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77화 (177/201)

(EP.177)16. 끝이 끝나기 전에 - 06

이 자리에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다.

어느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는 자는 없었으며, 애당초 할 말 따위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끈지끈한 두통이 나의 머리를 엄습한다. 이곳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급속도로 체력과 오러를 소진한 탓인지, 아니면 키리에가 아리아를 죽인다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은 탓인지.

흡사 전두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

언제나 여유로운 얼굴로 타인을 바라보던 키리에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마주하고 있는 여인은, 평소와는 달리 지극히 싸늘하고 무기질적인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어느 엘프 여인뿐이었다.

...아니, 실은 저러한 얼굴이야말로 바로 키리에의 본질이었겠지. 인간의 생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긴 세월을 살아온 끝에, 마음과 감정이 전부 마모되고 메말라버린 세계수의 수호자.

그것이 바로,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여인의 진면목이었을 터.

“...그래서, 지금부터는 어찌할 작정입니까. 키리에.”

비앙카에게 아주 살짝 시선을 준 후, 곧바로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나의 그러한 질문에, 키리에는 흥미롭다는 듯 스스로의 눈동자 속에 이채를 띤다.

“왜, 어째서,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군요.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궁금하지 않은 것인가요. 카인.”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질문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저부터가 이미 아리아를 한 번 죽인 전적이 있는데 제가 무슨 염치로 키리에의 행동을 말린다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리 말을 하며 자연스레 앞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리아와 나 사이에 놓인 거리는 대략 20미터 정도. 전신에 남아 있는 오러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킨다면 숨 두 번 쉴 사이에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리에, 방금 전 당신은 이리 말을 했었죠. 자신의 목적은, 자신의 손으로 ‘겨울의 마녀’를 죽이는 것이노라고.”

상대와 나의 전력 같은 것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키리에의 장기는 정령술과 궁술. 수백미터 바깥에서 초고속으로 이동 중인 상대라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실력을 지닌 명사수가 바로 키리에이지만, 정령술과 궁술은 근접전에서 취약하다는 명확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즉,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승산은 확실히 존재할 터.

“그렇다면 어째서 이 자리에서 바로 아리아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리아가 정신을 잃고 있는 지금이라면 목숨을 빼앗는 것쯤은 여반장이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당신은 아리아를 제압하기만 하였을 뿐,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숨을 아주 살짝, 심호흡하는 것과 동시에 남아 있던 오러를 전부 두 다리에 집중시킨다. 지금으로부터 1초 후가, 바로 기회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아리아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비앙카, 지금!”

“아, 진짜! 이런 걸 할 때는 미리 상의를 좀 하란 말이야!”

화르륵-!

그 순간, 나의 신호를 알아들은 비앙카가 손끝에서 불꽃을 형성해 내더니 그대로 키리에와 아리엘이 서 있는 곳에 던진다. 백열하는 것은 자그마한 크기의 새하얀 태양. 제대로 직격한다면 인간 하나쯤은 손쉽게 뼈째로 불살라버릴 그것을.

“여신이시여. 그대의 종에 은총을.”

구우웅-

아리엘은, 그저 기도를 올리듯 두 손을 합장하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막아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마법은 비앙카의 고유 마법인 '백염의 탄식'의 축소판일 터. 그런데 저 끔찍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는 마법을 저토록 가볍게 막아낸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아리엘-!”

백색 태양이 키리에와 아리엘이 서 있는 곳에 직격하고, 아리엘이 그것을 막아내기까지 겨우 2초. 그리고 동시에, 한계까지 압축된 오러를 두 다리에 집중시키고 있던 내가 20미터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흐르는 별’을 사용해 남은 잔여 오러를 전부 담아낸 나의 주먹은 비앙카의 마법을 막아내느라 이미 균열이 가 있던 아리엘의 신성 장벽을 손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카인.”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만 있던 아리엘이 내 이름을 부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의 두 눈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눈이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나를 향해 무언가 달싹거린다.

“...아리엘, 당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이야기. 대화를 나누는 것쯤은 아리아를 구한 뒤에도 실컷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전력을 다한다. 아리엘이 구사하는 체술은 나 따위의 것보다 훨씬 강하다. 방심 같은 것을 하다가 얻어터지는 쪽은 되려 이쪽이 될 것이다. 여자를 때리는 것은 취미가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콰직-!

모든 힘을 실은 나의 오른발이 아리엘의 왼발을 그대로 내려찍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리엘의 얼굴이 고통으로 찌푸려지고 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빙글하고 돌리며 팔꿈치로 그녀의 명치를 후려친다. 굳이 명치를 때린 이유는 그곳이 급소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녀의 아랫배는 공격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아리엘 또한 아이리스처럼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윽-!”

명치에 팔꿈치가 제대로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몸이 기역자로 꺾이는 아리엘. 이것으로 되었다. 잠깐의 틈이면 충분하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아리엘을 그대로 지나쳐 키리에를 향해 달려든다. 남아 있던 오러를 전부 오른쪽 주먹에 때려넣는다. 제 아무리 키리에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근접전은 익숙지도 않을 뿐더러 마땅히 손 쓸 방도가 없을 터. 이것으로 나와 비앙카의 승리다!

...아니, 나와 비앙카의 승리가 될 예정이어야만 했다.

털썩.

