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화 (12/231)

12화

“그는… 자신이 신이라 여겼어요. 수도에 세워진 아마네스 님을 위한 제단을 모두 부수고 그 위에 자신의 동상과 성전을 지었어요. 그것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노역에 시달렸는지… 그의 광기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끔찍했다. 사방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곡소리가 들렸다. 어떤 이들은 신을 위한 제단을 파괴하고 싶지 않아 노역을 거부하다 명을 달리했다. 어떤 이들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다 죽었다. 어떤 이들은 동상을 세우기 위해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상인에서 평민으로, 평민에서 노예로, 노예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들이 너무나 빈번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투로들은 얼마나 학대받았겠는가. 말 그대로 그들은 사람들의 손에 벌레처럼 짓이겨졌다. 광증에 걸려 미쳐 날뛰는 것은 왕인데도 왕을 탓하는 이보다 벌레들이 왕을 타락시켰다며 애꿎은 이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 상인과 평민도 비천하긴 매한가지였건만 그들은 결코 투로와 같은 노예가 아니었다. 투로들은 왕에게도, 귀족에게도, 평민에게도 그리고 노예에게도 천대를 받았다. 왕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똑같은 벌레로 비추어졌음에도.

“하게너 백작은 거기에 일조했어요. 왕의 뜻에 따라 제단과 신전을 건설하는 데 투로들을 공급함으로써요. 그의 토지가 서쪽 사막과 가장 가까웠고 가장 컸거든요. 마님은 그것을 끔찍해하셨어요. 사실 모든 것을 끔찍해하셨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진력이 나신 것 같았죠. 하나뿐인 아들을 그쯤에 잃으셨어요. 열병이었죠. 하게너 백작은 그것이 투로들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사막으로 가, 말 그대로 살육을 벌이셨죠. 닥치는 대로 죽였어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난하고 비루한 벌레들을요. 미친 짓이었죠. 정말이지 그땐 모두가 미쳐 있었답니다.”

에이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몸서리를 쳤다. 릴리는 물었다.

“그래서 카르낙이 반란을 일으켰나요? 제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목을 베었나요?”

“네. 살아남으려면 하게너 백작을 죽여야 했을 거예요. 그 이후엔 아마 두려웠겠죠. 퇴로가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저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죽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에이가는 한밤중 성안에 들이닥친 새까만 벌레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어두운 밤, 횃불에 반사된 그 흥분과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을. 그 눈을 보면 누구나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 그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살기 위해, 단 하루라도 더 제 소중한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마님은 영지의 주민들을 모두 마을 밖으로 피신시킨 후 순순히 그들에게 성을 내주셨어요. 영주도, 그 장자도 죽어 주인이 없어진 땅을 알기어스 왕이나 다른 귀족에게 넘길 바에야 차라리 투로들에게 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리고 에이가는 웃었다. 영지를 천민에게 빼앗긴 이야기를 하며 미소가 떠올랐다. 기묘했다. 릴리는 그것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그것은 구원이었을까.

“카르낙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어요. 로레인 마님을 취해 자신의 포로로 만들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로레인은… 그녀는… 다시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로레인은 말했다.

“에이가, 언젠가 내가 말했지? 나는 새가 되고 싶어. 어디든 날아가고 싶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집에서 잠드느냐의 차이일 뿐 로레인의 처지도 투로들과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남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하는 삶. 자신의 의지도, 욕망도, 신념도 가질 수 없는 삶.

로레인은 그런 자신의 삶을 증오했다. 카르낙을 위해 에나에게 동맹을 요구한 것은 어쩌면 자신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천민이 견고한 삶의 장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길 바랐을 것이다.

자신은 넘을 수 없는 것을, 그녀를 대신하여 넘어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로레인은 그에게 죽음을 구걸했다. 가문의 핏줄과 여자라는 신분에 묶인 자신이 그 사슬에서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아마 마님은 카르낙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길 열망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럼에도 확신이 없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카르낙에게 당신을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달라 하셨겠지요.”

반란에 실패한다면,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희망을 품을 수 없다면 로레인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삶을 지속할 만한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떠났다. 죽기에는 용감했으나 살기에는 겁이 많은 여자였다.

“지금 폐하는 에나를 등에 업고 계시지만 그 동맹은 매우 불안해요. 에나는 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카르낙이 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을 도왔지만, 그렇다고 카르낙이 명실상부한 엘버그의 왕이 되길 원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들에겐 뿌리 깊은 벌레들에 대한 혐오가 있어요. 그것을 쉽사리 떨쳐 내지 못할 거예요. 발투만 왕가에 대항하는 반란군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요. 카르낙 폐하는 호전적인 분이세요. 싸우길 좋아하고 성질머리가 매우 고약하죠.”

