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0화 (10/231)

10화

“지금 상태로 결혼식이라도 치르란 말인가? 저 꼴을 한 여자와?”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가씨를….”

“잘 들어, 계집. 네가 정말 왕의 핏줄인지 확인할 때까지 너는 죄수다. 네 그 동그란 머리통에 어떤 색의 머리가 얼마만큼 자라는지에 따라 네가 죽을지 살지 결정될 거야.”

“…….”

“그러니 부디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기도하라고.”

“…….”

“안 그러면 너도 네 아비처럼 머리통이 잘릴 테니.”

“…….”

“아니.”

“…….”

“네 어미처럼인가?”

“…….”

에이가는 침을 삼켰다. 카르낙은 매정하게 돌아섰다. 로로가 눈치를 살피다 그의 뒤를 쫓았다. 에이가는 한참 안절부절못하더니 안 되겠는지 치맛자락을 붙잡고 제의실을 나섰다.

그 방에는 쓸모없는 시종 둘과 눈 하나 깜짝 않고 앉아 있는 파니릴리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폐하! 폐하!”

에이가가 카르낙의 뒤를 따라 회랑까지 나왔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붙든 채 종종걸음을 치며 카르낙과 보폭을 맞췄다.

“죄수라니요. 저분은 영문도 모르고 폐하의 명령 때문에 이곳까지 오셨어요!”

카르낙이 곧바로 대꾸했다.

“말은 바로 해. 너의 명령이겠지. 저 계집을 데려오라고 강요한 건 당신이잖아.”

“명령은 폐하가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폐하는 저분을 비로 맞이하려고 데려오셨어요!”

“내가 맞이하려던 여자는 저런 괴상망측한 대머리가 아니야. 적어도 머리카락 털 몇 개라도 달려 있는 여자였다고.”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거잖아. 과연 정말 머리카락이 자랄지 아니면 평생 대머리로 있을지봐야 하지 않겠어?”

대체 뭔 소리지? 카르낙이 예배당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뒤를 따르던 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안에 있는 것이 카르낙이 찾던 여자인데… 그 여자 머리가 어쨌다고? 어슴푸레 들리는 대화 내용을 더 확실히 듣기 위해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가두는 것은….”

“아직 정체도 모르는 여자를 내 아내 취급할 순 없어. 시종을 거느리고 내가 비운 성안에서 왕비 노릇을 하겠다? 꿈 깨시지.”

“비워요? 성을 비우신다고요?”

“이렇게 된 마당에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을 순 없어, 핀!”

카르낙이 휘적휘적 걸으며 그를 불렀다.

“네.”

핀이 대답했다.

“전투 준비를 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겠다.”

“네, 폐하.”

전투? 에이가가 기함했다.

“성이 이 지경인데 어디를…!”

거기에다가 대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지금 돌아간단 말인가. 미래의 반려는 서쪽의 냉골에 가둬 놓고 저는 따분함을 참지 못해 전장에 나가 살육을 할 작정이란 말인가.

카르낙이 걸음을 멈추고 에이가를 돌아보았다.

“에이가, 계집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면 내게 파발을 보내도록 해.”

“어떻게….”

“로로, 언제나처럼 잘 부탁해.”

“…예, 폐하.”

순순히 답하는 로로가 미워 에이가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로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카르낙은 에이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다정하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마치 연정을 품은 기사가 귀부인에게 하듯이.

“비록 시력은 안 좋지만 여전히 똑똑한 에이가, 부디 성군이 돼 주길.”

놀리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카르낙은 그렇게 멀어졌다. 에이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카르낙은 전쟁터로 떠났다. 파니릴리는 영문도 모른 채 빛도 잘 들지 않는 서쪽의 탑에 갇혔다.

“지금 상태로 결혼식이라도 치르란 말인가? 저 꼴을 한 여자와?”

그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 결혼이라니. 내가 그자와? 이제 와 저를 찾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혼? 그런 얼토당토않은 것이 이유라고?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낡고 두꺼운 나무 문이 열렸다. 끼익, 녹슨 쇳소리와 함께 벌어진 틈 안으로 휘리릭, 먼지들이 아지랑이처럼 날렸다.

“아가씨.”

“…….”

근심이 가득 쌓인 얼굴의 저 여자는 에이가라고 했지. 어머니의 시종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제 아비의 목을 친 남자의 측근이 되어 있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에이가는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릴리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어서요!”

“정말이지 송구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아가씨를 이런 곳에 모셔야 한다니….”

“여기가 어때서요. 이 정도면 지내기 충분해요. 기껏해야 조금 어두운 정도잖아요.”

에이가가 붉어진 눈을 휙 들었다. 슬프다기보다 분해서 터진 눈물이 그녀의 광대뼈에서 반들거렸다.

“아가씨가 어떤 분이신데요! 이런 먼지와 곰팡이가 가득한… 이런 감옥 같은 곳에서 지내실 분이 아니세요! 정말이지, 로레인 마님이 알면… 그분이 알면….”

“…….”

“천국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실 겁니다.”

그 대목에서 다시 눈물이 터져 에이가는 고개를 떨구고 흑흑 소리를 냈다. 그녀가 로레인 부인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은 잘 알겠다. 저에게서 로레인의 그림자를 찾은 것일까.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요.”

