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17. 여신(女神) 아리아 - 08
흔히들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하나의 원으로 비유할 수 있는 노릇이라고.
만남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이별이 존재하는 법이며, 그러한 이별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만남이 피어나는 법이노라고. 일련의 과정은 끊임없이 순환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끝도 시작도 존재하지 않기에 하나의 원이나 다름이 없는 노릇이라고.
사람이란 본디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교류 속에서 활력을 얻는 생물이다. 우리가 어떠한 이야기를 재미있어하고, 시를 아름답다고 여기며, 음악을 감미롭다고 하는 것은 전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결국 타인과의 만남과 교류를 즐거워하는 것은 전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안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그 빈자리를 채워 나간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또다시 돌고 돌아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기에 활력을 보충할 수 있으며 그 끝에 하나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가 소비한 활력을 보충할 수 없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제 아무리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감싸며, 위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여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 속에 포함되지 않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인간들에 비해 폐쇄적이라 할 수 있는 엘프들의 사회 속에서도, 그녀는 다소 별격의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지위, 단순히 인간들에 비해 수명이 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불로불사를 이룩한 육신,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고 닦아온 별격의 무예.
그 모든 요소들이 한 데 뭉쳐, 키리에라는 여인을 원의 바깥으로 조용히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키리에 또한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다른 이들과 애써 어울리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혼자가 되는 것 따위, 그녀에게 있어 너무도 익숙하기만 하였으니까.
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보아왔고 많은 것을 겪어 왔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었다. 개중에는 친구도 있었고, 동료라고 부를 만한 자도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많은 것을 함께 하고, 많은 것을 함께 나누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한 치의 예외 없이, 그들은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곁에 끝까지 남아준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별의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연스레 그녀의 곁에서 떠난 누군가도 있었고, 그녀를 보고 죽지 않는 괴물이라며 두려움을 품고 도망친 이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더 이상 만남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곧, 그런 것에도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는 많은 것에 익숙해져간다. 만남의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별의 슬픔에도, 타인과의 교류 없이 홀로 존재하는 고독에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세월을 지내고 있는 자신의 생애 그 자체에도. 전부.
한 때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던 감정은 점차 메말라간다.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감정의 색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이 스스로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학습된 경험인 것인지 이제는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그녀의 마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줄곧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만 한 인생이었다. 떨어뜨리고 온 것을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잃어왔다. 그렇게 보내온 시간이 무려 천 년. 이제는, 그 어떠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아할 자신이 있다고 자부를 했었건만.
언젠가부터, 이것만큼은 결코 잊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생겨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기나긴 삶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반려자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남자와의 기억. 그것만큼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였다.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때로는 그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하는 여인과 명운을 다하며,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반짝이는 별과 같았기에 그녀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대의 뒤편에서 그의 행적을 얌전히 지켜보던 동안, 그녀는 어느 새 그의 뒷모습만을 쫓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다른 여인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는 장면을 보며, 저 여자의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자신 또한 그의 애정과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기나긴 일생 속, 최초로 누군가를 탐하고 누군가를 아끼며 누군가를 가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만,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를 향한 이 감정 또한 스러지고 마모된 끝에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무언가로 전락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미래가 너무도 두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언젠가 잊게 될지도 모른다. 흡사 책에서 읽은 내용처럼, 누군가에게 흥미 본위로 들은 이야기처럼, 그와 관련된 기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기는 미래의 자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싫다. 그것이, 싫다. 지금의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가, 너라는 사람을 담아내고 있는 이 풍경이, 평생토록 잊고 싶지 않은 너와 함께 한 이 시간을, 덧없는 무언가로 가볍게 표현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키리에 엘 데나리스가 너무도 싫었다.
지난 천 년, 그녀는 줄곧 방황해 왔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도, 목적도,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한 채 너무도 긴 세월 속에서 마모를 거듭해오기만 하였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지금에야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자기 자신보다 더욱 아끼고, 애가 타도록 소중하며,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무언가를 간신히 발견해낼 수 있었다.
꿈을 꾸었다. 불로불사의 괴물인 자신이, 그의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늙어가며 그의 옆자리에서 죽는다는, 너무도 작고 사소하기만 한 하나의 꿈을.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땅 위에 진정으로 신의 기적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한, 그녀의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수에 영혼과 육신이 귀속되어 있는 그녀는,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죽음을 맞이할 수가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소망하였다. 만약, 자신이 그를 향해 품고 있는 이 마음이 무의미하게 사라지게 될 바에는,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전부 끌어안은 채로 죽음이라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불로불사의 몸이 된 당신에게는 죽음조차 쉽게 바랄 수 없는 사치에 지나지 않지. 그렇기에 이 땅 위에 여신을 강림시킨 것이 아니던가? 전지전능하다고 일컬어지는 여신이라면 세계수의 권능을 뛰어 넘어 당신을 완전히 죽여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품었기에.”
