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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화 (11/231)

11화

“천민이요?”

“유모가 그런 것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신분이나, 계급에 관한 것들이요.”

“아니요.”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올라는 그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쓰는 것 외에는 무엇도 강제로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올라는 릴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알려 주었고, 그녀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은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신분이며 계급 따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으니 궁금할 일도 없었고 그러니 올라가 그것을 알려 주었을 리가 없다.

“아가씨가 살던 곳은 어땠나요? 그곳에는 귀족과 평민이 나뉘어 있지 않았나요?”

“아니요.”

릴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라타에는 평민도, 귀족도, 왕도 없다. 부족 집단이었으므로 우두머리는 있었다. 그러니까 부족 간의 갈등이나 다툼이 일어나거나 혹은 중대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그라타에선 보통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가장 많은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모두가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니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특별하고도 신비한 존재라고는 다이옌들뿐이었다.

그라타인들은 다이옌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신과 소통하는 신비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다이옌 역시 누구나 될 수 있었다. 자비로운 대지의 어머니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이다.

그라타에서는 누구도 낙오되지 않았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달거리를 하지 않고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석녀가 되어도 그들은 귀한 대지의 피조물로 귀한 대접을 받았고 모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 세상에 쓰임이 없어 천하고 불필요한 존재는 없다는 믿음. 파니릴리는 내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이곳에는 많은 신분이 있어요. 가장 고귀한 신분은 왕이고, 그 아래는 귀족, 그 아래는 상인과 평민 그리고 그 아래는 천민이 있지요. 우리는 그들을 ‘투로(벌레)’라고 불러요. 새까만 피부에 새까만 머리를 가진 탓이지요.”

확실히. 릴리는 그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길고 헝클어진 긴 머리, 밀랍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타에선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아주 많아요. 종일 밖에서 밭을 갈고 일을 하며 햇볕에 그을린 사람들도 정말 많고요.”

“여기에선 아니에요, 아가씨.”

“…….”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답니다. 아가씨와 저처럼요.”

“…어째서요?”

“우린 모두 달의 아이니까요.”

올라라는 유모가 엘버그의 사람이 아니란 것은 에이가도 알았다. 이질적인 존재이기에 로레인은 더욱 그녀가 아이를 맡아 줄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올라는 엘버그 왕국이 믿는 신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릴리의 표정을 보니 올라도 몰랐거나 혹은 알아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로레인도 그래서 올라를 택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딸에게 저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날려 보냈겠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신을 대신하여 어디든 훨훨 날아가라고. 분명. 그녀라면 그랬을 것이다.

“오래전 이 세상은 불로 뒤덮여 있었대요. 모든 것이 새까맣게 불타고 갈라진 대지마다 불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죠. 그때 이 왕국은 아주 높이 솟은 돌덩어리였대요. 그 가장 꼭대기에 라미레스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죠. 그는 그 바위 위에 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너무 외로워 잠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대요.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대요. 아마네스 님이 불 속에 갇힌 채 홀로 살고 있는 그를 가엽게 여겨 자신을 꼭 닮은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반짝이는 백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아이를 만들어 주었대요. 그러고는 사내와 똑같은 라미레스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사내는 여신에게 감사해하며 여자아이를 정성껏 돌봐 자신의 아내로 삼았지요.”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치 올라나 부르테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호기심에 휩싸여 귀를 기울였다.

“라미레스가 첫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새하얀 백룡이었어요. 라미레스는 아이에게 라미레스의 첫 번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알기어스 라미레스란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아이는 태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더니 그 뒤로 사흘 동안 얼음과 바람을 뿌려 대지의 불을 모두 끄고 돌아와 라미레스의 품에서 잠들었대요. 그 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라미레스는 세상에 평화를 주고 잠든 알기어스를 기리기 위해 엘버그 알기어스로 지었대요. 그것이 바로 이 엘버그 왕국의 시초랍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왜 우리가 달의 아이이고, 왜 우리가 모두 새하얀 피부를 지녔고, 왜 왕의 핏줄은 은빛 머리를 가지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일 뿐이잖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이 신화는 육체의 뿌리이자 생각의 근원이 되었지요. 그 이후 대지에는 물과 풀, 꽃과 나무, 흙과 바다, 강이 생겼고, 온갖 열매와 곤충 그리고 짐승들이 생겨났고 그 바탕 위에 라미레스는 수많은 자식들을 낳아 왕국을 번성시켰어요.”

“그렇다면 모두가 한배에서 난 자식들인데 어째서 신분이 나뉘나요?”

