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산등성이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두갈은 걸음을 독촉했다.
“서둘러. 어두워지기 전에 빠져나가야지.”
“노력 중이에요, 아저씨.”
파니릴리는 흘러내린 가죽 가방을 뒤로 젖히며 대꾸했다. 저도 빨리 가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젖은 흙구덩이가 그녀의 발을 잡은 채 쉽사리 놔주질 않았다.
“해가 지면 길을 잃고 말 거야. 게다가 날짐승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겠지.”
그는 조바심 가득한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릴리와 마찬가지로 바짓가랑이를 잡고 놔주질 않는 젖은 흙구덩이 때문에 더 오기가 생긴 것 같았다. 두갈에게 저는 이 산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부르테의 지침으로 늦은 밤까지 산속을 돌아다닌 적이 없었으므로 확언하기는 어려웠다. 또 웬만한 산짐승은 저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해 주고 싶었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저를 공격하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 역시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어제 비가 왔기 때문이야. 제길, 날도 지독하지. 한동안 내리지 않더니. 왜 하필 어제 비가 내려서는. 요 근래 정말 재수가 없어.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더라고. 이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불안하다니까.”
“…….”
“난 정말 산이 싫어. 우거진 풀들이 시야를 방해하잖아. 나는 탁 트인 게 좋아. 뭐든 다 보이는 게 좋다고. 그런 면에서 산보다 강이나 바다가 나아. 끝없이 보이는 수평선을 보자면 정말 속이 다 후련하지. 그래서 내가 어부가 된 거야. 난 이 산이 싫다니까.”
두갈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무엇이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한지 저를 아등바등 비틀거리며 뒤쫓아 오는 릴리를 배려하거나 도와줄 여력도 없어 보였다.
“빨리 와. 뭘 꾸물거리고 있어!”
“가요! 가고 있어요!”
정말이지 부르테 앞에서는 고양이를 앞에 둔 쥐처럼 얌전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내였다.
루이스의 일행이 어부의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해가 막 산등성이로 넘어간 직후였다. 하자르는 기름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과 기름통을 어색하게 들고 있었고, 나머지 장정 세 명은 이미 검집에서 반쯤 검을 뽑아 둔 상태였다.
너른 광장에 들어선 흉흉한 장정들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제 어린 식솔들을 등 뒤로 감추느라 바빴다.
[…누구신지요?]
주민 하나가 더듬대며 물었다. 하자르가 그의 말을 통역했다.
“누구시냐 묻습니다.”
루이스는 하자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두 동강 냈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고 이내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듣는다, 하자르.”
루이스는 떨어지는 핏물을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의 몸에 쓱 닦아 냈다. 정육점에 걸린 비계처럼 쪼개진 사체를 보는 하자르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손에 든 횃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잘 들어라!”
루이스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움찔 놀라 뒤로 한 발 더 물러섰다. 그가 힐끗 하자르를 쳐다보자 하자르는 곧바로 그의 말을 통역했다.
“네놈들의 친구이자 이웃인 두갈은 내 귀중한 물건을 훔쳐 갔다. 또한 나와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그 대가를 물으러 왔다!”
하자르가 통역을 끝마치자 사람들은 루이스의 말에 웅성거렸다.
[두갈이? 두갈이 그의 물건을 훔쳤다고?]
[누구 두갈 못 봤어?]
[어이. 두갈 못 봤어?]
그러다 누군가 용기를 내 물었다.
[두갈이 훔쳐 간 게 뭡니까?]
하자르가 통역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그놈이 훔쳐 간 게 뭐냐고? 네놈들을 모두 노예상에게 팔아야 갚을 수 있을 만한 값의 물건이지. 그러나 놈이 어긴 나와의 약속은 네놈들의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감히 나, 엘버그 왕국의 메이시 루이스를 속이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로넨과 레이네가 검집에서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쨍하고 칼날이 날카롭게 울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놈을 찾아오겠소!]
누군가 외쳤다.
“두갈을 찾아오겠답니다!”
하자르가 그 말을 통역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또다시 누군가가 외쳤다. 하자르는 재빨리 그 말을 통역했다.
“두갈의 집이 어딘지 알려 주겠답니다!”
루이스는 그 말을 내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하자르가 통역을 이었다.
“저자가 두갈의 집을 알고 있답니다. 원한다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죄가 없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달랍니다.”
루이스는 두려움에 질린 사내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하자르가 겁을 먹은 그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자 사내는 굳은 두 발을 재빨리 움직여 루이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다급하게 손으로 북쪽과 서쪽 사이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외쳐 댔다.