릴리는 말했다. 어머니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에이가일 뿐. 그녀는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찾아본 적이 없다. 머리색도, 눈동자도 어머니의 것과 달랐으니까. 한때는 올라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처럼 깊고도 맑은 고동색 눈동자를 갖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올라는 릴리의 어머니가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녀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주 먼 타인 같다고 생각했다. 닮지 않았기에 저를 버린 것일까 싶어 상처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닳고 닳아 버린 추억일 뿐이지만 말이다.

“로레인 마님은 아가씨를 버린 것이 아니에요.”

에이가는 눈물을 훔쳐 내며 말했다. 곧고 억센 표정이었다.

“하게너 백작님이 마님께 강요했어요. 마님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요.”

산모가 진통을 할 동안 하게너 백작은 제 집무실에서 독한 술을 들이켜기만 했다. 오랜 산고 끝에 솜털 같은 흰 머리와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때도 하게너는 술을 퍼마시기만 했다. 마치 제 아내가 왕의 아이를 출산한 것이 고통인 양. 알기어스 왕이 아내를 범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저이면서도.

로레인 하게너는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였다. 그녀는 집 안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시종들에게 친절했으며, 남편에게도 더없이 상냥했다. 로레인이 유반 하게너를 진실로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충실했다. 하게너에게 장자를 안기며 아내의 역할을 다했다. 반면 유반 하게너는 제 아내에게 그다지 다정하지 않은 남자였다. 로레인과의 결혼을 결정한 데에는 그녀의 아름다움보다, 그녀의 친정이 지닌 가문의 명성이 더 주요했을 것이다.

유반 하게너는 엄청난 양의 지참금을 주며 그녀의 핏줄을 샀다. 그리하여 그는 로레인을 획득함과 동시에 부유하고 명망 있는 백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그는 그 욕망에만 충실했다.

“하게너 백작은 욕심이 많았죠.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는 더 큰 것을 원했어요. 그는 왕의 측근이 되고 싶어 했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신의 아내까지 바쳤죠. 거기에 로레인 마님의 의지는 단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았어요.”

왕과의 잠자리를 위해 로레인을 목욕시키고 몸에 향유를 뿌리고 독한 술과 술잔까지 준비해 준 것이 바로 저였다. 아마 그때 그녀는 로레인을 단장시켜 주며 내내 울었던 것 같다. 왕을 위해 다시 화려하게 장식을 한 제집 침실에서 로레인은 내내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영혼이 달아나 빈껍데기만 남은 듯. 그러한 날들이 반복되며 로레인은 빛을 잃었다. 여전히 집 안을 가꾸고 하인들을 관리하고 제 아이를 보살피면서도 그녀의 눈은 늘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어느 날 밤, 머리를 빗겨 주는 에이가에게 말했다.

“날고 싶어, 에이가. 훨훨… 훨훨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로레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을지 에이가는 아직 그것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여인의 인생이란 참으로 가엽지요. 사내들 손에 제 운명을 맡긴 채 순응해야 한다니 말이에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요.”

에이가는 씁쓸하게 웃었다. 엘버그에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릴리는 엘버그에 있을 때조차, 부모가 모두 저를 저버렸을 때조차 본인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하면 얼마든지 나무를 타고, 과일을 따고, 풀숲을 뒹굴 수 있었다.

치마를 더럽혀도, 머리가 볼썽사납게 흩어져도 다치지만 않는다면 올라는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단둘뿐인 세상에서도 그녀는 외롭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늘 자유로웠다. 그것은 그라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버그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고,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풍요로웠고 그가 주는 것 이외의 것을 욕망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감사해야 하는 일일까. 어머니가 저를 저버린 일, 하게너 백작이 저를 버린 일을.

“제가 왕의 핏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올라가 말해 줬으니까요. 다만 어머니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무언가 감추어야 할 치부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요.”

“아가씨는 고귀한 핏줄을 가지고 태어나셨어요. 로레인 마님의 본래 성은 라미레스. 알기어스 왕가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죠. 전설에 따르면 달의 여신 아마네스가 자신의 아이를 만들기 전 이 땅에 살며 그녀와 소통하던 최초의 인류였다고 해요. 그러니 아가씨는 왕보다 더 먼저 이 땅을 일군 선조의 피가 흐른답니다.”

거기에 알기어스 왕의 피까지 섞였으니 유반 하게너가 두려워할 만했다. 유반은 사생아가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유반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남편의 심중을 로레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의 손에 들려 먼 곳으로 보냈고 남편에게는 아이가 사산되었다 둘러댔다. 다행히도 유반은 아내의 말을 믿었다. 그 후로 로레인은 정기적으로 사람을 보내어 제 사생아를 돌보았다. 에이가와 그의 사촌이 그 일을 맡았다.

올라와 릴리가 지내는 성에 정기적으로 물건을 가져다주던 이가 바로 에이가의 사촌 오라버니였던 셈이다.

“저 남자는 누구죠?”

과거의 상념에 잠겨 있던 에이가에게 릴리가 물었다.

“그는….”

아아. 카르낙 발투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숨을 골라야 한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너무나 사연이 많고 복잡하여 다 이야기하려면 3일 밤낮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그는 서쪽 사막에 사는 천민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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