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200화 (200/201)

(EP.200)Epilogue. 행복의 끝 - 06

그리하여, 떠들썩함을 잠시 뒤로 한 채 아리아는 그들의 곁을 살며시 떠났다.

이유는 별 게 아니다. 그저, 저토록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 곁에 있다 보니 잠시 조용함을 추구하게 된 것일 뿐.

지난 3년, 제 아무리 활발함과 시끄러움이 몸에 익었다고 한들 그녀의 근본은 여신이다. 여신이란 자고로 인간들로부터 숭배를 받는 입장이며, 여신의 거하는 신성한 신전에서 함부러 입을 여는 행위가 허락이 될 리가 없었다.

...즉, 그녀는 본디 시끄러움보다는 고요함이 훨씬 더 익숙한 입장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잠시 그들에게서 멀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였다.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언덕 위쪽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아까부터 눈독을 들여 둔, 가파른 언덕 위쪽의 나무 그늘 아래. 그곳이라면 이곳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겠지.

언덕 위편으로 조용히 걸어 올라가던 와중, 잠시 고개를 들어 근방의 경치를 눈에 담아본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고, 높은 지대에 있는 꽃들이 흩날려 아래쪽을 향해 날아 떨어진다. 눈으로, 그리고 피부로 느끼고 있는 봄의 모든 것은 그녀의 기분을 너무도 좋게 만들고 있었다. 봄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천 년 전에도 자주 바깥외출을 했었을 것이라는 자그마한 투덜거림을 남겨본다.

“.....”

언덕의 위편은, 그녀가 상상했던 대로 고요하고 휴식을 취하기 알맞은 장소였다. 봄의 햇살은 따사롭고, 하늘의 위편은 끝없이 푸르기만 하여 그녀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장소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나무의 아래편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두 눈을 감으며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기 바로 직전-

“아리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줄기 음성에 문득 뒤편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실로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실은 익숙한 정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눈 이 중 한명이었으니까.

허리까지 늘어져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 그리고 그에 걸맞는 자수정과 같은 눈. 전신을 휘감고 있는, 만물을 포용할 것만 같은 자애로움.

여신의 유일한 지상 대리인, 아리엘 폰 에스텔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아리엘이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 신체는 아리엘이 맞지만 속에 들어있는 사람은 아리엘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아리엘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이의 정체를, 아리아는 너무도 쉽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아르벨?”

아리아가 자신의 두 눈을 위쪽으로 치켜뜨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아리엘은 그런 아리아의 모습이 그저 재미있기만 하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인다.

“뭐야, 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알아챈 거야? 조금은 아리엘의 흉내를 내며 너를 놀려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아무런 재미도 없어졌잖아.”

아리엘의 자그마한 투정에, 아리엘은 피식하고 웃으며 어깨를 위로 으쓱인다.

“네 기척과 몸짓을 보고 살아온 세월이 천 년은 훌쩍 넘었는데, 고작해야 겉모습이 달라졌다고 해서 못 알아보는 편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하긴, 그렇긴 하지? 우리가 한두 해 정도 알고 지내온 것도 아니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는데.”

“실로 지긋지긋한 인연이었지. 천 년 정도는 안보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렇게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던 아리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아리엘을 향해 입을 열어 보인다.

“그나저나 지상에는 대체 어떻게 현신을 한 거야?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않나?”

“뭐어, 걱정하지 마렴. 나도 꽤나 많은 출혈을 각오하고 지상에 내려온 것이니 말이야. 아리엘과 나 사이에 이어져있는 단말을 통해 다시 한 번 현신을 하였지만,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왜냐하면 나는 너의 여신으로서의 의무도 함께 짊어지고 있느라 정말로 남는 여유가 없거든. 하지만 설사 여유가 없다고 해도, 나는 한 번쯤은 너를 만나러 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어.”

“...왜?”

“왜냐하면, 우리는 자매이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자매 사이이니까.”

그리 말을 하며 환하게 웃음을 짓는 아리엘을 보며, 아리아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클라리스랑 세피아는 어떻게 하고? 걔들 또한 네 자매잖아. 이것도 일종의 차별대우가 아닌가?”

