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98화 (198/201)

(EP.198)Epilogue. 행복의 끝 - 04

“...으음.”

창문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의 눈부심으로 인해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천근만근과 같은 눈꺼풀의 무게를 가까스로 떨쳐 버리며 시계를 바라보니 때는 바야흐로 오전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오전 10시. 아침이라기보다는 점심에 한없이 가까운 시간. 나는 시계를 바라본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그대로 공쳐버린 것이 틀림없다는 울적한 사실에 대하여.

“흐응. 일어나신 건가요, 카인?”

그리고 그 때, 내 옆에서 경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도 흐릿하기 그지없는 시야의 틈 사이로, 이불을 가슴 위쪽까지 덮고 있는 키리에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키리에, 당신은 진작 일어나 있었던 건가?”

나를 바라보는 있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나, 평소와 같은 느긋한 얼굴로 미루어볼 때 방금 일어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나의 그러한 질문에 키리에는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예, 뭐 그렇죠. 저는 잠을 오래 취하지 않아도 되는 체질인지라, 어젯밤에 조금 무리를 했더라도 깊게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어젯밤이라는 키워드를 말하며 헤실헤실 웃음을 지어보이는 키리에. 그와 동시에 그녀의 길다란 귀가 마치 펭귄의 날개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귀가 저렇게 파닥거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의 귀를 움켜쥐고 싶다는 충동을 거두어들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으음.”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키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설명을 하자면 그녀는 내가 침대 위에서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는 것 외에 다른 용도로 귀에 접촉하는 행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키리에의 말에 따르면, 엘프들의 귀는 다른 어떠한 신체 부위보다 훨씬 더 민감한 부위라고 하던가. 어젯밤 내내 그렇게 귀를 실컷 어루만졌건만, 막상 눈앞에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 귀를 다시 한 번 만지작거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이 정도면 일종의 금단증상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뭐에요, 저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계시는 거죠. 조금은 수상쩍은데요.”

“아니 뭐, 이상한 생각은 안했어. 왜 이 시간이 되도록 나를 깨우지 않았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의 투덜거림이 귀엽게만 느껴지고 있는 것인지 키레에는 나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인다.

“글쎄요. 당신이 제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워낙 귀엽게만 느껴지고 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감상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 같군요.”

“...내 얼굴을 얼마나 감상을 했는데?”

“음, 한 3시간 정도일까요?”

지금이 오전 10시 가량이니까, 키리에는 대략 오전 7시부터 일어나 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소리인 것일까.

“뭐, 당신이 오늘따라 늦잠을 자버린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 어젯밤에 그리도 무리를 하셨으니, 평소보다 피로를 느끼게 된 것도 결국 필연적인 일인 것이겠죠.”

왠지 모르게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말았다.

“...내가 무리를 했다고? 무슨 농담도.”

키리에의 터무니없는 모함과 같은 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정말로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저런 소리를 내뱉고 있는 키리에 쪽이야말로 어젯밤 나의 파상공세를 버티지 못한 끝에 결국 침대 위쪽에 무참히 침몰해버리지 않았던가? 즉, 키리에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었으며, 일종의 악의적인 공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피노키오처럼 귀를 파닥거리고 있는 것인가?”

나의 질문에 키리에는 무언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자신의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피노키오라면, 인간들 사이의 그 동화 말씀이신가요? 제가 그 동화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목각인형이 스스로의 귀를 파닥거린다는 내용을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 삼는다니, 인간들도 꽤나 괴팍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가?”

생각해보니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파닥거린 것은 귀가 아니라 코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런 사소한 것이 뭐가 중요하랴.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따위 동화책의 내용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녀의 저 귀를 다시 한 번 만지작거릴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인데.

“아주 속이 뻔히도 들여다보이는군요. 유감스럽지만 당신께서 제 귀를 합법적으로 만지작거릴 수 있는 기회는 한밤중의 침대 위뿐이랍니다. 이른 아침부터 교미를 목적으로 침대 위에서 뒤엉키는 것은 너무도 품위가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 말을 하던 키리에는 마치 기지개를 피려고 하는 듯 자신의 상반신을 위쪽으로 쭉하고 폈다. 그리고 그 바람에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렸으며, 그 바람에 그녀의 상반신이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으음.”

참으로 노골적인 그 모습에 나는 헛기침을 해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어젯밤만 하더라도 저보다 적나라한 행위를 수도 없이 하였거늘, 고작해야 키리에의 저런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다니.

“...흐응,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어젯밤만 하더라도 제 옷을 직접 벗기셨던 당신이 고작해야 이런 걸로 얼굴을 붉히시다니. 이래서야 신혼부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잖아요. 하긴, 따지고 보면 저희도 엄연한 신혼부부임이 틀림없긴 하지만요.”

키득거리며 웃음을 짓던 키리에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얌전히 걸어 나갔다. 커튼의 틈 사이로 들어오고 있던 햇살에 비춰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적나라하기 그지없어, 나는 그만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설마 커튼을 옆으로 젖히려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요. 제가 미쳤다고 제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 노출 하겠나요? 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천 년간 당신이 처음이었으며, 앞으로도 영겁토록 당신 한 명 밖에 없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투덜거리던 키리에는 커튼을 옆으로 젖히는 것이 아니라, 틈 사이로 들어오고 있던 한 줄기 햇살마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커튼을 양옆으로 꽁꽁 싸매었다. 잠시 후, 우리들이 누워있던 침실은 벽 한 쪽에 설치되어 있는 등을 제외한다면 어떠한 빛도 존재하지 않는 암실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아침부터 침대 위에서 뒤엉키는 것은 품위가 없는 일이라며.”

