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17. 여신(女神) 아리아 - 02
눈을 감은 채, 그리고 의식을 텅 비게 만든 채, 그녀는 무의식중에 다시 한 번 스스로의 과거를 떠올려 본다.
한 때 세상 모든 이들에게 여신으로서 떠받들어진 그녀의 기억.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만, 어느 여자의 이야기.
그녀는 처음부터 겨울이었다. 대지에 혹한과 눈보라를 불러오고, 모든 생명을 거두어가는 가장 무자비한 계절인 겨울이었다.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녀가 감정을 담은 얼굴을 짓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하였으며, 세상 그 어디에도 그녀의 속내를 전해들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싸늘하고, 오만하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조차 밝히지 않는다. 그저 무심한 듯, 혹은 가축이라도 기르듯 자신을 섬기는 인간들에게 축복을 건네주기만 할 뿐.
그렇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를 두려워하였다. 여신으로서의 그녀는 숭경하고 존경의 뜻을 표하였지만, 사계(四季) 중 겨울로서의 그녀를 향해서는 공포를 품고 끝내 그녀를 경원시하기에 이르렀다.
봄은 따스하고, 여름은 활기차며, 가을은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겨울의 모습 속에는, 그저 무자비함과 싸늘함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물을 바란다. 번제(燔祭)를 바란다. 자신을 숭배하는 더 많은 신도를 바란다. 자신을 향한 더 많은 신앙을 바란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알기 쉬운 무엇이라도 원하고 갈구하였더라면, 인간들이 알기 쉽고 이해하기도 쉬운 목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들도 그녀를 향해 그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겠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인간들을 향해 스스로의 속내를 밝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을 향한 애정의 대가는 언제나 공포와 두려움뿐. 그녀가 인간에게 베풀었던 자비는, 다시금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고 공중에 덧없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조차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녀를 향해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어느새 그녀 본인마저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쏟아버리고 만 물처럼, 덧없고 되돌릴 수가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지상에 내려와 있는 동안, 셀 수조차 없는 시간에 걸쳐 인간을 돌보고 그들로부터 숭배를 받았지만.
최후를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기원이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어디에도 돌아올 길이 없는, 애처로운 말로.
“.....”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다시금 눈을 뜰 수 있었다. 원래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뜨는 일이 없었어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다시금 눈을 뜨고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봉인이 약해진 것일까, 누군가가 섣부르게 봉인을 건드렸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를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온전히 가두어둘 수 있을 만큼 봉인은 튼튼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 자신조차 자신이 풀려난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자신을 구속하고 옭아매던 무언가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으며.
자신은, 천 년 만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
문득,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그리고 다소곳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기로 현재의 계절은 봄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마치 한겨울인 것 마냥 눈꽃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마치, 현재의 계절이 겨울이라고 주장하는 것 마냥.
“...아.”
그제야 깨달았다. 과거, 그녀가 지상에 현현(顯現)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오직 그녀만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자매인 봄과 여름과 가을이 모두 지상에 내려와 인간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봄의 기운은 천상(天上)의 저 위쪽에서만 느껴질 뿐이며, 여름과 가을의 기운은 아예 느껴지지 조차 않는다. 아마, 그 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하겠지. 그래, 방금 전까지의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위험하다. 이미 지상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오직 겨울만큼은 지상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 세상을 지탱하고, 그녀의 힘을 억제해줄 다른 자매들이 없음에도 그녀는 지상에 발을 내딛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앞으로 대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
예측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마, 겨울이 올 것이다. 끝이 없는 겨울이. 그리고 끝나지 않는 겨울이.
그리고 그 끝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생명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는 봄과, 생명의 싱그러움을 상징하는 여름과, 생명의 풍요를 상징하는 가을과는 달리, 겨울은 오직 생명의 죽음만을 상징하고 있었으니까. 싸늘한 눈보라와 혹한 속에서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고 그 끝에 많은 인간들이 덧없이 죽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설사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세계의 섭리를 관장하는 질서나 다름이 없는 존재. 겨울의 의신화(擬神化)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죽음을 택한다고 한들 세계는 시간을 거꾸로 되감아서라도 그녀를 다시 되살리고 말겠지.