그 점은 겪어 봐서 알고 있다. 행동거지며 단어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여느 남자들과는 아주 달랐다. 릴리는 생전 처음 상대를 짐승 같다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고귀함이나 진중함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폐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 점은 폐하를 더 기쁘게 할 거예요. 그는 엘버그 왕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오하거든요. 아마 이대로 둔다면 카르낙은 엘버그 왕국의 모든 사람을 죽일 거예요. 나라가 망하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겠죠. 어쩌면 그렇게 되길 원하실 수도 있고요.”

“…….”

천민으로 태어나 모두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사는 삶이었을 것이다. 단지 검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단지 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고 늘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삶. 어떤 짓을 당해도 기꺼이 견뎌야 하는 삶.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증오는 얼마나 깊을까. 얼마나 비틀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통하지 않을 거예요.”

릴리는 부정적으로 말했다.

“나로 인해 그자가 변할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나를 곁에 두면 더 증오하게 될지도 몰라요. 나는 그가 가장 증오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잖아요.”

알기어스 왕의 피, 최초인의 피, 저의 검은 머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은발에 하얀 피부. 모든 사람에게 추앙받는 외모에 단 한 번도 핍박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삶. 언제나 과분한 보살핌을 받으며 불행해 본 적이 없던 삶이었다.

그런 저를 곁에 두며 그 남자가 과연 유해질 수 있을까. 왕이 바뀌었어도 과연 이것이 어머니가 원하던 새로운 세상인지 모르겠다. 결국 변한 것은 미친 왕 알기어스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카르낙 발투만이라는 또 다른 폭군일 뿐인데 말이다.

“왕을 위해 하는 결혼이 아니에요. 엘버그 왕국을 위해, 공포와 불안에 떠는 엘버그의 사람들을 위한 결혼입니다.”

릴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에이가를 쳐다보았다. 에이가의 얼굴은 젖어 있을지언정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로레인이 원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오기, 카르낙의 폭주를 막고 어떻게든 엘버그 왕국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알기어스 왕가의 핏줄이 끊어진 지금 왕실에 충성했던 귀족들은 모두 저들끼리 세력을 뭉쳐 새로운 왕이 되려 하고 있어요. 카르낙은 그 반란을 잠재운다는 명분하에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고요. 아가씨는 엘버그의 마지막 남은 왕가의 핏줄이에요. 아가씨가 카르낙의 손을 잡아 준다면 적을 교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이 전쟁을 소강상태로 만들 수 있겠죠.”

“…….”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 평화가 찾아올 거예요. 아가씨가 이곳에 계셔 준다면요.”

한때 감추고 싶은 왕의 치부였다가 지금은 엘버그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되었단다. 엘버그의 평화를 위해 평생 단 한 번도 소원해 본 일이 없는 왕국의 왕비가 되어 달란다. 부르테가 말하길 늘 너는 특별하다고 했다. 그녀가 말한 특별함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어머니는 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자유롭게 날아가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왕국의 평화라는 명목하에 스스로 날개를 접고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원치 않는 결혼과 원치 않는 지위라는 족쇄를 차고 말이다.

“전… 이곳을 좋아하지 않아요.”

태어나고 자랐지만 잘 알지 못하는 땅. 올라와의 추억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땅.

“엘버그 왕국은 정말 아름다운 땅이에요.”

에이가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릴리의 두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부드러움이 꼭 다정하고 상냥한 올라를 떠올리게 한다.

“제가 아가씨에게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려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로레인이 그토록 열망하던 새로운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에이가는 알려 주고 싶었다. 또 로레인을 꼭 닮은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뵙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도.

“제게 부디 아가씨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

릴리는 제 입술을 꼭 물었다. 이젠 저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감히 어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꿀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저는 이미 이 성에 갇혔고 도망치지도 못한다. 이미 그라타에서 부르테에게 도망치지 않겠노라, 맞부딪쳐 보겠노라 이야기했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운명.

그래. 이것은 오롯이 저의 선택이었다. 어떤 것이 눈앞에 닥쳐도 이겨 내야 했다. 그렇게 하기로 수없이 결심했다. 그래야 저도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이제 와 이것에서 도망쳐 그라타로 갈 수는 없다. 부르테에게도 루나에게도 부끄럽고 죄스러운 짓이다.

“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가의 마를 때 없는 눈가는 다시 뜨겁게 젖어 들었다. 슬픔도, 절망도, 분노도 아닌 오로지 환희와 기쁨으로.

“아가씨, 정말 영광입니다.”

그 어떤 미련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땅에 이토록 저를 기쁘게 맞아 주는 이가 있다. 적어도 이곳에서 파니릴리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고향. 그래, 이곳은 고향이었다. 릴리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에이가의 두 손 위에 다시 저의 손 하나를 포갰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꼭 그라타의 짙푸른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

“제 이름은 파니릴리예요. 에이가,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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