설마 자기도 어젯밤에 이은 2차전을 치르고 싶었지만 쑥스러움 때문에 돌려서 말을 했던 것일까. 그것이라면 그녀의 현재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이리스도, 아리엘도, 비앙카도, 겉으로는 아닌 척 하긴 하였지만 은근히 나와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을 즐기곤 하였으니까. 무엇보다 아까부터 파닥거리고 있는 저 귀를 합법적으로 매만질 수 있는 이 기회를 내가 어찌 놓칠 수 있을까.

“뭐,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이른 아침부터 당신과 뒤엉키고 싶은 의욕은 별로 나지 않는군요.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저와 함께할 시간은 많잖아요? 저는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곁에 있을 텐데 그리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느긋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하며 침대 위에 털썩하고 드러눕는 키리에.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불편하였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몸 위에 얌전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인데. 한 때 불로불사였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하고는 달리 그렇게 느긋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는 것인가?”

나의 말에 키리에는 어딘가 그리운 듯한 얼굴로 지어보이더니 이내 자신의 어깨를 으쓱인다.

“뭐, 아예 관련이 없다고 부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당신 곁에 있는 다른 여자들은 인간인 반면에, 저는 엘프이니까요. 그녀들과 종(種)이 다르고, 근본적인 수명이 다른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말마따나 저는 여유로워요. 저는 인간들과는 달리 노화가 찾아오지도 않고, 수명 또한 그녀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상태이니까요.”

“...수명이 대충 얼마나 남았는데?”

“음, 년 단위로 환산하자면 대략 150년 정도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과 비교하자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긴 하지만, 당신과 함께 인생의 황혼을 마무리하기에는 그럭저럭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

150년이라니. 나는 길어야 50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 되는 시간이라면 내 곁에 있는 여인들은 물론 내가 앞으로 낳게 될 자식들까지 관짝 안에 들어가고도 충분한 시간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때대로 아이리스나 비앙카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면 우스울 때가 있어요. 언젠가 저 여자들이 늙어서 죽어갈 때도, 저는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러니 저는 급할 것 없어요. 그 여자들이 죽을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다가, 당신을 독점하면 되는 노릇이거든요.”

“아,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것인데 당신은 그 어떠한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당신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노화가 진행되지 않고 수명도 공유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도 제 곁에서 늙어 죽어가는 그 여자들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감상하시면 되는 노릇이랍니다.”

“...그건 너무 악취미가 아닌가.”

그 날 이후 성격이 많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이런 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때때로 다시금 실감을 해버리고 만다.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고 하는 여인은, 기본적으로 비앙카는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성격이 파탄 나 있는 엘프라는 사실에 대하여.

“뭐어. 악취미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 말은 전부 사실기반이에요. 저는 옛날부터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일찍 죽는다는 사실에 워낙 익숙해져 있던 터라.”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며 그런 말을 늘어놓던 키리에는, 문득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의 이별이 두렵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는 더 이상 불로불사의 몸이 아니거든요. 제가 현재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오랜 삶을 살겠지만, 이런 제게도 언젠가는 분명한 끝이 다가오겠죠.”

“게다가 그런 제 곁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믿음직한 반려자가 있어줄 예정인걸요. 제가 앞으로 걸어 나갈 시간 속에서 저와 함께 걸어 나갈 당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저는 제가 맞이할 끝이 그저 기껍게만 느껴지고 있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앞으로 150년이라는 긴 세월이지만, 끝에서 돌이켜본다면 그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시간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니 저는 당신과 육체적인 쾌감을 나누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소소한 추억을 쌓아나가는 편에 더욱 더 열중을 하고 싶어요. 섹스 같은 것은 그 여자들이 전부 죽은 다음에도 둘 만이서 실컷 할 수 있는 노릇이잖아요? 안 그래요?”

키리에는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보이더니, 이내 내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살그머니 기대왔다.

“오늘은 늦잠을 자느라 지각을 해버리셨죠? 이제 와서 일을 처리하겠다고 집무실에 들어가면 사라 그 여자한테 된통 혼이 날 테니, 오늘은 그냥 땡땡이를 치는 게 어때요? 이래도 혼이 나고, 저래도 혼이 난다면 화끈하게 일을 저질러버리는 편이 더 좋은 것 아닐까요?”

실로 악마와 같은 속삭임이 내 귀를 간질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악마의 간교한 속삭임에 점점 현혹이 되어가는 중이었고.

“그러니 오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랑 놀아요. 저는 아주 예전부터 당신과 이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었거든요.”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가한다. 아마 나를 침대 위에 그대로 눕히려는 생각이겠지.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그녀의 손길을 무시한다는 것도 꽤나 우스운 처사인지라, 나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받아들여 침대 위쪽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 그렇죠. 우리 서로 상대방에 대한 오래된 추억을 번갈아가며 이야기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실, 당신이라는 남자가 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들뜬 듯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키리에의 옆모습을 나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다. 오늘의 땡땡이도 앞으로 남은 150년이라는 기나긴 삶에서 바라보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일에 지나지 않을 테지. 그러니 하루쯤은 이런 날이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오늘의 일이, 먼 훗날에 돌이켜보았을 때 키리에와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만을 기원해보도록 하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