“자손이 번성할수록 어떤 이유에서인지 더는 은발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것이 타락의 증거라고 믿고 있어요. 우리가 타락해 갈 때마다 우리는 달의 아이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고 그만큼 더 짙은 머리와 피부를 갖게 될 거라고요.”

그래서 검은 머리를 싫어하는구나. 볕에 그을린 어두운 피부도. 하지만 그는 아주 예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호수처럼 깊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보라색이었다.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그것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전설이 있어요. 라미레스의 첫 번째 아이도 차마 끄지 못한 불길이 있는데, 그것은 엘버그 왕국의 남쪽 끝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대요. 마치 장벽처럼요. 그리고 투로들은 그 불의 장벽을 건너 이 땅에 쳐들어왔대요. 엘버그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 대륙에 불과 질병을 퍼트리고 신이 주신 축복을 훔쳐 간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은 그들을 미워해요. 그들이 자신을 타락시킬까 봐 두려움에 떨며 가능한 한 그들이 감히 자신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뜨겁고 척박한 서쪽의 사막으로 쫓아내고 노예로 만들었어요. 그들을 벌할수록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믿었으니까요.”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누구나가 혐오하고 증오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왕이 되었단 말인가. 그것도 누가 보아도 신성하고 고결한 존재인 알기어스 왕을 제 손으로 죽이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벌레나 다름없던 노예가 어떻게 겹겹이 인(人)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단 말인가. 저의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자는, 그러니까 왕은….”

“그분의 이름은 카르낙 발투만이랍니다, 아가씨. 곧 아가씨의 반려가 되실 분이지요.”

카르낙. 그것이 그 남자의 이름. 현기증이 몰려와 릴리는 제 머리를 집고 고개를 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자… 카르낙 발투만은 어떻게 왕이 된 거죠?”

그가 어떻게 혼자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부족끼리의 세력 싸움에서도 절대 혈혈단신이 무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 수적 열세로도 승리할 순 있어도 단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해치우고 우두머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는 천민이었잖아요. 그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같은 노예들뿐이었을 텐데요.”

“투로들은, 카르낙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매우 건장해요. 그것이 그들의 특성이죠. 대단히 단단하고 다부진 체격과 큰 키 그리고 우리보다 두세 배는 더 강한 힘을 지니고 태어나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더 두려워하고 증오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네, 맞아요. 아가씨의 말씀대로 그래 보았자 천민. 칼과 방패로 중무장한 엘버그의 군사들을 이길 수는 없죠.”

“그런데 어떻게….”

“로레인 마님이 그들을 도왔어요.”

“뭐라고요?”

릴리는 기함했다.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네 어미의 목을 베었다는.

“로레인 마님이 그를 위해 에나의 군대를 데려왔죠.”

“…에나?”

“라미레스의 첫 번째 아이가 잠든 곳, 알기어스 왕은 그곳에 달의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제 형제를 그곳의 수호자 ‘에나’로 칭했죠. 그가 라미레스가 낳은 최후의 아들인 베르구스 라미레스. 바로 아가씨의 선조랍니다. 성전의 수호자에겐 막강한 권력과 군대가 주어져요. 로레인 마님은 그것을 요구했고 에나는 군대를 내주었어요. 신의 아들과 신의 수호자가 전쟁을 벌인 셈이죠.”

“그래서 카르낙 발투만이 승리했군요. 에나의 군대를 등에 업고요.”

“네.”

“그리고 카르낙은 내 어머니의 목을 베었고요.”

“…네.”

“아버지를 벤 것과 마찬가지로요.”

“…네.”

“그리고 나는 그와 결혼을 해야 하는군요.”

“…네, 아가씨.”

“…….”

불공평하다. 이치에도 어긋난다. 정도 미련도 남지 않았다지만 제 부모를 죽인 남자와 결혼이라니. 저를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이 아니라면 이 결혼을 반대해야 옳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카르낙은 알기어스 왕의 혈족은 모조리 죽였어요. 왕의 남은 핏줄이라고는 아가씨 한 분뿐이에요.”

“그래서 내가 카르낙과 결혼해야 하는군요. 천민에게 왕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 왕국을 위해서요, 아가씨. 이곳의 평화를 위해서요. 그것이 로레인 마님의 마지막 바람이셨어요.”

“거짓말.”

“아니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늘에 맹세코….”

“그는 로레인을 죽였어요. 그는 저를 도운 자를 배신했다고요. 그런 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로레인의 뜻일 수 있어요?”

그런 자를 어떻게 왕으로 모실 수 있는가. 과연 그런 자를 믿을 수 있는가. 에이가는 로레인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오직 로레인의 핏줄이라는 것만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애처롭게 울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자를 위해 일하는가.

“알기어스 왕은… 미쳐 있었어요.”

에이가는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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