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94화 (194/201)

(EP.194)17. 여신(女神) 아리아 - 12

“...여신, 아르벨.”

나는 내 눈앞에서 아리엘의 모습을 한 채, 아리엘의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으며, 아리엘의 육신을 입은 채로 아리아의 신성(神聖)을 안정시켜준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고 말았다.

“...흐응.”

내 입에서 아르벨이라는 이름이 새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나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를 향하고 있는 그녀의 자애롭고 인자한 미소에, 나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맛보고 말았다.

틀림없었다.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닿지 않는 아득한 천상을 올려다보는 이 느낌,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작고 왜소한 존재인지 깨닫게 만드는 절대자 특유의 신성. 내 눈앞에 있는 아리엘은 틀림없이, 아리아와 동등한 위계에 놓여있는 여신임이 분명하였다.

“제가 여신이라는 것을 잘도 눈치 채셨군요. 하지만 제가 아르벨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으셨던 것인가요? 제가 클라리스나 세피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인가요?”

짓궂은 눈빛을 한 채로 짓궂은 질문을 물어오는 그녀를 향해, 나는 방금 전보다는 여유를 되찾은 모습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리아라는 전례가 있다 보니, 신성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야 간단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여신 클라리스와 여신 세피아는, 현재 데브하르트의 손에 의해 봉인된 상태이죠. 설사 제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들의 봉인이 풀려났다고 한들, 그들은 아리아가 그리했던 것처럼 본인의 육신을 입은 채로 세상에 출현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의 당신처럼 아리엘의 신체에 강신(降神)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아리엘은 당신으로부터 권능을 하사받을 만큼 당신의 총애를 받는 신자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녀에게 권능을 하사해줄 수 있다함은, 바꿔 말해 당신의 의식이 언제든 그녀에게 강림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생각합니다.”

“...정답입니다. 아주 훌륭하군요. 카인 폰 에스텔.”

나의 막힘없는 대답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어준다. 그리고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두 눈을 질끈하고 감아버리고 말았다. 현재 그녀의 얼굴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이 틀림없는데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대체 왜 심장이 이리도 두근거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현재 아리엘의 신체를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면, 아리엘 본인의 의식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걱정하지 마시길. 아리엘은 현재 제 권능을 무리하게 빌려 쓴 여파로서 잠시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강신을 해제하고 떠나간다면 그녀는 다시 스스로의 신체의 통제를 되찾을 수 있겠지요. 뭐, 애당초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가 강신을 할 수도 없었을 테니 결과적으로 보자면 무의미한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특수한, 상황이라고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일까. 그러니까, 원래 같았으면 여신 아르벨은 아리엘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이 땅 위에 현신할 수 없었다는 말인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지상을 다스리던 네 명의 여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 땅 위를 떠나게 되었으며 이 세상을 떠받치는 부담을 세계수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담을 다른 곳에 떠넘긴다고 하니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희는 이 세상의 유지를 포기하는 대가로서,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권리를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방금 전, 이 땅 위에 여신 아리아가 다시금 부활하게 됨에 따라 저 또한 한정적으로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본신의 현현(顯現)은 꿈도 꿀 수 없지만, 지상 위에서 저와 가장 강력한 연결 고리를 지니고 있는 아리엘을 매개체로 하여 당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정도의 간섭은 행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지상에 내려온 이유란 다름 아닌-”

“예. 다름이 아니라 천 년 전, 제가 매듭짓지 못했던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 그녀는 나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져간다. 그녀는 무언가 아련한 눈빛을 한 채로, 아리아의 신성이 봉인되어 있는 반지를 유심히 바라본다.

“아리아는, 여신들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이였습니다. 아마, 끝과 종말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인간들에게 숭배를 받았기 때문이겠죠. 천 년 전, 데브하르트가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두 손으로 꽉 하고 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두 손에 은은한 광택이 맺히더니 이내 반지 또한 원래의 형태를 잃고 하나의 광구(光球)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리아를 가두고 있는 봉인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이 땅 위에 다시금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겨울이 대륙을 휩쓸게 된다는 것도, 전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미래를 잘 알면서도 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지상에 간섭할 권한을 전부 상실하고 말았으므로.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해야, 이 아이에게 신탁을 내려 겨울을 부르는 원인이 북쪽에 있다는 단서를 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죠.”

