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0)16. 끝이 끝나기 전에 - 09
“...그랬었군. 제사장의 후예라.”
과연, 하며 납득을 하는 아이리스. 확실히, 세르나드 백작가가 과거 초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이들의 후예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고로 가해자는 자신이 했던 일들을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반면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원한과 함께 자손 대대로 물려주곤 하는 법이니까.
“그래,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대가 제국의 4대 공작가에 물건 팔려나가듯 약혼을 맺게 된 이유일 테고 말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겨울의 여신, 아리아를 섬기던 일족인 만큼 가장 먼저 에스텔 공작가에 접근을 하였지만 수 년에 걸친 관찰 끝에 당대의 에스텔 공작은 천 년 전에 일어났던 비사(祕史)를 비롯한 다른 진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인과 파혼을 하고, 이번에는 투르니젠 공작가로 팔려나가게 되었다는 말이로군. 그런데 이번 생에는 투르니젠 소공작이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하느라 그에게 접근을 할 수 없었기에 데카라즈난 공작가로 향했던 것이고.”
“네. 아마 카인이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데카라즈난 소공작과 약혼을 한 뒤, 에스텔 공작가에서 그리 했던 것처럼 여신의 남겨진 자취에 대해 찾아보았었겠죠. 더욱이 데카라즈난 공작가는 에스텔 공작가와는 달리 거대한 부(富)를 쌓은 가문이니 백작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저의 혼인을 성사시켰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보았을 때 데카라즈난 공작부인이라는 직함은 꽤나 쓸모가 많으니 말입니다.”
스스로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사라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기만 하였다. 그것은, 그리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순응하였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는 없었던 어떠한 각오를 하였기에 그런 것일까.
“하지만 저는 제게 그런 역할을 강요하는 가문이 싫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려 천 년,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시간에 걸쳐 방랑하였으며, 이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모르는 맹목적인 증오를 표출하는 가문이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고 말았습니다. 원한이니, 복수이니 그런 것은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저라는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사라의 소원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도, 그리고 회귀 후에도.
아마 내가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지금 이 순간에도 가문의 도구에 불과한 신세였을 테지. 아니, 회귀 전. 내가 그녀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 그녀는 스스로의 운명에 저항하지 못한 채 투르니젠 공작과 결혼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의 반항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바꿀 수 없는 미래였던 것임이 틀림없을 터.
“스스로가 어디에서 태어날 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떻게 살아갈 지는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정해져있던 저의 부조리한 운명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공작님께 저의 ‘저주’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반지를 드렸습니다. 아주 미약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어쩌면 소공작님이라면 저를 저주 받은 운명 속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
하지만, 회귀 전의 ‘카인 폰 에스텔’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그저 궁상이나 떨고 있었다.
사실은, 그녀 또한 아파하고 있었는데. 내가 아파하던 것에 못지않게, 아니 내 아픔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움에 몸을 뒹굴고 있었는데-
...끝내, 카인 폰 에스텔은 그녀의 아픔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10년 뒤, 세상이 겨울의 마녀로 인해 멸망해버리는 그 순간까지.
“그래, 그렇다면 당신이 카인에게 준 반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지? 당신 같은 여자가 기대감 운운하며 그에게 넘겨줄 정도라면 보통 물건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은데.”
비앙카의 질문에 사라는 긍정을 표하듯 얌전히 스스로의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소공작님께 건네 드린 반지는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겨울의 여신께서 스스로를 증거 하는 맹세로서 인간들에게 하사한 물건 중 하나입니다. 여타 기보들처럼 눈에 띠는 능력만큼은 없지만, 여신께서 자기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반지로 가공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일부를 떼어냈다고?”
사라의 그러한 말에 나는 그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여신쯤 되면 스스로의 신체를 반지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반지의 내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 그것이 바로 키리에가 아리아 그 여자를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였네. 어쩐지, 서로 간의 힘의 격차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데 대체 무슨 수로 그 여자를 이겼나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실은 그런 수작을 부렸던 것이었구나.”
한편, 나의 옆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기색이던 비앙카는 이내 무언가 납득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혼자서만 납득하지 말고 내게 조금 설명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나의 투덜거림에 비앙카는 대놓고 혀를 쯧하고 차더니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어 보인다.
“한심하기는. 이런 건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답이 나오는 문제잖아. 카인, 당신도 윤회(輪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겠지?”
“...윤회?”
확실히, 어디선가 몇 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이다. 아마, 교단에서 말하는 교리 중 하나로서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는 뭐 그런 의미의 단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것이 이 상황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이란 것인가?
“그래, 윤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혼이 전생(轉生)을 통해 이전 생과는 다른 육신을 얻는다는 의미야. 하지만 윤회전생 속에서 영혼만큼은 필연적으로 열화(劣化)를 거듭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영원불멸이란 존재하지 않거든. 즉, 제 아무리 작은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식은 자신의 부모를 이길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지.”
“....?”
비앙카의 설명은 너무 어렵고 난해하여 무슨 의미인지 쉽사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봐 알아먹을 수 없는 설명을 잔뜩 늘어놓는다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가?
“아, 정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아리아 그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도는 감을 잡았겠지?”
비앙카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해준다.