아마도 두갈의 집을 알려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하자르가 무어라 그것을 통역하기도 전에 사내의 머리통은 루이스의 검에 의해 반원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약간의 찰나를 두고 머리가 잘려 나간 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머리를 잃었는지 알아차릴 겨를이 없던 몸은 한참 동안 두 발로 서 있다가 하자르와 루이스의 얼굴에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자르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횃불과 기름통을 떨궜다. 투르르르 소리를 내며 흙바닥을 구른 횃불은 이내 기름이 튄 시체를 태우며 불길을 키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과 아우성이 몹시도 소란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도 살려 놓지 마라.”
루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훈련이 잘된 군견처럼 로넨과 레이네는 검을 겨누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은 몰이사냥을 하듯 사람들을 한곳으로 몰며 칼끝에 걸리는 것이라면 모조리 베어 냈다. 전쟁과 살육이란 것을 겪어 본 적이 없는 하자르는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만일 어딘가 지옥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저게 뭐지?”
두갈은 멀리서 피어오르는 시꺼먼 연기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파니릴리도 덩달아 그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요…. 설마 불은 아닐 텐데….”
어제 내린 비로 아직 사방이 젖어 있었다. 불길이 일었어도 쉽게 사그라들 수밖에 없는 습하고 끈적한 날씨였다. 누군가 억지로 기름을 들이붓지 않은 이상 저토록 크게 불이 날 리가 없다.
“우리 마을 쪽이야.”
“네?”
두갈이 홀린 듯 웅얼거린 탓에 파니릴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저씨?”
“우리 집… 우리 집 쪽이라고.”
그러다가 불현듯 제 목에 걸려 있던 호박석 목걸이를 뜯어내어 손에 쥐었다. 릴리는 영문을 몰라 그의 파리한 얼굴과 목걸이를 쥔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갈은 잠시 동안 혼이 나간 듯 멍해 보이더니 이내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파니릴리는 번개처럼 사라지는 두갈을 부르며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두갈의 아내는 제 어린 두 아들을 등 뒤로 숨긴 채 핏물을 뒤집어쓴 사내들에게 울며 빌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절박하게 비비며 절규했다.
“하자르, 뭐라는 거야?”
루이스가 눈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그의 뒤로는 로넨과 레이네의 검에 베인 자들의 시체를 장작 삼아 더 거세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내놓겠답니다. 원한다면 자신을 노예로 팔고 몸을 취해도 된답니다. 다만 자식들은 살려 달라는군요.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다고요.”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루이스 경.”
하자르는 통역을 마치고 여인의 호소에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듯한 루이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 아버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엘버그 왕국 근위병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자르는 군인이 아니었다. 전쟁터의 처절함과 생존을 위한 잔인함까지 이해할 순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이 정도면… 이제 두갈도 잘못을 깨달을 겁니다.”
“상관없어, 하자르.”
“…네?”
루이스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모습이 살육의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주위를 돌아봐.”
“…….”
그 말에 하자르는 온통 붉은빛이 감도는 주위를 보았다. 비명, 검은 연기, 녹을 것 같은 뜨거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칼을 휘두르는 레이네와 로넨….
하자르는 ‘아’ 하고 탄식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을 지르고 검에 피를 묻힐 명분이. 여관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지루해하던 이들은 오간 데 없고 제 세상을 만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르는 광인들만 남았다.
“놈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참아 왔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지.”
하자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두렵고 놀라운 눈으로 가녀린 여인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루이스를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멈춰! 마르타!!”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왔다. 그러더니 미끄러지듯 루이스의 앞으로 기어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두갈이었다.
“대장님! 대장님! 안 됩니다! 안 돼요!”
추켜올린 검을 멈추게 한 것이 짜증 난 듯 루이스는 미간을 구겼다가 이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루이스의 얼굴은 반가움마저 감돌았다. 그는 웃으며 알은체했다.
“두갈. 정말 오랜만이야.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고.”
[두갈!]
남편을 발견한 여자가 그를 불렀다. 두갈은 울음을 터트리는 아내와 쪼르르 달려와 품에 파고드는 아이들을 두 팔로 얼싸안고 루이스를 향해 애원했다.
“뭐라는 거야?”
“계집을 데려왔대요. 약속을 지켰는데 어째서 마을에 불을 질렀냐는데요.”
계집을? 루이스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호소하는 두갈을 내버려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작은 체구를 지닌 자가 서 있었다. 사방에 튀긴 핏물과 널브러진 시체 더미, 뜨거운 화염불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이는 확실히 카스티 제도 사람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그뿐, 루이스가 예측했던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와는 전혀 겹쳐지는 것이 없었다. 하자르는 루이스와 파니릴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분노에 찬 눈으로 루이스는 두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곡소리를 내며 제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내가 말한 건 백금발 머리를 지닌 계집이었어! 저딴 땅딸보 꼬마 놈이 아니라! 이 덜떨어진 자식 같으니! 적어도 사타구니에 물건은 달리지 않은 놈으로 가져오는 성의는 보여야 할 것 아니야!”
금방이라도 그의 턱 아래로 검을 쑤셔 넣을 것 같아 하자르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