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7)Epilogue. 행복의 끝 - 03
그것은, 달이 아름다웠던 어느 날 밤의 이야기였다.
나와 아리엘은 바닥에 자그마한 자리를 펴 놓고 그곳에 주저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여름에 가까운 계절이었는데도, 기온은 약간 서늘한 정도인지라 바깥에서 달구경을 하기에 정말로 좋은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모두가 함께 모여 달구경을 갔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만의 일인 것 같네요. 안 그런가요, 카인?”
자리에 누운 채 느긋한 어조로 그리 말을 하는 아리엘의 말에, 나 또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였다.
“...확실히. 당신과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 만의 일인 것 같아.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적어도 몇 개월만의 일인 것 같은데.”
“몇 개월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날 당신과 침대 위에서 하루를 진득하게 소비했던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 무려 두 달하고도 12일 만의 일이라고요. 제가 당신에게 딱히 대단한 대접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신혼 초기에 하나 뿐인 아내를 방치해둘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 아, 혹시 당신 곁의 아내가 한 명이 아니라 저에 대한 사랑 또한 그만큼 줄어든 것인가요?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할 것 같네요.”
“.....”
“농담이에요, 농담. 그러니까 얼굴 좀 푸세요. 혹시 누가 이 모습을 본다면 저희 둘이 싸우고 있는 줄 알고 착각할 거 아니에요?”
쿡쿡하고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리 보아도 농담으로 내게 그런 말을 던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뭐, 사실 그녀의 말이 마냥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와 단 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던 것만큼은 여과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전 아리엘의 말마따나 다른 여인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붓느라 그녀를 소홀히 한 것만은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날 있었던 ‘그 사건’ 이후, 그 사후 처리를 위해 지난 두 달간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날 있었던 싸움의 여파로 인해 대수림 전체 면적의 30%가 그대로 증발해버렸으며, 아리아가 사용한 마법의 반동으로 인해 대수림 정중앙에는 거대한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성이 되고 말았다. 또한, 싸움 당시 세계수의 바로 앞에서 투닥거렸던 탓인지 세계수의 뿌리가 크게 손상을 입는다는 사태가 발생을 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내게도 할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서,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서 따위의 할 말은 차고 넘쳤지만, 그 따위 말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뱉을 용기는 없었기에 결국 머리를 숙이며 사후 처리에 얌전히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거주지를 잃어버리게 된 엘프들은 키리에의 통솔 하에 에스텔 공작량에서 임시로 머물게 하였으며, 아이리스와 황실의 도움 하에 대수림 주위의 경관을 최대한 원래대로 복원을 하는 작업을 거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나였고.
무려 두 달이라는 시간에 걸쳐 동분서주한 끝에야 나의 주위는 그럭저럭 안정이 되찾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렇게 아리엘과 단 둘이서 달구경을 나온다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굉장히 바빴다고. 당신을 소홀히 대하기 위해 지금까지 고의적으로 방치를 해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밝히고 싶군. 그 증거로 그 날 이후 다른 누군가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내가 투덜거리며 그러한 말을 늘어놓자 아리엘은 나를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요. 저도 당신이 저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낸 것이라 믿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군요. 카인, 당신은 제게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요?”
아리엘의 물 흐르는 듯한 추론에, 나는 놀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리엘은 내게 별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알고 있었어? 내가 할 말이 있어서 당신과 시간을 낸 것이라는 걸?”
“실은 모르고 싶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기색을 내비추고 있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법이지요.”
아리엘의 여상한 대답에 나는 결국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 대로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이 우리 둘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억지로라도 그녀와 둘 만의 시간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신의 추측대로야.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좋아요. 제게 대체 무엇이 궁금한 것이죠, 카인?”
“그 날, 당신은 왜 마지막 순간에 내 편을 들어준 것이었지?”
그 날, 이 대체 어느 순간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아리아와 내가 싸웠던 당시 그녀가 사용한 뇌신의 철퇴에 대항해 ‘휘광의 수호’를 사용하여 나를 보호해준 목적을 묻고자 함이었으니까.
...아리엘은, 아리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아리아와 처음 마주했을 당시 그녀를 향해 살기를 내비추었을 정도로 그녀를 탐탁지 않아하였다.
그리고 아리엘이 아리아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리엘이 겪어야 했던 두 번의 과거 속, 나와 우리의 딸인 티아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겨울의 마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키리에를 도와 아리아를 제압하는 것에 도움을 준 것도, 여신 아리아를 향해 그녀의 죽음을 소망으로 빈 것 또한,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홀로 남겨진 여인의 슬픔을, 그리고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아픔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아리아를 죽이는 것이 아닌, 아리아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던 나의 힘이 되어주었다. 만약,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모두가 모여 웃고 있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속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진정으로 아리아를 증오하고, 아리아의 죽음을 원하였다면 그저 멀리서 우리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였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리엘은 손쉽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뭔가 했더니. 꽤나 시시한 질문을 던지시는군요. 이제 와 다 지나간 이야기를 들추는 것은 전혀 남자다운 행동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며 한 차례 키득키득 웃던 아리엘은 저 멀리 떠있는 달을 물끄러미 우러러보았다.
“간단해요. 저는 처음부터 아리아를 죽일 생각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그런 건 전부 의미가 없는 일이니까요.”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말도 안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세상 그 누구보다 티아를 아끼고 사랑하던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의 입에서 티아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듯한 말이 나오다니?