그녀는 스스로의 두 손을 활짝하고 펼친다. 그녀의 손에서 해방된 광구는,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처럼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카인 폰 에스텔. 당신은 잘 해주었습니다.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당신은 아리아를 받아주었으며 그 끝에 아리아를 멈춰 세워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그녀에게 닿았으며, 그녀 또한 이리 당신의 품에서 고요히 잠들 수 있게 되었죠. 저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이치이자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뒷마무리는 제가 감당해야 하는 노릇이겠지요. 아리아가 쌓아온 업(業)은, 제가 모두 감당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그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역할입니다.”

그녀는 신을 향해 제례를 올리는 신관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하고 벌렸다. 다음 순간, 광구는 원래 그리했어야 했다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팍에 조용히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의 무언가가 변화하였다. 무엇이 변화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끝났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깨달았다. 이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기나긴 여정은, 이것으로 전부 마무리 된 것임이 틀림없다고.

“방금 전, 아리아의 신성을 하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녀는 이제 여신도 아니거니와 세상을 파멸시킬 마녀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 곁에 존재하는 평범한 계집아이일 뿐.”

그녀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있는 아리아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린 사람처럼 스스로의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친다.

“아, 그렇군요. 자고로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여신을 위해 공을 세운 용사에게는 신에게 소원을 빌 권리가 주어지곤 했었죠. 그렇기에 저 또한 당신에게 소원을 빌 권리를 한 가지 선사하고자 합니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아리아의 신성이 소량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 어지간한 소망쯤은 성취할 수 있겠지요.”

“...소원, 말씀이십니까?”

상당히 뜬금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말을 해봐야 애당초 이쪽은 그렇게 간절히 이루고픈 소원이 마땅히 없는데.

“예. 그렇습니다. 사양은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그 어떠한 소원이라도, 실현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전부 성취시켜 드리겠습니다.”

어서 빨리 말을 하라며 기대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어떠한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과연 이런 소원을 빌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키리에와 세계수 사이의 관계를 끊고 그녀의 불로불사를 지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답인지, 그녀의 눈이 약간 비스듬하게 위로 올라간다.

“...키리에라면, 저도 익히 알고 있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과 대립을 하였으며, 당신에게 살기를 내비추었던 그 여인을 위해 당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저는 그녀를 위해 당신께서 제게 주신 그 권리를 사용하기를 희망합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의 눈에는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인간스럽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스스로의 소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소원으로 삼고자 하시는군요. 정말로 그것으로 만족하시나요? 당신이 지금 내뱉는 말 한 마디에 당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데요?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막대한 권리를 고작해야 타인을 위해 소비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키리에는, 키리에는 제게 있어 고작 타인이라고 칭할 여인이 아닙니다.”