결국, 앞으로 다가올 환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끝없는 겨울이 얼마나 지속이 되건, 인간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건, 세계가 멸망을 하게 될 지도 모르건 간에, 그것이 그녀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일어나게 될 일들은, 전부 인간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다. 만약 인간이 그녀를 봉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치세에 불만을 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업(業)에서 비롯된 일. 그녀는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보살피는 존재였지, 인간의 죄악을 책임지는 역할까지는 떠맡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잘못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물며, 그녀를 모시는 극소수의 일족을 제외한다면 인간들은 언제나 그녀를 경원시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를 숭배하는 척을 하였지만, 정작 뒤에서는 그녀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오직 두려움으로서만 그녀를 대하지 않았던가.
모든 시간, 모든 공간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한결 같다. 그들은 언제나 겉과 속이 다르며, 스스로가 선이라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악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그녀는 실로 알기 쉬운 악이었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싸늘한 태도로서 만물을 대하며, 사계 중 유일하게 생명의 종말을 관장하는 존재. 이 어찌나 알기 쉬운 악이며, 어찌나 간편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이란 말인가.
지난해의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것도, 올해 농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사람이 죽는 것도, 사람이 추한 것도, 그 모든 것을 종말을 관장하는 겨울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그런 식으로라도 스스로의 선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의 모습을, 그들의 위선의 실체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러한 외침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일 뿐.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이 저들에게는 닿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인간이 나올 것이라 기대를 하며.
하지만 그게 이루어진 적은 없다. 단 한 번도.
지금 그녀가 마주한 상황과 천 년 전의 그것과의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가 원인이 되어 거대한 환란이 일어나게 될 예정이라는 점뿐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따위 것은 전부 변명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세상은 여신이라는 존재가 그저 동화책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린 인간들만의 세상.
현재의 그녀는 세상에 끝없는 겨울과 죽음을 불러오게 될 사악한 겨울의 마녀.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악이 된 여인과, 세상 그 자체가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이었다.
...그래, 좋다. 어차피 그것을 원하였다면,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떠맡도록 하겠다. 너희들이 나라는 존재를 통해 끝까지 외면하고자 하였던 것들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겠다. 이 시대에서만큼은 여신이 아닌 마녀가 되어, 너희들의 종말이 되어주도록 하겠다.
“...카인님.”
다만, 그녀에게 운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라는 남자를 만나버리고 말았다는 것. 몇 개 정도 되는 우연이 있었으며, 그 끝에 그녀는 그라는 남자와 마주하고 말았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그와 마주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여행 속에서, 자신을 위해주고 자신을 감싸 안아주며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은.
- 네가 만약 나쁜 짓을 하게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너를 혼내주도록 할게.
실로 지독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그와 천 년 전에 만나게 되었더라면, 나의 텅 비고 공허한 마음을 너라는 남자가 채워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운명이 아주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
눈을 뜬다. 사방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이미 그쳐 있었다. 갑작스럽게 안구에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하였다. 흡사, 꿈의 조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기로 현재의 계절은 봄의 끝, 여름의 초입이었을 텐데 그런 사실을 전부 무시하고 하늘에서 눈꽃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래, 모든 것이 그녀가 천 년 만에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다.
“...아.”
문득, 자신의 손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다. 그녀의 손 안에는, 그저 파편에 불과한 정도의 힘이긴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전능감이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흡사 천 년 전에 그녀가 언제나 느끼던 그 기분과 너무도 흡사하기만 하였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앞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딛었다. 스스로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운 나머지, 마치 자신의 몸에 무게라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느껴지고 있었다. 무엇이 느껴지고 있었냐면, 모든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찌하여 하늘에서는 해가 뜨고 별이 지는 것인지, 세계의 바깥쪽에는 어떠한 것이 존재하고 있는지, 세상을 구성하는 진리에 대하여,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그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자그마한 몸 안에 품고 이해하고 있었다.
깨달았다. 아니,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여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그것도 회귀 전과 같은 불완전한 반쪽짜리 여신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여신으로서.
“...죄송해요. 카인님.”
그녀는 흡사 자신을 향해 사죄라도 하듯, 자그마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을 자듯 스스로의 두 눈을 감는다.
비록 스스로의 신체(神體)만큼은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만큼은 이곳이 아닌 머나먼 곳을 향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가 맞이하지 못했던 봄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짝 만개할 예정인가 보다. 최소한 그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쩌면 영원토록.
“아무래도, 이제는 저를 쉽게 혼내주실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하여, 지상에 겨울의 여신(女神) 아리아가 강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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