“...그래. 아리아의 진정한 정체는 아마도 여신(女神)이겠지. 천 년 전, 인간의 손에 의해 봉인되었던 겨울의 여신, 아리아.”
아리아가 마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흡사 잊었던 것을 되살리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이 아닌 신이었기 때문이며, 세르나드 백작가의 중년인이 사용하던 기묘한 신성력의 정체 또한 이 세상에 겨울의 여신이 부활하였기에 사용할 수 있었던 힘인 것이 분명할 테니까.
“그래. 몇 년 뒤, 겨울의 마녀가 갑작스레 에스텔 공작령에 출현하였던 것은 바로 이곳이 그녀가 봉인되어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천 년 전의 겨울의 여신 아리아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아는 과연 동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을 하였다.
“그야 당연히 동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그야, 사라가 아까 설명했었잖아. 여신들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기에 초대 황제는 여신들을 봉인시키는 길을 선택하였다고. 그렇다면 봉인에서 풀려난 아리아 역시 천 년 전과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나의 그러한 대답에 비앙카가 아니라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아이리스가 불쑥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의 아리아는 신(神)이 아니라 생각되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천 년 전에는 신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 불과하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비앙카?”
“역시, 저하께서는 카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똑똑하시군요.”
두 여자의 쿵짝이 맞는 모습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자, 아이리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향해 부차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이건 비앙카의 말대로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깨달을 수 있는 문제라네. 찬찬히 생각해보게나. 카인, 우리가 흔히들 신(神)이라는 부르는 존재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체 무엇인가?”
“...아마, 전지전능이 아닐까요.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결코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이라는 존재의 특징-”
...아.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비앙카가 내게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그렇다네. 신이란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이지. 하지만 2년 전, 자네 앞에 나타난 아리아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어. 왜냐하면 아리아가 정말로 완벽한 존재였다면 기억을 잃고 '학습'을 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일세. 아니, 비단 아리아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에 마주하게 될 ‘겨울의 마녀’ 또한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결국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타도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였다네.”
“...하지만 동시에 아리아의 정체는 여신임이 분명하기도 해. 그렇다면 여기서 유추되는 사실은 오직 한 가지뿐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아리아는 어떠한 이유건 간에 신격(神格)을 상실하고 만 거야. 즉, 천 년 전과 현재의 아리아는 동일인일지는 몰라도 현재의 그녀는 신이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상태일 테지.”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아리아가 여신이었을 때의 파편을 가공해서 만든 물건이 남아 있잖아? 영의 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 아리아는 여신 아리아의 파편에 도저히 미치지 못해. 누가 힘이 더 강하고, 약하고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아. 열화(劣化)를 거듭한 복제품은, 결코 자신의 원형에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키리에는 반지의 그러한 특성을 이용해 아리아를 손쉽게 제압했다, 이 말이로군.”
나는 손 안에 들린 반지를 매만지며 그리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키리에의 목적이란 대체 무엇이지? 키리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아리아를 제압하고 세계수로 데려간 것이지?”
나의 혼잣말에 비앙카는 무언가를 고심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 여자는 아리아를 천 년 전의 여신으로 되돌릴 생각임이 분명해.”
“...어째서?”
“방금 전, 그 반지를 한 차례 확인해보았는데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다가 빠져나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거든.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것은 천 년 전 여신 아리아의 신력(神力)이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키리에가 그 반지를 사용해 아리아를 제압했으니, 그 신력은 본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에게 되돌아갔겠지.”
한 없이 신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는 아리아에게, 다시금 여신의 힘이 되돌아갔다. 그 말의 의미는 즉-
“그래. 겨울의 여신이 완벽하게 부활하게 된다는 의미이지.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겨울의 여신이 스스로를 옭아매던 봉인에서 풀려났을 때 대륙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
겨울의 여신, 아니 겨울의 마녀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일어나는 현상.
그것이 무엇인지, 다름 아닌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겨울이 다시 한 번 닥쳐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환란이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의미였다.
재앙의 원인은 다름 아닌 겨울의 마녀, 아리아.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저, 소공작님. 한 가지만, 소공작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그리고 그 때였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토론을 하던 와중에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하게 우리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던 사라가 나를 향해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진 것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정보가 소공작님께 도움이 되었나요? 혹시 더 필요하다거나 듣고 싶은 이야기는 있으신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내흔든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아리아의 진정한 정체, 그리고 반지의 정체,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었기에.
“...다행이네요. 마지막 순간, 이렇게 소공작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리 말을 하며 사라는 자신의 품 안에서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꺼내더니 그것이 마치 단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신의 심장에 나뭇가지를 겨누었다. 일련의 동작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그녀가 나뭇가지를 심장 바로 위쪽에 겨누기까지 나는 미처 반응을 하지 못하였다.
“...사라? 지금 대체 뭐하는-”
그리고 사라의 손에 들려있는 나뭇가지를 본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직감하고 말았다. 저 나뭇가지는, 무언가 위험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섣부르게 사라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만약 저 나뭇가지가 사라의 몸에 닿는다면, 그녀는.
“이걸로,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어요. 소공작님, 부디 제 모습을 끝까지 봐주시겠어요?”
나를 향해 싱긋하고 웃는 사라의 얼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소공작님께 속죄를 하기 위해 내놓은 단 한 가지 대답이니 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