“제 말을 다소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티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에 복수에 의미가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에요. 제가 사랑하던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리아를 죽인다는 행위가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린 것이죠.”
아리엘의 그러한 대답에, 나는 무언가가 이해가 되지 않아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고 말았다.
“복수라는 행위는 최종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설마요. 저는 그렇게까지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아닌걸요. 저는 그저, 그보다 조금 본질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순간, 아리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죠. 카인, 당신은 어째서 아리아에게 어떠한 원한도 품지 않았던 것이죠? 당신도 진작 인지하고 있었지 않나요?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시간 속, 아리아라는 여인이 당신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이죠.”
“...그건.”
아리엘의 타당한 지적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수차례의 회귀 속, 나는 미래에 나타날 겨울의 마녀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겨울의 마녀로 인해 에스텔 공작가는 붕괴하였고, 그녀가 불러온 겨울로 인해 공작가의 구성원이 사망하기도 하였으며, 그녀의 토벌 과정 속에서 때때로 나는 목숨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전적이 있는 아리아를 향해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겪었던 미래는 지금 시점에서 전부 사라져 버린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0년 전으로 회귀를 함에 따라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전부 내 품으로 돌아왔으며, 내가 장차 겪게 될 끔찍한 악몽들은 지금 시점에서 시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미래는, 이제는 내게 영겁토록 다가오지 못할 하나의 추억으로 전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그 어떠한 이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속죄를 구할 필요는 없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가능성에 원한을 품는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 아니겠는가.
“...의미가, 없으니까.”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나는 방금, 아리엘이 내게 했던 대답과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그러한 대답에, 아리엘은 풋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제가 딱히 성인(聖人) 정도의 고결한 인격자인지라 아리아를 용서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의 대답대로, 과거에 집착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행위이기에 미련을 놓아버린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제가 고심 끝에 내린, 단 하나의 결론이랍니다.”
아리엘이 두 눈이 반짝하고 빛을 내뿜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여신 아르벨께서 제게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제 소임을 다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름에 맹세코 티아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노라고.”
“...뭐?”
아르벨이 아리엘에게 그런 약속을 해주었다고? 대체 언제?
“...음. 그러니까 제가 회귀하기 전, 세계가 겨울의 마녀의 손에 멸망하기 직전의 순간이었을까요.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던 그 때, 여신께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의 한 장면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하는 것인지, 전부 다요.”
“...뭐, 미래의 한 장면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그 때의 저로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어요. 저를 보는 당신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미루어볼 때, 제가 당신의 뜻에 반하는 어떤 일을 하였구나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지만요.”
...그랬던 것인가. 그래서 겨울의 마녀의 손에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 아리엘은 내게 ‘자신을 끝까지 믿어 달라’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게 하였던 것이었나.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아리엘이 내게 도움을 주었던 것 또한 그의 연장선상에 걸쳐져 있던 일인 것이고.
“여신께서는 이리 말씀하셨어요. 비록 시간이 한 차례 거꾸로 되감겼다고 한들, 티아와 저희 사이의 령역(靈域)의 인연은 끊기지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아직 윤회(輪廻)의 고리 속에서 이어져있는 저희는,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리아가 밉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고작해야 과거의 원한 따위로 조만간 다시 시작될 티아의 인생, 그 시작점을 원한으로서 장식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해요.”
“과거는 그저 과거로 남겨두는 편이 가장 아름다워요. 저를 위해서도, 티아를 위해서도, 그리고 시간의 굴레 속에 얽혀 있던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러니 슬퍼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셋이서 행복했던 나날은,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 말을 하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 속에는 단 한 점의 흐림도 존재하지 않았던지라, 그제야 나는 마음 깊숙이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거 알아요? 당신과 몸을 섞은 지 슬슬 세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제게 태기(胎氣)의 징조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아이리스를 단 한 번에 임신시켰다기에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아무래도 제게는 그런 행운이 깃들지 않았던 모양이로군요. 뭐, 티아를 가졌을 당시에도 꽤나 힘들게 임신을 했던 만큼, 굉장히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쯤은 익히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요.”
상당히 교태로운 눈웃음을 짓고 있던 아리엘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야생동물처럼 나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어, 아리엘?”
그녀의 그러한 움직임에 내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자, 내가 물러선 거리만큼 그녀는 내게 접근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자리의 끝부분에 도달을 해버리고 말았다.
“여기는 야외인데...? 혹시라도 누가 볼 수도 있으니 그런 일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
“헛소리를 잘도 짖으시군요. 그래서 아이리스와는 테라스에서 그리도 질펀하게 즐겼던 것인가요?”
“.....”
“걱정하지 마시길. 당신은 그저 힘을 빼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것도 전부 티아를 하루 빨리 다시 만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니, 티아의 아빠로서 뒤꽁무니를 빼는 한심한 짓만큼은 하지 마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리엘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더니, 이내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가져다 대었다.
“...으, 읍. 아리, 엘...”
“함부러 입 열지 마세요. 키스 하는데 방해가 되니까요.”
“.....”
...뭐, 가끔은 여성 상위 같은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을 하며 나는 달빛 아래에서 아리엘의 손에 나의 몸을 조용히 맡겨나갔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임신을 하기 3개월 전의 있었던, 어느 날 밤의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