순간, 언젠가 ‘끈’을 통해 보았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고 말았다. 키리에는 스스로의 삶을 증오하는 여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에 걸쳐 삶을 살아온 대가로, 그녀는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기억의 색채를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모래처럼 손바닥에서 넘쳐흐른다는 끔찍한 악몽을, 그녀는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직면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의미하게 사라져가는 추억을 마주하더라도 더 이상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감정이 아니라, 기억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도 아주 많이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함께 하고, 함께 웃고, 나로 인해 아파했던 순간의 기억들이었다. 비록 타인이 보기에는 비루하고, 보잘것없으며, 아무 것도 아닌 시시한 순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나는 그녀가 그 순간을 얼마나 값지고 귀하게 여겼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워하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같이,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이 허망한 무언가로 변화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였다. 감정이 없는 인형으로서 불로불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을 품에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키리에가 스스로의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설령 위선이라고 해도, 그녀가 계속해서 살아주기를 바랬습니다. 살아서 제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습니다. 지금까지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만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욱 행복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다. 설령 내가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지금 내가 부리는 욕심이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저주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녀가, 살기를 바라였다. 스스로의 삶을 증오한 끝에 죽음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였다. 그녀가 아주 많이, 행복해지기를 소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과적으로 불행해지고 만다. 세계수와의 연결로 인한 불로불사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그녀는, 영원히 고통을 누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키리에 본인이 밝혔다시피, 그녀가 바라는 소망은 인간의 손으로는 닿지 않는 종류의 무언가다. 하지만 지금, 한 가지 가능성이 생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신께 이러한 소망을 바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지금까지 저를 암중에서 지켜주었으며, 저라는 보잘 것 없는 남자를 자신의 반려라고 인정해주었으며, 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힘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저의 차례입니다. 저 또한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당신께 감히 청을 올리고자 합니다. 저는 키리에가 불로불사에서 벗어나, 언젠가 생명이 마땅히 맞이해야 할 죽음과 마주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나의 대답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스스로의 손을 휘젓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눈앞에 있던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는 자그마한 실이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저 실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저 실이 비록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가느다랗기는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떠한 힘으로도 저 실을 끊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여간. 답답하기 짝이 없는 남자로군요. 하긴, 당신의 그런 점이 아리엘 이 아이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녀는 조금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실을 가리켰다.

“바로 저것이 키리에와 세계수 사이의 연결입니다. 그녀의 존재를 불로불사로 만들어주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녀의 손끝에서 그 때와 같은 무형의 기운이 솟아오른다. 너무도 아득하면서도, 고귀하고, 한낱 인간의 육신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저 기운. 인세의 모든 것을 전능(全能)으로 치환할 수 있는 그 기운은, 다름 아닌 신성이 틀림없었다.

“천 년 전, 세계수는 지상을 떠난 저희들을 대신해 세상을 떠받드는 역할을 짊어졌습니다. 만일 세계수에 어떠한 일이 생긴다면 이 세계가 무너질 위험성이 있었기에, 세계수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수호자를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한 여인의 삶을 끝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군요.”

그녀는 신성에 감싸인 자신의 손가락을 세계수를 향해 가리켰다. 그 순간, 그 무엇으로도 끊어질 것 같지 않던 실이 환염(幻炎)에 휩싸이더니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상에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카인 폰 에스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생명의 삶이란 유한하며, 삶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만남 속에는 이별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누군가와의 이별이란 아프고 슬픈 것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손에 남는 것이 아픔뿐일 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애도를, 누군가를 향한 슬픔을,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추억을 가슴에 품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로불사의 몸으로 영락하게 된 키리에가 소중히 여기고자 했던 마음은, 낡아빠진 무언가로 전락하여 땅바닥에 뒹굴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이 죽어버린 끝에 살아있는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하고 끝이 없다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이제 필멸자입니다. 버젓이 수명이 존재하며, 다시금 성장도 하고, 끝을 맞이하면 하늘로 불려가게 되는 일반적인 사람 말입니다.”

아리엘의 얼굴로 은은하게 웃어주던 그녀는, 이내 나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이것으로서 남은 신성을 전부 써버렸으니, 제게 주어진 시간은 이것으로서 끝이겠군요. 뭐 혹시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신의 의문을 해소할 시간 정도는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장난기 어린 말에, 나는 무언가를 좀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그녀에게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이리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순간, 그녀의 눈꺼풀이 아주 약간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 땅 위에 남겨진 데브하르트의 마지막 후손 말씀이시군요. 저 또한 그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아리엘의 기억을 전부 공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흡사 타인을 일컫는 듯한 말투.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투를 통해, 모종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천 년 전, 당신께서는 모종의 이유로 데브하르트를 도와 다른 여신을 봉인하는데 힘을 빌려주었지요. 조금 주제가 넘는 일 일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가서 말입니다.”

나의 말에 그녀는 불쾌감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재미있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맞춰보시죠. 제가 다른 자매들을 배반하면서까지, 한낱 인간의 편을 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잠깐 숨을 들이킨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아이리스는...”

