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16. 끝이 끝나기 전에 - 08
“...실례하겠습니다, 소공작님. 전해 듣기로는 저를 급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에스텔 공작가의 응접실, 나의 긴급한 호출에 사라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응접실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얼굴 속에는 어딘가 울적함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잘 와주었군, 사라. 이렇게 당신을 오라 가라 하게 만든 것은 본의가 아니니 양해를 해주면 좋겠어.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내 몸이 워낙 너덜너덜한 상태인지라 말이지.”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라를 향해 붕대로 감겨 있는 팔다리를 보여주자 사라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천만의 말씀이세요, 소공작님. 가신 된 이로서 소공작님의 발걸음을 함부러 옮기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그리 말을 하며 사라는 섣불리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자신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붕대 같은 것을 감고 계신 것인가요? 아리엘님께 치유를 부탁드리면 그런 상처쯤은 금방 나을 텐데 말이죠.”
사라의 그런 질문에 응접실에 앉아 있던 나와 아이리스, 그리고 비앙카는 아주 잠깐 서로의 눈을 맞추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라 또한 완전한 외부인이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구분하며 입조심 하는 것 또한 지극히 피곤한 일임이 아닐 수가 없었으므로.
“유감스럽지만, 아리엘의 치유는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왜냐하면 그녀는 에스텔 공작가를 당분간 떠난 상태거든.”
“...네?”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사라.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후, 마치 무언가에 도전이라도 하듯 사라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솔직하게 말을 하도록 하지.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많은 부담은 갖지 말아줘.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들은 그저 우리들의 개인적인 사정일 뿐이지, 당신이 등에 짊어질 무언가는 결코 아니기 때문에.”
“...소공작님.”
“허무맹랑한 소설 속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좋고, 정신 나간 넋두리라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잠자코 들어주었으면 해. 그리고 가급적이면 나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이것은 과거, 나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렇게 나는 입을 열어, 이제는 머나먼 과거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이제는 남의 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오랜 기억들을 하나 둘씩 떠올려 보기 시작하였다.
아주 먼 옛날, 가진 바 능력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어느 머저리 같은 남자에 대해.
몇 년 뒤, 이 대륙에 끝나지 않는 겨울이 닥쳐오게 되었으며 그 끝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사실에 대해.
그리고 그 모든 참상을 빚은 주범이 바로 겨울의 마녀, 그러니까 아리아였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은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10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오게 되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아리아가 나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단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전부 사라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비앙카나, 아이리스, 아리엘 또한 마녀를 죽인 대가로서 10년 전 과거로 회귀하였다던가, 키리에는 세계수와 이어져있기에 모든 시공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라고 해서 회귀에 대한 모든 진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라에게 섣부른 추측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을 하였으므로.
...또한, 과거의 ‘카인 폰 에스텔’과 ‘사라 세르나드’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였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생략하였다. 현재의 사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뿐더러, 굳이 그런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사라의 마음을 상처 입힐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어. 정신 나간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러니 굳이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적어도 내 이야기가 진짜라는 가정 하에 대화를 나누어 주었으면 해. 왜냐하면 현재 상황에서, 남겨진 단서라고는 오직 당신 하나 밖에-”
“...믿어요.”
“...뭐?”
그리고 그 순간, 나의 귀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 들려온 듯 하였다.
“저는 믿어요. 방금 전 소공작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 저는 전부 믿어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사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듯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을 표하더니, 이내 스스로의 두 눈을 질끈하고 감는다.
“사실, 저도 보았거든요. 소공작님께서 경험하신 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리아 씨가 소공작님과 함께 과거로 회귀하지 않았던 세계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전부 다요.”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라의 얼굴은,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닌데도 어째서인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이 보인다. 나의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파열하기 직전의 풍선과 같이 위태롭게만 느껴지고 있어서-
“...어떻게. 그리고 무슨 수로...”
“키리에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소공작님 주변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을, 저만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불공평한 일이 아니냐고 하시면서요.”
스스로의 팔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그리 대답을 하는 사라를 보며,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 키리에 때문에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인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키리에가, 말이지.”
...또 그녀인가. 아무래도 키리에는 나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제법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만 같았다. 아리엘에 이어서 사라에게까지 손을 뻗었었다니.
“그러니 저를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 또한 이제 황녀님이나 비앙카님과 같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소공작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어떠한 이야기를 해드려야 하는 것인지도 전부 알고 있으니 말이에요. 아마 여러분들이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임이 분명하겠죠. 그러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어요.”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사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공허함을 지니고 있었다.
“저주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바로 어젯밤, 아리엘님께서 다소 무리를 하시면서 까지 전부 해주 해주셨거든요. 어쩌면, 그 분께서는 오늘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아리엘은 사라를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었나.
“때는 바야흐로 신화시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천상에 거하는 여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들을 다스렸노라고 전해지던 황금의 시대. 그리고 신들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어느 한 남자로부터, 모든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답니다.”