그리 말을 하며 카인은 자신의 검에 묻어 있는 키리에의 선혈을 한 차례 스러 내리더니 이내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집에 검을 도로 꽂아 넣었다.
“당신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소원은 결코 이룰 수 없을 걸. 왜냐하면 나는 지금부터 여신 아리아를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릴 생각이거든. 아리아를 여신과 같이 이상한 것으로 계속 놔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에스텔 공작가의 시녀 아리아로 되돌릴 생각이야. 나는 원체 욕심쟁이인지라, 손에 한 번 들어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되찾으려는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이거든.”
다행히 이 드넓은 대수림에서 여신 아리아가 위치한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 질문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전신을 쩌릿쩌릿하게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장소가 한 군데 존재하였으므로.
다름 아닌 세계수가 위치해 있는 곳. 대수림의 정중앙.
그곳이야말로 모든 결판이 날 장소이며, 여신 아리아가 이 땅 위에 강림해 있는 장소임이 틀림없겠지.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리아. 지금 너를 되찾으러 갈 테니.
지금 이 순간, 아리아가 위치해 있을 것이 분명한 방향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바로 그 때.
“...카인. 정말로 진심인가요. 당신은 진심으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인가요.”
그의 등 뒤에서 멍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곳에는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자신의 상처를 움켜쥔 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키리에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나는 아리아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당신은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나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각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그 결과 나는 당신을 쓰러뜨렸지. 그러니 패배자인 당신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 무언가 떠들 권리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
그 말에 키리에는 내뱉으려고 했던 말을 다시금 목구멍 속으로 넘겨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방금 전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을 걸고 격돌하였으며, 자신은 결국 그에게 패배하였다. 이제 와 스스로가 했던 말을 뒤집고 그의 앞을 가로 막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니.
“...한 가지, 충고 드리죠. 현재의 그녀는 당신의 시녀였던 아리아가 아니며, 저희들이 한 때 상대했던 겨울의 마녀도 아닙니다. 당신이 마주해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천상의 여신 아리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인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격을 지닌 이입니다. 만일 그녀를 정말로 구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녀를 우리와 같은 판으로 끌어내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키리에의 진심이 어린 그 충고에 카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짓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당신이 우리에게 준 힌트 덕분에 말이지.”
카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금세 눈치 챈 키리에가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제 악취미였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한 행동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지. 그리고 비앙카와 아이리스도 내 의견에 동의하더군.”
그리 말을 하며 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더 이상은 키리에에게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아리아를 구하러 갈 시간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에스텔 공작가에서 마저 하도록 하지. 모든 일이 끝나고 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시간 밖에 없을 테니까.”
방금 전까지 자신과 서로 간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였던 주제에 작금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자연스레 자신과의 나중을 기약하는 그의 뒷모습을, 무언가에 흘린 듯 멍하니 바라본다.
...정말, 물러 터진 남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물러 터진 모습조차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자신 또한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점차 작은 점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본다. 자신의 소망을 용서 없이 부순 채 천상에 닿고자 하는 저 남자가, 스스로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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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숨이 찬다. 방금 전 모든 정신력과 집중력을 쏟아 부은 격전을 치룬 탓인지, 아니면 아직 절반도 아물지 못한 전신의 상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분 나쁠 정도의 마력 때문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호흡을 거듭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중심부로 가까이가면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과 경외감이 커져만 간다.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 이 일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고작해야 찌꺼기에 불과한 여파가 이 정도인데, 현재 그녀가 본신에 담고 있는 힘이란 대체 얼마나 거대하다는 의미일까.
“.....”
벌써부터 죽는 소리는 하지 말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저,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지나지 않을 뿐.
아주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과 약간이라도 있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망이다. 아리아를 구할 수 있고, 아이리스에게 장담을 했던 대로 다섯 명이서 웃으며 돌아갈 수 있다는 아득한 희망을 담아낸 말.
그렇기에 걷는다. 발걸음 속에 어떠한 망설임도 담아내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서 걸어 나간다.
그 끝에, 도착하였다. 대수림의 중심,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전설 속의 나무. 세계수의 바로 앞에.
그리고 내가 찾던 그녀는, 세계수 앞에 마련되어 있는 제단의 위쪽에 조용히 스스로의 몸을 부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이곳에 당도하였군요. 가급적이면 당신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만.”
세상에 다시없을 한기를 전신에 두른 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등에 진 채로 그녀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드레스의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손님’을 환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까지 온 손님을 환영하지 않는 것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곳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는 만큼 당신께 다시금 소개를 올리고자 합니다.”
한도 따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 현세에 있어 전능이라고 부를 법한 권능을 전신에 휘감은 채 하나의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다시금 인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아리아.”
“사계절 중 겨울을 관장하고 있는, 겨울의 여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