“...어?”

그래. 키리에를 향해 기세 좋게 덤벼들던 내가 무엇에 당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등을 아래로 한 채로 지면에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랬겠지.

“이런 나쁜 남자 같으니. 저는 그렇다 치고, 당신과 부부 관계였던 아리엘에게도 거리낌 없이 손을 쓰시는군요. 방금 전의 그거, 빼도 박도 못하게 가정폭력이라고요?”

한없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리는 키리에. 그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몸은 그리 쉽게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수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대체.

“소용없어요. 턱과 명치, 그리고 배에 회전을 가미한 타격을 가하였으니 당분간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걸요. 당신이 정상적인 컨디션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여기로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체력이 방전 된 것도 모자라 오러까지 상당히 소모한 당신을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키리에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그녀는 지금-

“뭐, 제게 있어서 넘치는 것이 시간이었으니까 말이죠. 남는 시간에 심심풀이로 체술을 배워두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남는 시간에 한가해서 배운 체술을 이용해, 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을 해버렸다는 소리란 말인가?

“고작해야 수십년 정도 밖에 수련하지 않은 체술이지만, 당신을 상대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러니 다음번에 저를 찾아올 때는 검이라도 차고 오세요.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자그마한 단검을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크기가 작은 만큼, 사람 하나를 찌르는 것에 무리가 없잖아요?”

터벅-

키리에는 충격으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나를 그대로 지나쳐, 아리아에게로 다가선다. 아리아는 여전히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 키리에는 아리아를 가볍게 안아든 채,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의 질문에 답변을 드리는 것을 깜빡했군요. 지금부터 제가 어찌할 것이냐 질문하셨죠. 저와 아리엘은 지금부터 대수림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둘의 목적은 세계수가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일인데다가, 예전에 그리 했던 것처럼 그녀의 심장을 부숴버리면 정말로 큰일이 나거든요. 대체 왜 큰일이 일어나게 되냐면 말이죠.”

키리에는 마치 재미난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처럼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당신이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줬잖아요. ‘아리아’라는 이름을. 그 때문에 일이 정말로 번거롭게 되었지요. 정말, 저 여자를 부르는 호칭은 예전처럼 ‘마녀’라는 멸칭이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어준, 이름 때문이라고요?”

키리에가 가한 타격의 고통 때문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을 지어준 것과 키리에가 아리아를 섣부르게 죽이지 못하는 이유 사이에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최근 몇 년 사이에 에스텔 공작령의 토지가 풍요로움을 되찾은 것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인가요? 정말로 전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그런데 왜 회귀 전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회귀 후에는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나요?”

“...그건.”

키리에의 말은,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해서든 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던 부분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말이 오히려 거짓임이 틀림없겠지. 확증도, 증거도, 이유도 없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아리아가 마법을 익힌 지 고작해야 1년이라는 시간 만에 인세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비앙카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마법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인간으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시공간이라는 분야를, 오직 아리아만큼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이유.

제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닌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전 대륙에 겨울을 휘몰아치게 한다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맞서 싸웠던 중년인이 사용하던 정체불명의 신성력으로부터, 뭔지 모를 이상한 무언가를 느낀 이유.

...지금까지는 이 모든 사실을 그저 아리아가 ‘겨울의 마녀’라는 사실 하나로 뭉뚱그려서 넘기고 있었지만, 실은 마음 속 깊이 부정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나보다.

만일 그녀가 그저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간이라면, 이런 나라고 할지라도 아리아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마침 아리아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니, 세상에 재액을 뿌리는 ‘마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법사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마녀’가 되는 것이 필연이었다면. 애당초 아리아의 정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내가 그녀를 통제할 수 없는 미래가 찾아오는 것 또한 필연이었다면.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저 내게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내 옆에서 ‘아리아’로 남아 있었던 것이라면. 아리아에게 있어, 나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그저 유희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면.

지난 2년, 그녀와 내가 함께하던 시간이 송두리 째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나는 정말로-

“네, 그랬던 것이랍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물러서도록 하세요. 결말을 맞이하기에 이곳은 그리 좋은 장소라고는 할 수 없는데다가, 저 또한 당신이라는 관객이 도착할 때까지 그녀에게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나에게 무언가를 휙 하고 던진다. 무의식중에 그녀가 건네준 것을 받아들어 확인해 본다. 그것은, 반지였다. 그것도 내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반지. 그런데 왜 이것이 키리에의 손에 있던 것이란 말인가.

“죄송해요. 제가 워낙 손버릇이 나빠서 말이죠. 하지만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니, 아내가 남편의 물건을 잠깐 빌려 쓰는 것 정도는 허용이 되지 않을까요?”

키리에는 자신의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등을 돌려 어딘가로 몸을 날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엘 또한 나를 향해 고개를 아주 살짝 숙여 보이더니 키리에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춘다.

“...아리아.”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의식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 저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한다. 비록 이 자리에서는 패배했지만, 다음번에는 이번과 같이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반드시, 다음 번에는 아리아를 되찾기 위하여.

“.....”

저들이 내 시야에서 하나의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응시를 한 뒤, 나는 방금 전 키리에가 내게 던져준 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젠장.”

...틀림없었다. 이 반지는, 언젠가의 사라가 내게 맡겨둔 예의 ‘약혼반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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