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9)17. 여신(女神) 아리아 - 07
“.....”
그리하여, 싸움의 결판이 이루어졌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자와, 실낱과도 같은 가능성에 스스로의 몸을 맡긴 자. 그들 사이의 존재하던 차이점이라고는 고작해야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만, 그것은 현재에 이르러서 그들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서로 간에 오고 가는 말은 없다. 그저, 그들의 주위를 울리는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는 지표가 되어주기만 할 뿐.
“...카인.”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숨결이 아닌 하나의 이름이 새어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가장 먼저 내뱉은 이름이란 다름 아닌 현재 그녀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고 있는 어느 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래로 축 늘이고 있던 팔을 살며시 들어, 자신의 가슴에 검을 꽂고 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어째서, 제 심장에 검을 꽂아 넣지 않은 것이죠.”
그녀는, 자신의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꽂혀 있는 그의 검을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그녀는 보았다. 카인이 자신이 쏘아 보낸 저격을 그대로 베어버린 후 이곳에 도달하기 1초 전,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히 자신을 죽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미움을 받을 각오 정도는 이미 하고 있었다만, 그가 자신을 향해 내비추는 살기를 직접 마주하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아파오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만, 어쩌면 그녀는 내심 이러한 자기 자신을 그가 막아준다는 결말을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기에, 그의 검을 순순히 받아들이자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자신을 가로막고, 자신을 멈추고, 자신을 꾸짖어주는 상대가 다름 아닌 그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녀에게 검을 꽂아 넣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기 직전의 순간까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으며,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번민을 지우지 못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결국, 그는 그녀의 심장이 아닌 오른쪽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그녀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키리에 정도의 실력자 쯤 된다면 가슴이 뚫렸다고 한들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국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키리에라는 여인을 떨쳐내는 것에 실패를 한 모양이다.
“...어리석군요. 너무도 어리석어요. 적을 눈앞에 두고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나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적을 향하는 무가치하고 값싼 동정은, 언제고 자신을 해할 수 있는 비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인가요.”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의 날을 꽉 하고 붙들더니, 이내 스스로의 가슴팍에 꽂힌 검을 천천히 뽑아낸다. 맨손으로 칼날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과, 방금 전까지 검이 꽂혀 있던 그녀의 가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 피로 범벅이 된다.
...물론, 키리에라는 여인에게 있어 그 따위 아픔은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다.
“...보세요.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제게 마땅히 내려 주셨어야 하는 결말입니다.”
말릴 틈 따위는 없었다. 배어나오는 피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두 손으로 검날을 쥐고 있던 키리에는, 그 검을 자신의 왼쪽 심장을 향해 있는 힘껏 찔러 넣는다.
푹-
가슴에 날붙이가 꽂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녀가 스스로의 심장을 겨냥하고 찔러 넣은 그 검은 너무도 손쉽게 그녀의 심장을 관통하고 말았다. 마치 한 송이의 붉은 꽃이 나풀거리는 것 마냥, 사방에 붉은 피가 이리저리 튀기고 말았다.
“...윽-!”
아무리 키리에라고 할지라도 가슴이 관통당하는 아픔은 쉬이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인지 그녀의 입에서 애처로운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전부.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했을 것이 분명한 관통상을 눈앞에 두고서도 카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키리에의 겉모습은 너무도 멀쩡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의 존재를 예외로 둔다면 말이지만.
“보세요. 저는 현세에 세계수가 건제한 이상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불로불사의 괴물입니다. 이렇게 심장에 검이 꽂히더라도, 목이 베이더라도,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더라도, 세상의 그 어떤 죽음을 가지고 오더라도 그 때 당시만 괴로워할 뿐 저는 결코 죽음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제가 짊어지고 있는 업(業) 그 자체이니 말입니다.”
그녀가 불로불사의 존재라는 사실은 카인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회귀 전, 겨울의 마녀와의 일전 당시 키리에가 몇 번이고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 뒤 몇 번이고 다시금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물러 터졌어요. 저는 현재 당신의 적입니다. 오직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리아를 강제로 이곳으로 데려오고, 아리엘을 사주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당신을 향해 살기를 내비추기까지 하였죠. 당신은 지금 당신의 적에게 동정을 내 비춘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그리 행동하면 아니 되었어요. 제게 아무런 인정도 내비추지 않은 채 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을 터. 만약 제가 끝까지 당신에게 끝내 승복하지 않은 채, 무가치한 저항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생각을 하였더라면 당신은 대체 어찌할 심산이었나요...!”
흡사 자신을 향해 호도라도 하는 것과 같은 키리에의 그러한 발언에, 카인은 무언가 느끼기라도 한 듯 스스로의 미간을 꿈틀거리며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물러 터졌다고? 내가?”
키리에의 앞으로 한 발짝 걸어간 그는 키리에의 심장에 꽂혀 있는 검의 손잡이를 꽉 하고 붙잡더니, 이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검을 뽑아내었다.
“윽...!”
순간, 키리에는 자신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인지 결국 한 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하고 싶었던 말인데.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곳에도 저곳에도 여지를 남겨둔 쪽은 당신이 아니던가, 키리에?”
