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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화 (4/231)

4화

그라타는 커다란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줄기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작은 국가였다. 수많은 배들이 온갖 나라와 무역을 하기 위해 강에 배를 띄우지만 그라타는 발달된 도시 국가가 아닌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부족 국가이기에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정박하는 배는 없었다.

아마 그들은 이 밀림과 숲으로만 이루어진 땅덩어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곳에 정박하는 배란 길을 잃거나 아니면 죗값을 치르기 두려워 도망친 범죄자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내의 어투에는 사뭇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마치 둘 중 무엇도 아니라는 듯이. 부르테는 물었다.

“어디에서 온 것 같던가?”

사내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배에서 내린 자들은 너덧 명이었는데 모두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무장을 한 군인 너덧 명이라. 그 정도의 수라면 땅을 정복하러 온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약탈일까? 무엇을? 과연 무엇을약탈하러 그들은 이곳에 왔을까.

"아무래도… 대녀님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닐지요? 혹시라도 제가 도울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돕고 싶습니다요."

“고맙네. 하지만 괜찮네. 어서 가서 마을 사람들부터 챙기게. 자네의 친절은 잊지 않겠네.”

다이옌은 그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사내는 감개무량해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곧 동행들을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부르테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서서히 밤이 찾아오고 있구나, 생각하던 찰나 마치 새의 지저귐 같은 계집들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덜컥, 뒷문이 열렸다. 아이들의 소리는 언제나 맑아서 그녀를 미소 짓게했다.

“다이옌! 판이 아기 새를 주웠어요.”

루나가 먼저 들어오며 떠들었다. 파니릴리가 부르테의 곁으로 다가와 제 상의 안에 품어 둔 새를 보여 주었다.

“아기 새가 아니구나, 릴리야.”

부르테의 말에 루나가 물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작은데요?”

“그래. 칼새란다. 보렴. 날개가 아주 크지?”

확실히 그랬다. 진흙에 젖어 엉망이지만 몸통에 비해 날개가 컸다. 근처에 아무리 찾아도 둥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 이해가 되었다.

“칼새는 땅에 잘 내려앉지 않는단다. 보아하니 다친 모양이구나.”

파니릴리는 골똘히 새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치료를 한 뒤 가능한 한 빨리 발견된 곳 근처에 새로 둥지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다시 어미가 찾아오든, 아니면 다시 날갯짓을 하든 새의 운명이 정해질 것 같아서. 하지만 땅에 잘 내려앉지 않는 새가 다쳐서 날지 못한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다시 날 수 없다면… 그럼 제가 키울 수 있을까요?”

“글쎄다, 릴리. 두고 봐야겠다.”

부르테는 파니릴리에게 새를 받아 들어 발톱과 꼬리 깃털을 확인했다.

“일단 깨끗하게 씻겨 주자꾸나. 당분간 머물 안식처도 있어야 하니 바구니를 세워서 그 안에 모포도 깔아 주렴. 절벽에 매달리길 좋아하니까 제법 넓은 편이 좋겠다.”

“네.”

파니릴리는 깨끗한 리넨 천으로 부르테의 손에 들린 새를 넘겨받았다.

“내가 물을 길어 올게.”

루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물동이를 찾아 나섰다. 부르테는 루나가 멀어지자 조용히 파니릴리의 손목을 잡았다. 무언가 진중하게 할 말이 있을 때 내보이는 습관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릴리.”

“네, 다이옌.”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릴리는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10년입니다, 다이옌.”

열 살. 낯선 상인에게 보석 한 움큼을 쥐여 주고 파니릴리는 바다를 건너 그라타에 왔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대신 다정하고 따듯한 유모 올라가 있었다. 나이가 많은 그녀는 파니릴리에게 엄마이자, 아빠이자, 할머니이자, 할아버지이자, 스승이자,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다갈색 머리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그라타라고 말했다. 올라는 대부분의 경우 엘버그 왕국의 언어를 썼지만 이따금 그라타의 언어도 중얼거리고는 했다. 파니릴리는 나날이 늘어나는 올라의 검버섯 개수를 세며 엘버그와 그라타의 언어를 자연스레 습득했다.

그리고 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홀로 남겨진 파니릴리는 이곳 그라타로 왔다. 단 하나뿐인 가족, 단 하나뿐인 친구, 단 하나뿐인 스승, 그리하여 단 하나뿐인 세상을 잃어버린 그곳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저의 숨통을 조이기 전에 릴리는 올라의 흔적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함께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바다 건너의 황금빛 육지건만, 이상하게도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그라타의 땅에서 릴리는 올라의 모습을 더 많이 떠올렸다. 이 작고 고요한 마을은 그 자체로 올라의 품 같았다.

“그래. 벌써 10년이나 되었구나, 릴리. 어미를 잃은 고양이 같던 네가 벌써 스물이야.”

