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가 진동하였다.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 고함과 욕설, 비명이 한데 뒤섞이고 나니 오히려 백색의 소음처럼 무해한 듯 느껴졌다. 알기어스는 푸스스, 발밑의 돌들이 구르고, 벽면의 흙이 작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을 열어! 어서!”
토마스는 무장을 한 보병들이 늘어선 복도를 뛰며 소리쳤다. 창과 칼, 방패로 무장한 왕의 기사단은 곧바로 그의 앞에 크고 둔중한 철문을 열어 보였다. 그는 투구를 벗으며 길고 긴 회장을 가로질러 왕좌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투로들이, 그 벌레들이, 성문을, 성문을 열었습니다!”
성벽은 높고 견고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벌레 무리들은 감히 그 성벽을 넘지 못하리라 모두가 확신했다. 그러나 벽은 무너졌다. 벌레들은 시꺼멓게 무리를 지어 사방에서 기어올랐다. 패배였다. 명백한.
“폐하.”
토마스는 읍소하듯 한 번 더 알기어스를 불렀다. 왕은 사내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곧바로 턱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왕좌에는 천정이 없었다. 높다랗게 솟은 탑의 위에는 오로지 하늘과 불꽃뿐이었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굵은 쇠사슬의 교차점에는 불꽃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태양의 증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저 불덩어리를 저곳에 누가, 언제, 어떻게 걸어 놓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왕좌의 위에 매달려 눈과 비바람,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악한 것과 선한 것,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집어삼키며 왕좌를 보호했다.
왕좌에 앉은 이는 누구든 저 불꽃을 머리 위에 이고 있었다. 학자들은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재앙의 불덩어리 아래에서 경건함과 인내를, 두려움과 신실함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어머니,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드리운 신비롭고 아름다운 달의 여신 아마네스께서 그의 아이에게 원하는 단 하나의 바람이라고. 그러나 왕은 감히 그의 앞에서 겸손하라 꾸짖는 그치들의 세 치 혀를 잘랐다. 실로 그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예?”
사내는 왕에게 되물었다. 왕은 반쯤 입을 벌리고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다 저 혼자 입을 끔뻑였다.
내가 무엇이냐. 나는 왕이다.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무엇이냐. 나는 신이 빚은 최초의 조각상이다. 나는 눈이고, 바위이고, 얼음이고, 물이고 또 나는 생명이다. 내 피를 타고 흐르는 것은 빛이며, 섬광이며 또한 바로 저것.
그는 손을 들어 불꽃을 가리켰다.
“내가 바로 눈이다. 얼음이며, 강물이고 또한 대지이다.”
“…….”
사내는 광기에 일렁이는 왕의 눈동자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불꽃이다. 내가 바로 달이고, 태양이며… 내가 신이다.”
“…….”
“나는 고귀하다.”
“폐하, 이제 곧… 성이….”
“아니.”
왕은 손을 들어 사내의 말을 제지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욕망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비록 눈가에 주름은 졌어도 그는 여전히 정력적인 왕이었다. 사내는 그를 보며 선왕을 떠올렸다. 엘버그의 왕좌는 3대를 넘기기 힘들었다.
왕좌는 계속해서 바뀌었고 피에서 피로, 또다시 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뀔 때마다 왕들은 더 강한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강함에 대한 열망은 결국 그렇게 광기가 되었다.
왕좌는 선택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는 고귀한 자리였고 그 자리에 앉은 이는 결국 신이라는 믿음. 사내는 누가 왕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스스로 자신을 광기로 몰아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그가 그렇게 믿도록 만든 것인지.
“왕국은 나의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빼앗지 못해. 누구도 나의 권능에 도전할 수 없어.”
“폐하….”
사내는 목이 타들어 갔다. 이미 그의 수족과 대신들은 달아난 지 오래다. 모두가 왕을 버렸다. 소수의 기사단만이, 무지한 백성들만이, 이제 막 칼과 방패를 든 애송이 병사들만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사내는 투로의 왕에 대해 알고 있다. 그의 무자비함에 대해. 그의 잔인함에 대해. 그의 분노에 대해. 그리고 그에게 가했던 자신의 경멸을 기억한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하고 짓밟았던 나날들에 대해서 말이다.
벌레 같은 그치들의 반란에 처음엔 분노했고 그다음엔 모멸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들의 광기와 복수의 테두리 안에는 그 역시 들어가 있었다.
엘버그 왕국의 모든 이가 들어가 있었다. 벌레들에겐 동정심이 없었다. 그들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 왕국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안다. 그는 성안의 모두를 도륙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 단 한 톨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을 터였다.