심장에서 느껴지고 있는 격통 때문인지, 아니면 정곡을 찔린 탓인지. 전신에 언제나 넘쳐흐르던 여유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이는 바닥에 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한 명의 무력한 여인 뿐.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입으로는 나를 적대하겠다고 실컷 떠들던 주제에 정작 당신의 행동 속에 일관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맨 처음에는 평상시와 같은 당신의 악취미이려니 하고 대충 넘겼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던 바로 그 때,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내가 아리아의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별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는데, 비앙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 말을 하며 카인은 이곳에 당도하기 전 비앙카와 나누었던 문답의 일부를 떠올려 보았다.
- 이름이라. 대충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긴 한데, 키리에 그 여자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이름’이겠지.
- ...본질이라고?
- 그래.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아리아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고귀한 여신님 중 한 분이잖아? 이름이란 단순히 존재를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 그 자체를 증거 하는 길이거든. 즉, 아리아 정도의 존재쯤 되면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신격을 대변하는 상징과 같은 증표라고 할 수 있을 걸.
- 그런데 내가 이름을 지어준 것과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 말했잖아.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증거 한다고. 아리아의 원래 이름은 여신 아리아. 하지만 그녀가 봉인된 지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가 극히 드물게 되어버리고 말았지. 게다가 우리들은 그녀를 그저 마녀로만 규정하고 그 정체를 제대로 규명하려 들지 않았잖아? 즉, 그녀는 스스로의 존재를 규명하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힘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야.
- 하지만 그녀가 너와 함께 과거로 돌아오고, 네가 그녀에게 ‘아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상황은 달라지고 말았지. 그녀는 너로부터 ‘아리아’라는 이름을 받은 그 순간 자신의 본질과 신성(神聖)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즉, 네 곁에 머물고 있던 존재는 처음부터 겨울의 마녀가 아닌 겨울의 여신님이었던 셈이지.
- ...쉽게 말하자면, 원래의 역사 속에서는 1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힘을 회복했어야 하던 그녀가,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기에 고작 2년이라는 시간 만에 본래의 힘을 거의 되찾았다는 말인가?
- 그래. 그리고 이 추세대로였다면 그녀는 아마 1년 안에 온전한 여신으로 각성할 수 있었을 테지. 물론, 그 끝에 이 세상에 무엇이 닥쳐왔을지는 내가 함부러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가장 큰 의문점이란 다름 아닌, 당신이 나를 만나기 위해 에스텔 공작가에 방문했던 시기 그 자체였지. 만약 당신이 처음부터 스스로의 소원을 위해 나를 등지고 아리아를 이용할 생각을 했었더라면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나와 접촉을 하는 편이 가장 좋았을 거야. 당시에 나는 1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적응하느라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아리아 또한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당신이 세계수의 곁을 벗어나 에스텔 공작가를 찾아온 시기는 다름 아닌 내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돌아왔을 그 무렵이었지. 물론, 당신이 이곳에 당도하였을 때쯤은 내가 제도에 가 있느라 당신과 길이 엇갈리기는 하였지만.”
“.....”
반론은 없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늘어놓는 카인을 향해, 키리에는 어떠한 반론의 의사도 표명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긴 하지만, 당신은 데카라즈난의 그 숲에서 중년인이 여신의 신성력을 쓰는 것을 보고서 움직이기로 결심하였던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여신의 신성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신성력이야말로 이 세상에 곧 여신이 귀환할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임이 틀림없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이 세상에 겨울의 여신이 부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지. 즉, 키리에 당신 또한 나름대로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하.”
카인의 그 말을 얌전히 듣던 키리에는, 이내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친다.
“...이것 참,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하지만 동시에 소설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군요. 저는 당신의 추측대로 그렇게 착하고 선량한 여인이 아니에요. 오히려 지극히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에 지나지 않죠. 벌써 잊으셨나요? 저는 분명, 제 개인적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여신 아리아를 부활시켰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의 소망이라 할 수 있는 불로불사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여인이 그토록 추구하는 소원이 대체 무엇인지 내게 당당히 밝힐 생각은 있나?”
“.....”
순간, 그녀의 얼굴에 걸려 있던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한 번 맞춰보도록 하지. 참고로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어. 무엇보다 힌트가 이곳저곳에 뿌려져 있었으니까.”
“...아는 척, 지껄이지 마세요. 당신이 저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흡사 으르렁 거리는 듯한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카인은 피식하고 웃음만을 지어 보인다.
“미안하지만 당신에 대해서 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충분히 잘 안다고 자부하는데. 당신도 잘 알잖아? 당신이 내 행적을 살펴보는데 이용했던 ‘끈’은, 일방통행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당신이 내 과거를 들여다 보았듯, 나 또한 당신의 과거를 꽤나 볼 수 있었거든.”
“천 년이라는 시간을 넘게 살아왔으며, 다른 사람의 고뇌와 번민을 즐겁게 바라보며, 성격이 나쁘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여자가 그토록 바라는 소원이란 다름 아닌-”
“불로불사를 넘어선, 스스로의 완전한 죽음이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