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16. 끝이 끝나기 전에 - 05
만물은 유전하며, 세상 모든 것들은 끝에 공통된다. 죽음이란 단순한 끝이 아닌,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거대한 섭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
그러한 사실을, 키리에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녀 또한 처음부터 불사의 몸이었던 것은 아니며, 그 어떠한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성장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차츰차츰 죽음을 향해 다가가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살아가며, 그녀는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같은 엘프라고 할지라도 예외 없이 그녀보다 먼저 늙어 죽거나 스스로의 죽음을 택하였으며, 그리고 그 죽음이 채 익숙해지기 전에 다른 사람들 또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결국, 그 죽음 또한 무덤덤하게 여겨지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질려버리고 말았다. 무엇에 질려버렸냐면, 모든 것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이 시간에, 의미 없이 흘러가는 자신의 삶 그 자체, 의미라고는 없는 스스로의 행복에 대해. 전부 다.
그렇기에 마모되고 무뎌지고 말았다. 무수한 세월을 지낸 끝에 닳고 닳아버린 그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씨를 당길 수 있는 것은 인간 그 자체 밖에 없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부나방과 같이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전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신들이 사라진 세상 속, 그들의 책무를 대신 떠맡고 있는 그녀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로 박제되어, 이렇게 끝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세상은 무척이나 넓고, 인간이란 모래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적어도 한 세대에 하나쯤은,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 만한 인간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보면 스스로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권태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카인 폰 에스텔.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하며 그와 부부의 인연을 상징하는 ‘끈’을 맺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였다. 워낙 하잘 것 없고 능력이 없는 인간인지라 언제 어디서 죽어버릴지 몰랐기에 설정한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언제 어디에서나 간편하게 들여다 보기 위한 장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았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키리에라는 여자가 보기에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경이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해야 1년이라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귀를 한 뒤의 시간을 합친다고 할지라도, 그를 알고 지낸 시간은 그녀의 총 인생의 십분지 일, 아니 백분지 일도 되지 않겠지.
그저 찰나에 불과한, 아득히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이,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여인을 근본부터 완전히 뒤흔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그녀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렇기에 부러웠다. 부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인간을 부러워하고 다른 여인을 부러워 하고 말았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아리엘 티에르가, 너무도 부러웠다.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그들이, 그와 함께 여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이. 그와 함께 늙어갈 수 있고, 그와 함께 죽을 수 있는 그 여자들이 미친 듯이 부럽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아이리스 앞에서는 당신을 비롯한 다른 여자들이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기는 했었지만, 실은 그저 두렵기만 하였다.
그를 바라보며 느끼고 있는 너무도 지금의 이 시간을, ‘지겹다’라고 생각해버릴 미래의 자신이 두려웠다. 자신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이 경이롭고 행복한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게 될 미래의 자신이 너무도 역겹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그렇기에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바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품지 않았으며,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떤 소망을 품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 또한 카인과 함께 살아가고, 그의 곁에서 많은 것을 함께하며, 그와 함께 많은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리고 그 끝에, 함께 늙어죽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스스로의 죽음을 간절히 소망하고 말았다.
****
그것은, 그저 한 순간에 벌어진 일에 지나지 않았다.
구우웅-
“.....!”
무언가 이질적이고, 무척이나 꺼림칙한 소리가 에스텔 공작가를 뒤흔들고 있었다. 언뜻 들으면 그저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거친 파공성에 지나지 않는 소리.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하던 인원들 중에 일부는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비앙카.”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도 느꼈어. 카인.”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방금 전의 그것은 소름 따위가 아니다. 발끝에서 쩌릿쩌릿한 무언가가 올라와 정수리까지 단숨에 관통하는 듯한 이 꺼림칙한 감각은, 쉬이 잊을 수 있는 종류의 무언가는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설마, 이건.”
...그리고 나는, 언젠가 이러한 감각을 느껴본 경험이 있었다. 경험을 되살리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갈 것도 없었다. 내가 어찌 이 감각을 잊을 수가 있을까.
백색으로 표백된, 눈보라만이 휘몰아치는 새하얀 세상. 그 안에서 우리를 아래로 내려다보던 어느 여인. 그 여자가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를 발하였을 때 느낄 수밖에 없던, 싸늘한 오한이었으니까.
“...아리아.”
그것을 깨달은 순간, 비앙카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이리스나 아리엘을 부르러 갈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1분 1초가 급하였다. 지금 당장, 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을 해야만 했다. 대체 그녀의 신변에 어떠한 이상이 생겼기에, 과거와 같은 이런 감각을 내뿜고 있는 것인지 나의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비앙카!”
내가 비앙카를 급히 돌아보며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자, 비앙카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여 준다.
“마력의 역추적을 통해 위치는 이미 확인했어. 여기서 북서쪽. 거리는 대략 4km.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은 사실인데,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머지는 가면서 들을게. 꽉 잡아, 비앙카!”
“카, 카인!”
나는 한 쪽 손으로 비앙카의 허리를 꼭하고 붙든 후, 두 다리에 오러를 대전시는 것과 동시에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참고로 나의 집무실은 영주성의 최상층. 어지간한 건물의 9층 정도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막무가내에 고집불통 같으니!”
