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83화 (183/201)

(EP.183)17. 여신(女神) 아리아 - 01

그 뒤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비앙카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유하며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일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서두른다고 되는 일도 아니며, 마음을 조급하며 먹어봐야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는 수밖에.

만약 아리엘이 곁에 있어주었다면 이 정도 상처 따위 하루도 안 되어 전부 나았을 테지만 그녀는 지금 나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없는 사람을 붙들고 징징거리는 것 또한 지극히 꼴사나운 노릇이 아닐 수 없겠지.

“카인, 비앙카가 밖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준비를 전부 끝마친다면 정문 쪽으로 나오라고 하더군.”

아이리스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 아이리스가 전력이 되지 않기에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우리와 함께 간다면, 어지간한 위험쯤은 우리에게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인세에서 가장 강한 검사 중 한 명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이리스가 이번 여정길에 참여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현재 홀몸이 아니었으니까. 제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것은 어찌될지 모르는 노릇이니,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언제나 대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걱정도 팔자로군. 아직 내 팔과 다리는 멀쩡히 움직이는 중이라네. 현재의 자네는 나를 과보호하고 있는 것과 똑같아.”

그리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리스는 결국 에스텔 공작가에 남아달라고 하는 나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현재의 아이리스와, 뱃속에 있는 아기는 나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카인,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도록 하겠네. 내가 정말로 그대와 동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그대가 상대해야 할 이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 대체 몇 백년을 살아온 것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쉬이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라네. 그와 더불어 어쩌면 다른 이들과도 검을 겨누어야 할 일이 생길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마음을-”

“아니요, 저하. 제가 저하께 돌려드릴 대답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가슴을 펴고 떳떳하게 답을 할 수 있다.

“저는 키리에를, 그리고 아리아를 죽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는 그들을 구하러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제 잘못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대의 잘못이라니?”

“그 날, 숲의 한복판에서 키리에와 아리엘, 그리고 정신을 잃은 아리아를 마주하였을 때의 일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아리아가 이미 ‘겨울의 마녀’로서의 힘을 상당수 되찾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키리에는 마치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틀 듯 제압했다는 사실 또한.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워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아리아를 손쉽게 제압해버린, 키리에라는 여인의 힘에 대하여 몸을 떨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것이 잘못이었다. 키리에를 눈앞에 두고서,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돌아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키리에가 사실 어떤 존재였건 간에, 그녀 또한 내가 책임져야할 한 명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데.

“...오지랖이 넓기도 하군.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네. 이래 뵈어도 나는 질투심이 무척이나 많은 여인이니 말일세.”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한쪽 손을 들어 나의 뺨을 살그머니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자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겠군. 왜냐하면 자네의 답답하고 때로는 멍청하게도 느껴지는 일면까지 전부 포함해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중이니 말일세.”

“...저하. 아니, 아이리스.”

아이리스는 나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살짝 내려, 나의 목덜미에 스스로의 팔을 두른다. 그녀의 두 팔은 나의 등을 꼭 하고 안아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할게. 아리아를 구할 방법은 있는 것이겠지?”

아이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다. 승산은, 충분하다.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숙지하고 있다. 아리아는, 반드시 구할 수 있다.

“그러면, 다녀오도록 해. 굳이 배웅은 하지 않도록 할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 줘.”

“무엇을?”

“돌아올 때는 아리아와 비앙카. 셋이서 함께 돌아오도록 해. 아리엘과 키리에는 어디 적당한 곳에 버려두고 와도 상관은 없다만, 이렇게 셋만은 반드시 돌아와야만 해. 약속할 수 있겠어?”

“...다섯 명이서 함께 돌아오고 싶다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내가 손해 보는 역할을 감수하는 수밖에. 원래 연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더욱 사랑하고 있는 쪽이 지는 것이라고 하잖아? 원래부터 나는 네게 지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져주는 수밖에 없지. 이런 종류의 패배는, 이제는 상당히 익숙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아이리스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내게 가까이 하더니, 내 입술을 아주 조용히 훔쳤다. 그것은 승리를 기원하는 키스이자 동시에 잠깐의 이별을 암시하는 키스였다.

“...이제 가봐. 네게는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말에 나 또한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아이리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그녀가 내게 배웅을 해주지 않듯, 나 또한 그녀에게 전언을 남길 필요가 없다 생각한다. 잠깐의 이별에 마음을 둘 필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비앙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문을 향해 성큼 걸어 나갔다. 아이리스의 말대로, 비앙카는 정문 어귀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준비는 전부 끝마쳤어? 이제 슬슬 출발해도 될까?”

“아니, 잠깐만. 아무래도 아직 한 가지가 남은 것 같아.”

비앙카의 말에 제동을 건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내 뒤쪽에는, 방금 전 내가 방을 나설 때부터 살그머니 내 뒤를 밟아오던 한 명의 인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영은 내가 뒤를 바라보자 혹여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하는 우려 탓인지 급하게 벽 뒤편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감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그러한 노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뒤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통해 내 등 뒤에 누가 있었는지 이미 옛적에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사라.”