“당신의 피를 이어받은, 마지막 후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은 들려오는 소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풀잎이 아른거리는 소리도 없는 공터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뒤쪽으로 저물어가는 태양과 그로 인한 늘어진 긴 그림자 뿐.

“데브하르트라는 남자는, 참으로 멍청한 사내였죠.”

그녀는 조용히, 스스로의 입을 열어 보였다. 어딘가 아련하고, 어딘가 과거를 더듬는 듯한 눈빛을 한 채로.

“그는 인간 주제에 여신들을 가련히 여긴, 주제를 모르는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계절이 의신화 된 끝에 이 땅 위에 남아 영원히 인간들을 다스리는 저희들이 은연중에 지쳐있었다는 것을 알아준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저희를 여신이 아니라 노예라 칭하였습니다. 앞으로 영겁토록 인간들에게 숭배를 받으며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갈 저희를 동정해주었습니다.”

“...그 끝에 그는 저를 사랑하게 되었고, 저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와의 사랑이 찰나의 무언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저 또한 제가 누리고 있는 그 순간의 행복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 키리에 엘 데나리스가 당신과의 추억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듯 말입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포개었다. 순간, 나는 그것이 그녀의 고유한 버릇임을 깨달았다. 여신이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남자와 마주하였을 때 무심코 나오는 버릇.

“하지만, 그런 그라는 남자도 결국 저를 안식에 들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정에 얽매인 끝에 그것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정말 많이도 싸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대체 왜 그와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을 고작해야 그런 시시한 언쟁으로 가득 채워 버렸는지 모르겠군요.”

내뱉고 있는 험한 말과는 달리, 그녀는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난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했던 추억을 가끔 꺼내어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저의 삶은 이토록 온화하고 따스했으니까요.”

그녀의 몸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허공에 녹아들어가기 시작한다. 현세에서 그녀라는 존재가 추방되고 있음을 알리는 명확한 증표였다.

“아무래도 정말로 작별의 시간인 것 같군요. 인간에게 섬겨지고, 인간을 위하며, 인간에게 지닌바 의무를 다한다는 숙명을 가진 여신들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앞으로는, 당신들이 이 땅 위의 역사를 만들어가 주세요.”

그리 말을 하며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카인 폰 에스텔, 지금 이 순간 지상에 남겨진 마지막 여신으로서 그대를 축복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이리스를 잘 부탁합니다. 그녀가 곧 낳게 될, 저와 데브하르트의 마지막 후손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엘을 잘 부탁합니다. 저 대행자로서, 일생을 고통 속에서만 보내야 했던 그녀를 잘 부탁드립니다.”

“키리에를 잘 부탁드립니다. 저를 비롯한 여신들이 무책임하게 지상을 떠난 탓에,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그녀를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아리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인간에게 경원시 받고, 한 발 떨어져 그들의 행복을 지켜봐야만 했던 저의 자매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당신과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에 도달해야만 했던 그녀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신 아리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인간 아리아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입니다. 당신을 위해, 그녀를 위해, 서로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여행을 떠나게 해주세요.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을.”

“그러니 마지막까지 행복하시길. 저 멀리서라도, 당신들을 향한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빛이 눈물처럼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자리에 맴돌던 은은한 신성은 물론이거니와, 상공에 맴돌던 눈보라 또한 걷히고 말았다.

주위에는 이미 아무 것도 없다. 전부 날아가 버린 일대는, 대수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황량한 평야가 되어 있었다.

눈보라가 걷힌 하늘의 위쪽에는 태양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평선에 위쪽은, 황혼이 비춰지고 있었다.

“.....”

이로서 끝이 났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그것도 확실하게.

잠시 스스로의 눈을 감아보았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

평생토록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염원을 하며 그 광경을 혼에 조용히 새겨 나간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대기 중에는 더 이상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닌, 따스한 온기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서 우리를 감싸 안고 있던 겨울은 끝이 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봄이, 우리를 향해 다시금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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