“폐하, 제발….”
사내는 사정하려 했다. 그러나 굳게 닫힌 철문 밖으로 날카로운 굉음과 목이 찢어질 듯 지르는 고함과 비명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끼이이이익. 거대한 문을 지탱하는 녹슨 쇠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사내는 제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에 손을 올리며 희뿌연 연기와 자욱하게 뒤섞이고 피비린내에 가려진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숨을 죽이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한순간 문이 덜컥 밀렸다. 사병들의 시체가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토마스는 검집에서 검을 뽑고 어둠에 잠긴 실루엣을 향해 칼끝을 치켜들었다.
“물러서!”
반란이 있기 전까지 사내는 그를 몰랐다. 사실 그는 남쪽의 메마른 땅에서 사는 투로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엘버그 왕국에서 그들은 마음껏 짓밟을 수 있는 벌레였다. 누가 개미나 바퀴벌레 하나하나를 구별할 수 있는가. 그는 ‘투로(벌레)’였다. 수많은 투로 중 하나였고 이젠 그 벌레 놈들의 왕이 되었다.
“물러서! 여기는 감히 네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검은 모래와 먼지가 뒤섞인 투로의 다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야 음영에 가려졌던 그의 모습이 완벽하게 드러났다.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핏물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와 핏물이 엉겨 붙은 검고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푸른 눈동자가 불꽃처럼 발광하였다.
“물러서!”
사내는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러나 칼끝이 심하게 떨렸다. 모든 것이 메마른 대륙에서 살아남은 투로들은 날짐승처럼 힘이 좋았다. 그리고 이자는 개중 가장 강한 자였다. 선득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검은 제가 가진 것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날카롭고 무거워서 단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내의 몸을 두 쪽으로 갈라 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투로는 그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힘껏 경고하는 토마스의 목소리나 칼끝을 먼지나 바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왕좌를 차지한 자에게 새파란 눈을 들어 보였다.
“네놈이 왕이냐?”
알기어스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자. 몸을 일으킨 그는 우아하고 권위적이었다. 그야말로 왕이었다. 엘버그 왕국의 적장자.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는 유일무이한 적장자.
“감히 너 따위의 비천한 벌레가 내 손끝에라도 닿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왕은 포효와도 같이 소리쳤다.
“짐은 엘버그 왕국의 국왕이다! 나는 달 어머니가 만들어 낸 최초인의 후손이다! 나는 선택받은 자이다! 나는 신의 후손이고, 내가 바로 달과 태양을 잇는 신….”
말을 잇기도 전에 투로가 칼을 치켜들고 그에게 돌진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검을 빼 든 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토마스는 쌩한 바람과 검이 허공을 빠르게 가르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굴러와 제 발끝을 툭 치는 느낌에 슬며시 눈을 떠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눈동자가 있었다. 벌어진 입과 진회색의 눈동자가.
“으….”
몸에서 베어져 나온 왕의 머리였다. 토마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손에서 칼을 놓쳤다. 뒤로 물러서다 발이 엉켜 엉덩방아를 찧고도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투로는 핏물 위에 왕의 피를 덧씌우고 눈가를 적시는 뜨거운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낸 뒤 머리가 잘려 나간 왕의 몸뚱어리를 발로 툭 밀었다. 그것은 계단을 굴러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투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불꽃이 일렁였다. 얼음 같은 푸른 눈에 붉은빛이 담겼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왕좌에 앉았다. 마치 그를 위해 존재했다는 듯, 넓은 왕좌는 그의 크고 단단한 몸에 딱 맞았다. 배신이었다. 반역이었다.
투로가 왕좌에 앉아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가랑이가 뜨끈해졌다. 핏물을 뒤집어쓴 투로는 선득하고 기이하도록 강렬하여 저를 두렵게 했다. 그의 눈동자가 숨통을 옥죄어 흉통이 일 지경이었다. 이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서라면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그때 투로가 말했다.
“종탑으로 가 종을 울려. 그리고 그 탑 위에 검은 깃발을 세워라.”
왕좌에 몸을 기대어 나지막이. 토마스는 석상처럼 굳은 채 그의 말을 들었다.
“모두에게 알리는 거야. 네놈들의 왕은 내 손에 뒈졌다고.”
그는 왕좌의 단단한 팔걸이를 손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나를 섬겨야 한다고.”
“…….”
토마스는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투로는 입가에 가득 비웃음을 지으며 선득한 눈동자를 들었다. 광기와 희열이 가득했다.
“이젠 내가 네놈들의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