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16. 끝이 끝나기 전에 - 07
하늘은 오늘따라 굉장히 드높고 푸르기만 하였다.
나는 비앙카와 함께 흡사 폭격이라도 맞은 것 마냥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숲을 뒤로 한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키리에의 뒤를 쫓아 대수림으로 향하고 싶지만, 이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으로 추격을 시도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확인을 해야만 하는 사실 또한 몇 가지가 존재하기도 했고.
“음. 그대의 패잔병 같은 볼썽사나운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 발짝 늦어버린 모양이로군.”
...그리고, 현재 사람의 심정이 어떠한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속을 긁는 듯한 얄미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너무도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리스였다. 우리와는 다르게 허리춤에 검을 패용한, 완전 무장한 상태인.
“죄송하지만, 저하께서는 한 발짝 정도 늦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미 일이 전부 끝나버리고 말았거든요.”
어딘가 모르게 그녀를 타박하는 나의 말에, 아이리스는 진정으로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의 말을 던진다.
“그렇군. 이래 뵈도 나는 지금 무척이나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네. 아무래도 내가 그대와 동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지고 돌아온 것 같거든. 정말, 자네는 정말 방심할 수가 없는 남자임이 분명한 것 같다네. 그 정도면 충분히 강해진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또 어디 가서 맞고 다니기나 하다니 말일세.”
“.....”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건 간에, 내가 아이리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서 얻어터지고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흡사 꼬리 만 개처럼 너털너털한 발걸음을 옮기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누군가에게 얻어터진 것도 모자라 일도 덩달아 실패한 모양이로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아리아가, 납치되었습니다.”
“누구에게?”
“...그건.”
다시 한 번 생각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고, 속이 뒤집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황을 외면해봐야 뒤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나는 밀려오는 현기증을 애써 참아내며 아이리스의 질문에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을 하였다.
“...키리에, 그리고 아리엘에게.”
“키리에. 역시 그런가.”
예상 외로 아이리스는 그다지 놀란 표정을 짓지 않는다.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드디어 올게 온 것인가, 이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나머지는 평소와 똑같이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키리에, 그 여자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여자라는 것은 내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현장에 있었던 장본인에게 설명을 듣는 것이 더 나을 성 싶으니 말 일세.”
아이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는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가장 처음, 거대한 두 힘이 충돌하는 것을 감지하고 비앙카와 함께 숲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사실에 대하여. 현장에 도착하니, 기절해 있는 아리아와 그 바로 앞에 키리에와 아리엘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그리고 아리아를 구해내려다가 키리에에게 얻어 터지고 흡사 적선이라도 당하듯 그들의 행선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대략 10여분에 걸쳐, 모든 것을 전부 말하였다.
아이리스는 그다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말하는 것을 묵묵히 들어주기만 할 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리스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나니,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것과 함께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한 차례 정리할 수 있었다.
“아리엘이 키리에와 손을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키리에가 어째서 아리아를 노린 것인지, 그리고 키리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까지. 정말 앞뒤가 꽉 막힌 듯한 기분 밖에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키리에와 아리엘은 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정작 저는 키리에라는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나약한 말을 토로하고 있자니, 아이리스는 바라보며 쯧하고 혀를 찬다.
“다른 건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리엘 그 여자가 자네를 등지고 키리에와 손을 잡은 이유만큼은 모르겠군. 그 여자의 소원은 자네와의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얼마 전 자네와 함께 실컷 앙앙 거렸으니 분명 나름대로 만족을 하였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참으로 별 일이로군. 아니면 설마 침대 위에서 아리엘 그 여자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이란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중대사임이 분명한 것 같은데.”
“.....”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아이리스는 어떻게 내가 아리엘과 한바탕 뒹군 사실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일까. 설마 나를 감시하기라도 했었던 것이란 말인가?
“...뭐? 너 설마 아리엘 그 여자랑 했어? 나 몰래 언제?”
한편 비앙카는 아이리스와 달리 그리 정보에 밝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반응을 지어 보인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로군, 비앙카. 설마 카인이 다른 여자와 뒹구는 일에 그대의 허락을 맡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 것인가?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면 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뒤엉키고 있는데 옆에서 얌전히 응원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적어도 그런 꼴을 두 눈 뜨고 봐줄 생각은 없는데 말이죠.”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군.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측실에 불과한 자네가 카인 옆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였다네. 그런 의미에서 자네를 비롯한 측실들은 그와 한 달에 한 번만 침대 위에서 손만 잡고 자는 것으로 할까 생각하는데,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하의 말씀대로 제가 측실이라면, 정실은 대체 누구죠? 아니, 애당초 정실이니 측실이니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오늘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당연한 소리를. 나는 제국의 황녀이며, 동시에 제국의 모든 신민 위에 서는 자이니 나보다 정실에 어울리는 여인이 어디에 있다 생각하는가? 신분만 따진다면 카인 역시 나의 아래에 존재하는데 말일세.”