내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사라는 벽 뒤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스스로의 얼굴을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는 것 마냥.

...뭐, 그녀의 심정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내가 만약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최소 1년간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어디를 나다닐 수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힘으로 끌어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그녀를 향해 말을 하였다.

“...사라. 잠시만 나와 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당신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그 말에 벽 뒤에 숨어 요지부동한 기색을 보이던 사라는 갑자기 쭈뼛쭈뼛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푹하고 숙인 채 나를 향해 조심스레 걸어온다. 벽 뒤에 서 있던 사라와 나 사이에 떨어져 있던 거리는 대략 스무 걸음 정도. 하지만 사라가 그 스무 걸음을 전부 걸어오기까지는 무려 10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사라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마음의 거리가 그쯤 되지는 않았을까.

“...카인.”

그녀는 차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 따위는 없다는 듯 줄곧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로부터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그녀가 그 때 느낀 감정은 조금도 희석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는 소공작님이라고 안 부르는 건가? 예전에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고 해도 꿋꿋하게 그런 명칭으로 나를 부르더니.”

언뜻 들으면 짓궂게 들리는 나의 말에 사라는 여전히 고개를 푹하고 숙인 채로 나지막하게 대답을 하였다.

“...나는 이미, 그 날 너를 네 이름을 함부러 부른 것도 모자라 이미 네게 반말까지 사용했는걸. 그런데 이제 와 다시 네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날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의미나 다름이 없으니까. 나는 추한 여자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경우를 모르는 여자는 아니야.”

...그랬었나. 그녀가 현재 내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 그 날 있었던 일을 상기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내 얼굴만큼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맹점이라면 맹점이지만.

“그렇다면 나를 마주하는 것을 왜 그리도 주저하고 있는 거지? 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망설이게 하고 있는 거지?”

“...부끄러워서. 스스로의 모습이 도저히 눈 뜨고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추하게만 보여서.”

사라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지만, 동시에 안에 어떠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나는 말이지. 스스로가 용서받기를 바랬어.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네 아픔을 조금이라도 더욱 헤아리고 싶었어. 나의 죽음만이, 네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다. 일주일 전,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로 자살시도가 끝을 맺게 된 이후 그녀는 오래간만에 냉정히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 본 스스로의 모습은, 너무도 추하게 보이기만 하였다. 그래, 카인의 기억 속에 비추어지고 있던 자신을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추하고, 역겨웠다. 정말로.

“그렇기에 도저히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나는 언제나 네게 폐만 끼치는 여자고, 언제나 네게 짐 밖에 되지 못한 여자야. 이런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또 한심해서-”

도저히,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

나는 그녀에 말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선다. 그리고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그머니 들어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실망을 하기는 했지. 그날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순간, 사라의 두 눈에 아주 작은 파문이 일렁인다. 그녀는 현재 내 앞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최대한 감추려고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 이는 미세한 감정의 격류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네게 사과 같은 걸 바랬던 적 없고, 네가 무언가 대가를 치르기를 바랬던 적도 없어. 회귀 전의 내가 너를 바라보며 아파했던 것? 미안하지만 그건 누군가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야. 그냥 내가 구질구질하고 한심한 남자였던 거지.”

사랑이란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빛이 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이지만, 한 발짝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것만큼 질척한 무언가도 드문 법이다.

...그래, 그 날 그녀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려고 했던 것처럼.

“그래, 설사 네게 어떠한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네게 어떠한 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 왜냐하면, 너는 속죄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걸기까지 했으니까.”

세상에 생명보다 더욱 귀하고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녀에게 더 이상의 그 어떠한 사죄를 바라며, 그 어떠한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 더 이상 마음 아파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굴 필요도 없어.”

아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그녀가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니 어쩌니 같은 말은 다시는 하지 마. 너와 내가 함께했던 지난날이 네게 있어서 아픔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은 싫은 일이거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어릴 적의 나와 그녀의 모습이 문득하고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그 때의 기억은 그리 아름답고 빛나는 추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가 버린 과거 속에 남는 것이 아픔 뿐 일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라. 만약 네가 내 과거 때문에 끝까지 아파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혹시 저 편에 등을 기대고 있는 비앙카가 들을까 눈치를 보며, 그녀의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이번에 내가 돌아오고 난 뒤, 우리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보도록 하자. 원래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법이라고 하잖아?”

어차피 주변에 여자가 다섯이나 되니, 이제와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서 뭐가 대수이겠는가. 기껏해야 다른 여자들이 내게 또 한소리를 하는 일 밖에 더 일어나겠는가.

“...카인.”

나는 마지막으로 사라를 한 차례 끌어안아준 뒤,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비앙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끝났어. 이제 출발하도록 하자.”

나의 말에 비앙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돌려 나의 등 뒤를 바라본 후 이내 호기심이 어린 기색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다.

“너, 방금 저 여자랑 무슨 이야기 했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저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거든. 맨날 음침한 표정만 짓고 다니더니, 실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여자였구나, 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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