“걔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곤히 잠들어 있는 중이잖아. 그러니까 걔들과는 대화할 내용이 별로 없지. 지난 천 년간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는 것도 조금은 웃기는 일이잖아?”

능청맞은 태도로 대답을 한 아리엘은, 이내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그나저나, 어땠어?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땠냐니?”

“그러니까, 감상을 묻는 거야. 여신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의 곁에 머무른 소감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이것만큼은 네게 꼭 묻고 싶었거든. 오늘 여기에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고.”

아리엘의 그러한 질문에, 아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끝없는 온화함에 휘감겨 있는 중이었다.

봄을 관장하는 여신은, 원래 저렇게 온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봄과 같이 온화한 것을 관장하고 있기에 저리 온화한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웃기는 생각이 아리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즐거웠어. 그것도 무척이나.”

그 말은 허세도 아니거니와, 거짓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그 자체일 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 때로는 짜증이 날 때도 있었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를 때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아.”

가령, 그가 야외의 테라스에서 다른 여자와 뒤엉키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라거나 말이지.

“...하지만, 기쁘고 즐거운 일 또한 무척이나 많았어. 예전처럼 홀로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많았어. 내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같이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말았어. 그리고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고,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말았어.”

“방금 전에도, 그 사람이 나를 꼭하고 안아 주었는걸? 그리고 언젠가, 나는 그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지. 나와 그 이를 닮은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너무도 따스하게만 느껴지고 있거든.”

그렇다. 당신과 함께 하였으며, 당신과 맞닿았던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너무도 행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당신과 이어져 있는 이 순간들이, 마치 기적처럼 찬란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바라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있는 무언가가 앞으로도 변치 않고 쭈욱 이어지기를-

“.....”

아리아의 대답에, 아리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 한 표정을 지어보인 채,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그래, 너는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구나. 일평생 그의 뒷모습을 쫓는, 하나의 여행을.”

“흔히들 말하지. 사람의 인생이란, 덧없는 무언가에 불과하다고. 왜냐하면 생명에는 끝이 있으며, 그 과정은 고해(苦海)를 쌓아올리는 여정에 불과할 따름이니까.”

“...하지만 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괴로운 것은 아니야.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별과 만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 그 속에서 별의 반짝임과 같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

“너는 네가 겪게 될 여정 속에서, 하나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로구나.”

아리엘의 중얼거림에, 아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왜냐하면 나는 그의 여자이니까. 나의  일평생, 오직 그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으니까.”

“.....”

그제야 깨달았다. 아리아의 마음속은 이미 어느 한 남자의 형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그와 함께한 3년이라는 시간이, 아리아에게는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3년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아리아의 마음속에 자신이 차지할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살짝 아쉽기는 하였지만, 그런 시시한 속마음을 내비추지는 않는다. 이별의 때, 그런 곤란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멋이 없는 행위이므로.

“...그래, 언젠가 너는 모든 여행을 끝마치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겠지. 네가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마치고 하늘로 돌아오는 날, 나는 네게 이렇게 질문을 하려고 했어. 네가 겪었던 나날은, 정말로 아름다웠냐고.”

“하지만 헛된 걱정이었구나. 왜냐하면 너는 지금,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으니까.”

그리 말을 하며 아리엘은 스스로의 눈을 살며시 감아온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 하였다.

다행이다. 그녀가 행복하다고 말해서. 그리고 정말로 행복한 것 같아서.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는, 또래의 소녀와 같았기에 정말로 안심이 든다.

고개를 돌아본다. 언덕의 저 만치 아래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노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 아까 전의 카인님처럼 모두에게 잔소리를 듣기는 싫으니까.”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는 아리엘에게서 아무런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어쩌면 이번 생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건만, 아리아의 등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야,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지금까지 지내온 방대한 시간과 비교하자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간의 이별 따위에, 아쉬움을 표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행복하렴, 아리아.”

대체 누가 내뱉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하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고하고 말았다.

기나긴 겨울을 홀로 걸었던 여신 아리아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리고 길고 긴, 아리아의 이야기가 시작되어간다.

평범한 소녀처럼 웃고, 떠들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 아리아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이야기가 희극일지 비극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나간다.

언젠가, 행복으로 가득한 끝을 맞이할 그 날까지.

그녀가 자아내는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 나간다.

쭉. 그리고,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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