“그 남자는, 여신들이 인간을 다스리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더군요. 남자는, 지극히 공정하고 자애로운 여신들이 이 땅 위를 다스리고 있었기에 세상에 구원이 존재하지 않으며 끝내 인간들 스스로가 발전할 수 없게 될 것이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신께 기도를 올린다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 신께 간청을 한다면 모든 소망이 이루어진다. 신께 구원을 바란다면 모든 절망이 사라지게 된다-”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란 신들이 사육하는 가축에 지나지 않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설사 그 끝에 파멸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를 거머쥐어야만 한다고 그 남자는 말하였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바로 데브하르트. 인류 최초로 신을 부정하고, 그 끝에 인간들만의 시대를 주장한 남자의 이름은 그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데브하르트?”
너무도 익숙한 그 이름에, 나와 비앙카는 고개를 돌려 아이리스를 바라보고 말았다. 데브하르트란 다름 아닌 아이리스의, 그리고 황족들의 성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사라의 말은-
“제국의 초대황제가, 자네가 말하고 있는 그 남자의 정체란 말인가.”
아이리스의 말에 사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데브하르트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에 찬동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지만, 금세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더군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신들이 통치하는 삶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아득할 정도의 격차였겠지.”
비앙카의 무심한 듯한 대답이 그 뒤를 잇는다.
...비앙카의 말 대로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본 전적이 있지 않던가. 인간의 영억을 아득히 벗어난 거대한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끝없는 절망을 선사해준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데브하르트의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보잘 것 없는 힘으로는 신에게 대항을 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이니 말입니다. 아마, 그에게 힘을 빌려준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주장은 그저 덧없는 이상으로 끝을 맺게 되었을 테지요.”
“힘을 빌려준 존재? 그게 누구지?”
“봄의 여신, 아르벨.”
사라의 말에,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하고 만다. 그러니까, 여신이 나서서 여신들을 몰아내는 일을 도와주었다는 의미인 것인가? 대체 왜? 여신이 뭐가 아쉬워서 인간 하나를 도와준 것이란 말인가?
“데브하르트와 아르벨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왜 여신이 인간에게 협력을 해준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둘은 협력 관계에 있었으며 아르벨은 데브하르트를 위해 힘을 빌려주고 심지어 그만을 위한 검술까지 만들어주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여신이 직접, 그를 위해 검술까지 손수 만들어 주었다고?”
“예. 전승에 따르면 일정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뜻대로 조절하는, 실로 마법과도 같은 검술이었다고 하더군요. 무려 천 년 전의 일이니, 아직까지도 검술이 황실에 남아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만...”
"....."
사라의 그 말에 아이리스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고 말았다.
“어쨌든, 아르벨의 협력을 얻은 데브하르트는 신을 타도하는데 충분한 힘을 얻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여름의 여신 클라리스는 서쪽, 가을의 여신 세피아는 남쪽, 겨울의 여신 아리아는 북쪽에 스스로의 본신을 두고 있었는데 데브하르트는 인간들을 규합해 여신들을 급습. 기록에 따르면 참으로 격렬했던 전투 끝에 그들의 본체를 봉인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봉인?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간섭을 걷어낸다고 했던 주제에 그는 어째서 여신들을 죽이지 않고 봉인으로 그쳤던 것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여신들은 이 세계의 계절을 상징하고 생명의 순환을 관장하는 존재였던지라, 정말로 죽여 버린다면 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합니다.”
“하지만 여신들이 봉인되어 있는 곳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데브하르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네 명의 공작으로 하여금 각기 동서남북을 맡겼다고 합니다. 특히, 가장 난폭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겨울의 여신 아리아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강대한 마법사인 카스타나를 북쪽에 상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온 '카스타나'라는 이름에, 비앙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의 대가로서 봄의 여신 아르벨은 데브하르트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르벨이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더군요. 그렇게 천상의 여신들은 모두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 세상에는 그녀가 한 때 이 세상에 존재하였다는 증거인 신성력만이 남게 되었다더군요. 이것이 바로 제가 알고 있는, 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전말입니다.”
“.....”
사라의 이야기가 전부 끝마쳐진 지금, 이 자리에는 어딘가 기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야기가 존재하였다.
“...실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사라 세르나드. 그것이 바로 자네가 ‘저주’로 인해 감추고 있던 사실이란 말이지. 거기까지는 좋은데, 한 가지 자네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존재하는군.”
“자네는 대체, 이 모든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황실에도 그런 이야기는 전승되고 있지 않으며, 카인을 비롯한 에스텔 공작가 또한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네.”
아이리스의 타당한 지적에, 사라는 스스로의 눈꺼풀을 살그머니 닫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 년 전, 많은 사람들이 초대 황제의 뜻에 편승하여 그를 따라나섰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뜻에 찬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여신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들을 숭배하였던 제사장과 그 일족은 데브하르트에게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이내 죽임을 당하고 말았죠.”
“...설마.”
사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은 아이리스의 표정이, 아주 살짝 변화하고 말았다.
“예. 세르나드 백작가와 그 뒤의 집단의 정체는 바로 천 년 전, 겨울의 여신 아리아를 끝까지 모신 끝에 데브하르트의 손에 몰살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제사장 일족의 후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