비앙카의 불평불만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낙하로 인한 충격 따위, 발에 집중되어 있는 오러 덕분에 모조리 상쇄되고 말았다. 지면에 발이 닿는 것과 동시에, 어림짐작으로 북서쪽을 가늠한 뒤 오러를 전신에 집중하고 발을 박차기 시작하였다.
“꺄, 꺄악-!”
어디선가 비앙카의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착각이 아닐 성 싶다. 그보다는 한 시가 급하기에 나는 급히 발을 놀린다. 오러로 강화된 나의 신체는 일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단순히 발을 한 번 박차는 것만으로도 몇십 미터 따위는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을 정도. 아마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나의 모습은 잔상 밖에 보이지 않겠지.
“빌어, 먹을-”
하지만 느리다. 다리가 찢어져라 지면을 차도, 비앙카를 품에 안은 채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을 낸다고 할지라도 내게 있어서는 너무도 느린 속도에 지나지 않는다. 애당초 비앙카가 아무리 가볍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한 명 안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고 만다.
“이, 나쁜 놈! 나는 하나도 신경 안쓰지! 어!”
가쁘게 토해내지는 호흡을 어떻게 해서든 참아내며, 그리고 비앙카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도 나는 두 다리를 놀리는 것을 끝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끝에, 나는 길고도 길었던 달리기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는.”
그곳은, 나의 기억에 없는 장소였다. 무리도 아니겠지. 왜냐하면 그 장소는 아무리 보아도 전쟁터의 한복판이었으니까.
“.....”
아름드리나무가 무언가에 파헤쳐진 듯 거칠게 부서지고 꺾여 있었다. 사방에는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났던 것처럼 움푹 파인 흉터가 이곳저곳에 존재하였다. 공터의 한 가운데에는, 마치 거대한 누군가가 대지라는 모루를 망치로 내려친 것 같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존재하였다.
“...아.”
현기증이 난다.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고 나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
크레이터의 한 가운데에, 내가 익히 알고 있던 하얀 머리의 소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숨결에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의 바로 앞에는, 아리아를 내려다보는 키리에의 뒷모습과.
내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챈 듯,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리아-!”
어느 쪽이든 이해가 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고 있는 아리아를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키리에와 아리엘을 무시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리아에게로 달려가기 위해 크레이터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카인! 진정 좀 해!”
“윽-”
급히 나의 어깨를 붙들며 나를 말리는 비앙카의 손길 때문에, 저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아무리 보아도 저 둘이 이 상황을 만들어낸 범인이잖아. 함부러 다가가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너도 아리아 저 여자 옆에 같이 세트로 드러눕고 싶어서 그런 거야?”
“.....”
비앙카의 그 말에 아주 조금이지만 머리가 식었다. 확실히, 비앙카의 말대로다. 언젠가 비앙카가 내게 말했다시피 아리아는 현세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여자이며, 다른 여자들이 힘을 합치더라도 겨우 동수를 이루는 것이 고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 본다면, 다른 여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아리아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이빨 정도는 닿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 따위 산처럼 쌓여 있긴 하지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어찌하여 저들이 아리아를 제압하였냐는 것이다. 대체 어째서, 키리에와 아리엘이 힘을 합쳐 아리아를 습격하는 일 따위가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히 듣자하니 말이 조금 심하군요, 비앙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카인을 손수 납치하고 감금하기까지 한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면 정말로 마음이 아프답니다.”
“...뭐? 키리에 당신, 지금 말 다했어?”
키리에의 말에 정곡이라도 찔린 듯 발끈한 모습을 보이는 비앙카.
“놀랍군요. 에스텔 공작가에서 여기까지는 그래도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텐데. 어지간히도 서둘러 온 것 같네요, 카인. 뭐, 그래봐야 이미 한 발짝 늦고 말았지만요.”
그리고 그런 비앙카와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음을 짓는 키리에.
“...키리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도통 모르겠다만, 장난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서 아리아를-”
“...장난, 이라고요?”
나의 그 말에, 키리에는 아주 살짝 심기가 뒤틀린 듯 자신의 눈썹을 움직이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장난 같은 게 아니에요.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의지로 그녀를 제압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뭐.”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저와 아리엘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희 둘의 목적이 합치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아리아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에, 다소 거친 수단을 사용해 그녀를 제압한 것이고요.”
키리에가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를 까닥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던 아리아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러니 다른 걸 몰라도 이번 일만큼은 당신께 양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애당초 이것을 위해 에스텔 공작가에 찾아왔던 것인걸요.”
그래, 전부 당신 때문이다. 카인 폰 에스텔. 당신이라는 사람 하나 때문에, 세상 어느 누구보다 질서를 신봉하고 지켜야만 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 앞장서서 이 세상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미친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덕분에 죽는다면 확실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테지만, 그 따위 것이 알게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인데.
다만, 이런 내게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기까지 달려오신 대가로, 한 가지 좋은 사실을 알려드리죠."
모든 것이 끝난 뒤, 카인 당신 곁에 내 자리가 남아있을까, 하는 자그마한 미련.
“불로불사 따위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 저의 단 하나 뿐인 목적은 바로.”
그러니 저를 끝까지 용서하지 말아주시길, 카인. 나는 당신에게 끝까지 악당으로 남아있고 싶으니까.
“다름 아닌 제 손으로 직접, ‘겨울의 마녀’를 죽이는 것이랍니다. 카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