“거두어 주신 덕분이죠.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파니릴리는 공손히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부르테의 다음 말에 그녀는 곧 낯빛을 잃었다.

“누군가 너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예?”

파니릴리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혼란스레 일렁거렸다.

“누가요? 누가 저를 찾죠? 저는, 저를 찾아올 사람이 없어요. 아시잖아요. 저에겐 가족도, 친척도 없다는 걸요.”

부르테는 그녀의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미소로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릴리, 너는 특별한 아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그걸 느꼈단다.”

부르테는 종종 릴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넌 특별한 아이야. 너는 남들과는 좀 다르단다. 안다. 그라타에서 그녀는 외지인이었다. 쓰던 말도, 생김새도, 자라 온 환경도 다르다. 릴리는 늘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라타의 여느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다. 어디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들은 널 찾으러 올 거야.”

부르테가 다시 말했다. 단정한 그녀의 어조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언젠가 그들의 그림자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단다. 너를 찾는 그림자였어.”

“…….”

몸에 오싹 한기가 들어 릴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부르테는 꿈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다. 단지 늙고 지혜로운 자여서 다이옌이 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신에게 선물을 받은, 선택된 자이기에 다이옌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말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릴리는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저를 쫓는 그림자라니…. 무서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릴리가 절망적인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부르테가 자신을 쫓아내는 것 같아 두려웠다. 부르테는 떨리는 그녀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릴리, 그들은 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올 거야.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럼… 전… 전 이제 죽나요?”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단다. 네가 이곳에 머물고 싶다면 나는 너를 보호할 거야. 네가 도망치고 싶다면 기꺼이 너를 도울 거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저를 찾아낼 거라 하셨잖아요.”

“그래, 그렇게 될 거란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해 볼 수 있지.”

“전 죽나요? 저로 인해 다이옌과 루나도 혹시 위험에 빠지나요?”

파니릴리는 조급하게 물었다. 부르테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단다, 얘야. 거기엔 가능성이 혼재되어 있어. 개중엔 아주 끔찍한 장면도 있고, 아주 행복한 장면도 있었지. 무수한 가능성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 우린 알 수 없어. 다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단다. 지금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이야.”

“그럼 제가….”

릴리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면요?”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그렇다면 이곳에 머물렴. 릴리, 내가 온 힘을 다해 너를 도와주마.”

“저를 쫓아내실 수도 있잖아요. 다이옌, 제가 위험하다면 지금 당장 저를 내쫓아 주세요.”

부르테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아닌데. 진심을 담아 두려움에 떨며 한 말인데. 애가 타 피가 마르는데 부르테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잖니.”

“왜요?”

“너는 내 아이다, 릴리. 내 허리께도 오지 않는 꼬마를 데려다 지금껏 키우며 내가 바란 건 오직 네가 너의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뿐이란다. 나는 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순 있어. 기댈 곳이 되어 줄 순 있어. 너의 그늘막이 되어 주거나 너를 위해 기꺼이 몸을 불사르는 장작이 되어 줄 수는 있지. 그러나 너의 삶을 내가 대신 행하여 줄 순 없어. 어느 누구라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순 없단다.”

“아주 끔찍한 장면은 뭐였나요, 다이옌? 끔찍한 장면과 행복한 장면을 저에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부르테는 화롯가 옆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의 시선은 지글지글 타고 있는 장작더미로 향했다.

“누군가 너에게 불에 훨훨 타는 신발을 신기고 있었단다. 머리 위로는 뜨겁게 달구어진 왕관을 얹고 있었지. 마치 불길이 날개처럼 너의 등 뒤에 돋아 너를 완전히 삼키어 버렸지. 너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어.”

“…….”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사방이 잿가루였지.”

“…그것이 가장 끔찍한 장면이었나요?”

다이옌은 릴리의 물음에 쓰고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 마른 잔주름이 움푹 파였다.

“모르겠구나, 릴리. 그때의 너는 지금껏 보아 온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으니.”

“제가 행복해 보였다고요?”

릴리는 의아하게 물었고 다이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안에서 너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지. 네가 괴롭게 울고 있는 꿈에서 너는 보석을 만들어 냈단다. 아주 아름다웠지. 눈부시게 빛났어. 너는 온갖 보석과 황금에 둘러싸여 천사 같은 몸짓을 하고 있었지.”

“…….”

릴리의 표정은 점점 더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보석을 만들어 내는 꿈이 가장 끔찍한 꿈일까? 아니, 둘 다 끔찍한 꿈이다. 행복하게 웃으며 불에 타 죽는 꿈이나, 온갖 보석에 휩싸여 울고 있는 꿈이나.

“싱그러운 풀숲에 네가 누워 있는 꿈도 꾸었단다. 꽃과 풀이 만발한 곳에서 너는 잠이 든 듯 미동도 하지 않았어. 산과 들이 온통 너의 무덤처럼 보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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