“저번에는 황녀라는 신분이 번거롭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왜 이리 말이 자꾸 바뀌시는 거죠?”
“자네를 내 아래에 깔아둘 수만 있다면 말을 바꾸는 게 대수일 성 싶은가?”
"...저하,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런 이상한 이야기는 조금 자제를 해주시는 편이-"
아무리 앙숙같은 사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때에 저런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살짝 화가 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들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입으로는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하던 모양새를 취하고 있던 비앙카와 아이리스는, 사실 다투고 있던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여유로운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전의 그것은, 비앙카와 아이리스가 나름대로 나를 홀가분하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뱉었던 배려의 일종이라는 것을.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어느새 아리아에 대한 여러 사실과 키리에와 아리엘에 대한 문제로 가득 차 터져나갈 것만 같았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맑게 개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좀 진정이 되는가. 지금 이 순간은 답답할지도 몰라도 마음을 조금은 편안히 먹게나. 조급해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아이리스가 나의 손을 꼭하고 잡으며 그리 말을 해주니, 나 또한 방금 전보다 머릿속을 더욱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잠깐의 사색 끝에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종합해 나의 의견을 도출해 본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리엘이 저를 등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
아이리스의 호기심 어린 반문에, 나는 딱 잘라 단언을 하였다.
“...그녀는, 아리엘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나는, 아리엘이라는 여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있다. 비록 이제 와서는 어렴풋한 기억으로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리엘은, 세간에서는 성녀라고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성격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여자이다. 비앙카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뱀처럼 음흉한 여자’이며, 아이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뒤가 다른 여자’라는 말이 그녀에게 있어 참으로 적당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성녀였다. 가련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며, 언제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하늘에 기도하는 성녀.
그리고 그녀는 약속하였다.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착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며 누군가와 약속을 하는 장면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기억들 중 하나이다.
그런 그녀가, 고작해야 자기 자신의 목적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킬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맺은 맹세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막중하고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자는, 그러한 여자가 아니노라고.
“어리석군, 카인. 원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시야에 담을 때에는, 오직 어느 하나의 단면 밖에 보지 못하는 법일세. 자네가 알고 있는 아리엘이 그런 여자가 아닐지라도, 자네가 알지 못하는 면모의 ‘아리엘’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네를 등진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 또한 존재하는 법이지. 그러니 섣부른 판단만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일세.”
아이리스의 말에 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아니요. 저는 그녀를 믿습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과 관련해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듣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에 아이리스는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짓기만 할 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고집스럽긴. 잘 알겠네. 그렇다면 우리가 의논해야 할 주제를 이제 하나로 압축할 수 있겠군.”
“...키리에와 관련된 문제들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녀가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째서 아리아를 공격한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전성기에 근접한 힘을 지닌 아리아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리아를 세계수 근처로 데려간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아리아를 구하러 간다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키리에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어떠한 무대에 올라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적을 타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단서는 있는가?”
아이리스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 두 가지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며 나는 주머니에서 예의 ‘약혼반지’를 꺼내 아이리스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인가?”
“2년 전, 제도에서 사라와 제가 만났을 때 그녀가 제게 맡긴 반지입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세르나드 백작가의 가보라고 하던가요.”
정작 나는 이 반지의 존재조차 깜빡해 버리고 책상 어딘가에 쳐박아 두다가 키리에에게 도둑맞고 말았지만.
“사라 세르나드? 그 여자의 반지라고?”
사라의 이름을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스스로의 눈살을 찌푸리는 아이리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여자는 저주인지 뭔지에 걸려 있는 상태인지라 함부러 입을 놀리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 같은데.”
“예, 분명히 그랬었죠. 하지만 이제는 아닌가 봅니다.”
나는 손 안에 들려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 나간다.
“아까 전투 중에 아리엘이 제게 은밀히 말해주었습니다. 사라를 찾아가라고. 그녀가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줄 단서를 지니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리엘을 신뢰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정말로 나를 배신하였다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게 힌트를 건네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저의 신뢰를 져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나의 그러한 대답에, 아이리스는 어딘가 울적한 눈을 하며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의 두 눈은, 그저 나를 향한 염려로 밖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대를 배반한 것이라면? 지금 자네가 보내고 있는 신뢰를 져버린 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는 어찌할 심산인가?”
“...그렇다면, 그 때야말로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해야겠지요.”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과거 그녀와 부부 사이였고, 어제만 해도 그녀와 몸을 섞었던 주제에 결국 그녀가 품고 있는 고민 하나 눈치 채지 못한 병신이 바로 저라는 것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