 열어 주겠지.”

“저항할 수도 있어. 코르넬리오에겐 어린 아들이 있어. 그의 아내는 아들을 지키려 할 거야.”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 성문을 열면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노라고.”

핀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이야?”

카르낙은 잔에 다시 포도주를 채워 핀에게 내밀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

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잔을 받으며 조소했다.

“코르넬리오에게도 본받을 점은 있어. 적어도 그는 죽기 전에 자기 후계자는 남겨 뒀잖아.”

카르낙은 핀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야기를 회피하고 싶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성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됐지? 1년? 1년이 조금 안 됐던가?”

“그렇게 많이 지났나?”

카르낙이 테이블 위에 군사용 지도와 편지 따위를 뒤적거리며 대꾸했다.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이 싫다면 여자라도 안아. 몇몇 병사들은 너와 내 사이를 의심한단 말이야.”

하하하하! 카르낙이 웃음을 터트렸다. 핀의 미간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넌 즐거울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난 여자가 좋다고! 내 장래 꿈은 엘버그의 카사노바가 되는 거란 말이야! 이 소문이 수도까지 퍼져 여자들이 날 기피하기 시작한다면 맹세코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어. 널 배신하고 엘버그의 영웅이 될 거야.”

“그것참 미안하게 됐네. 너의 꿈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지게 해서. 그렇지만 소문보다 네 외형에 더 신경 써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핀이 발끈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왜!”

“온몸이 흉터투성이에 불결하기 그지없잖아. 볼만한 거라곤 그 붉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뿐인데 문제는 네 거시기까지 주근깨투성이라는 거지.”

“뭐라고!? 네가 봤어?! 내 거시기에 주근깨가 나 있는 걸 네가 봤느냐고!”

“안 봐도 뻔하지.”

“뭐가 어째?!”

핀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 손을 올렸다.

“카르낙 발투만, 네놈은 내 좆의 명예를 더럽혔다. 그러므로 결투를 신청한다! 어서 검….”

“크흠!”

핀의 뒤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카르낙은 웃음을 참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고, 핀 혼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밖에 코르넬리오의 미망인이 와 있습니다.”

“누구?”

핀이 잘못 들은 거 같아 다시 물었다.

“코르넬리오의 미망인이요.”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코르넬리오의 목이 떨어졌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죽음을 알리기 위해 부러 병사 하나를 살려 남편의 검과 함께 보냈다.

패잔병의 목을 치든, 아니면 더러운 꼴을 보기 전에 그것으로 자결을 하든 택하라는 뜻이었지, 결코 협상을 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핀이 카르낙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건지를 묻는 것이다. 그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대고 앉아 말했다.

“들여보내. 아들의 머리라도 가지고 왔길 빌자고.”

아니면 본인의 머리가 남편과 함께 효수될 테니.

곧 천막이 열리고 풍성한 여우의 털로 만든 코트를 걸친 단아한 미인이 제 시녀 하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렁이는 촛불에 여인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눈동자 또한 매한가지였다.

초상화가 아닌 왕의 실물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코르넬리오의 미망인은 몇 달 전 제 남편의 앞으로 보낸 거대한 초상화에서 카르낙을 처음 보았다.

헐벗은 상체에 견갑을 두르고 보란 듯이 검을 빼 든 채로 왕좌에 앉은 그의 초상화에 남편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서 아직 유약이 다 마르지도 않은 그 그림을 벽난로에 처박았다.

그리고 코르넬리오 부인은 그날 이후 매일 밤 이 비천한 왕을 꿈꾸었다. 매일 밤 견갑 아래 초콜릿처럼 달콤한 그의 몸을 탐했다. 그가 야만인처럼 옷을 찢어발기고 제 위에 올라타면 그녀는 비명처럼 신음을 질렀다.

땀과 체액에 젖어 헐떡이며 그녀는 배덕한 쾌락에 제 몸을 맡겼다. 매일 밤 만나 본 적도 없는 남자의 몸을 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십여 년을 넘게 함께한 남편의 이름보다 요 몇 달 그의 이름을 더 많이 불렀을 것이다.

“카… 카르낙.”

미망인은 익숙하게 입 안에 맴돌던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며 식은땀이 흐르는 주먹을 꼭 쥐었다. 눈앞에 그자가 있었다. 피와 흙과 땀 내음이 진동하는 막사 안에 그 짐승 같은 자가 있다. 제 남편의 목을 효수하고 그의 검을 보냄으로써 저를 능멸한 사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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