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72화 (172/201)

(EP.172)16. 끝이 끝나기 전에 - 01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어느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 전, 태어나면서부터 가문의 의해 자신의 용도를 규정 받은 도구이자.

살아온 세월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시간에 걸쳐 완성된, 새장 속의 자그마한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 이제와 고백을 하는 것이다만 사라 세르나드는 카인 폰 에스텔과 약혼식을 맺고, 장차 자신과 그가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어떠한 감흥도 가지지 않았었다. 딱히 기뻐하지도, 슬프지도, 시시하지도,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아무리 도구로서 길러졌고, 태어난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용도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지만, 그녀 또한 세간의 상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몸이었다. 남녀가 혼인을 맺는다는 결혼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한 남자와 일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어떠한 동요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자신이 도구라고 할지라도 도구로서의 쓰임을 다하는 이상 어떠한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마음을 평소와 같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순간, 사라 세르나드는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다른 이들로부터 도구로서 용도를 규정받았으며, 도구로서 길러졌을지언정 사람의 마음만큼은 유지하고 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자신 또한 어느새, 세상의 모든 것을 숫자와 가치로서 파악하는 어른들 마냥 스스로를 도구로 여기는 일에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자신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딱히,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생활을 동경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자의 일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또한 아니다. 그녀는 그저, 고통만이 가득한 자신의 인생 속에서 고통을 덮어씌울 수 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의 일생 그 자체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약혼식 앞에서도, 그녀의 마음은 그 어떠한 파문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내어 버릴 수 있는 여자가 타인의 감정을 중히 여길 리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를 잘라내었으며.

그리고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와 재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굳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표현을 해보자면,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감동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통해, 도금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겼던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리는 감각을 맛보고 말았다. 양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던 자신의 신체에, 피가 세차게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덜컥하고 겁이 나고 말았다.

이 기적, 이 기쁨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그리고 자신 같은 여자에게 주어져도 괜찮은 것인지. 이미 한 번 그라는 남자를 잘라 내어버린 자신에게 그의 곁에 다가갈 자격이 있기는 한 것인지, 전부 다.

그렇기에 포기했다. 아니, 포기한 척을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한 줌 남은 미련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에 그의 주위를 추하게 맴돌며 그의 도움이 되어주고자 마음 먹었으며.

그리고 지금, 그녀는 모든 진실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오직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하여.

“.....”

사실, 어떻게 본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의 죄를 따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야 그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회귀 전에 일어났던 일 따위, 사라가 알고 있기는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하던 일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알지도 못하며 기억하지도 못하고, 하물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기까지 하다.

결정적으로, 카인은 그녀를 향해 어떠한 죄과도 물을 생각이 없지 않았던가. 과거, 황녀가 사라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그녀를 몰아붙이려고 하자 카인은 그런 황녀를 만류했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의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이해가 간다. 아마 그 때, 카인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보호해주며 자기 나름대로 감싸주었던 것임이 분명하겠지.

...하지만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황녀와 키리에가 했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의 기억에도 없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순순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라는, 지금 카인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과거, 그가 자신을 짝사랑했던 것처럼 그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짝사랑이란 녀석이 얼마나 너절하고, 가슴 아픈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사실 그에게 구함을 받은 그 날 밤,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를 향한 미련을 전혀 접지 못한 자기 자신이 있었다.

이스타드의 축제 날, 그와 잘 되었으면 한다며 아리아를 정성껏 꾸며주었지만 실은 둘의 데이트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남몰래 바라던 자기 자신이 있었다.

에스텔 공작가에 도착한 이후, 그가 다른 여자들과 사이좋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괴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자기 자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순애도 아니었고, 애절한 사랑도 아니었으며, 오직 한 명만을 바라보는 순수한 연심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그의 곁에 있는 다른 여자를 바라보며 질척질척한 질투심을 느끼며 아파하기만 하는, 후회로 가득 찬 시간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무려 10년. 자신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맛본 아픔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건만, 카인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이러한 고통을 줄곧 견뎌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제 아무리 이제는 전부 없어진 일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설사 자신의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는 일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그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10년간 아파했었다는 사실인 것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임이 분명하겠지.

그러니,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 스스로가 그가 느껴야만 했던 아픔에 책임을 지고 싶기에 자처하고 있는 일에 불과하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실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자신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자신 또한 그대로 겪는 것.

만약 자신이 누군가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입혔다면 그대로 배상을 해줘야 하며, 자신 때문에 아파하였다면 자신도 똑같이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그것을 보고 납득을 하며, 자신에게 용서를 베풀어줘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가 행한 일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이, 카인 폰 에스텔에게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가 느껴야만 했던 아픔에 대한 진혼(鎭魂)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인가.

“.....”

사라는 키리에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나뭇가지의 효능은 실로 간단하다. 키리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영육(靈肉)이 아닌 본질을 찌르는 단검이기에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빠르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던가.

사라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매만져 보았다. 나뭇가지의 끝은 너무도 뭉뚝하기만 하여, 설사 사람을 찌르더라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것만 같이 여겨진다. 이것을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는다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카인.”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실로 오랜 고민 끝에 사라는 한 가지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만 하며, 그에게 어떤 식으로 속죄를 해야 하는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자가, 카인 폰 에스텔을 향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이란 바로-

****

날이 점차 어두워져 가고 있다. 키리에는 얼마 전, 카인과 아리엘이 대화를 나누었던 후원의 외곽 쪽에 스스로의 등을 기댄 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

사실, 키리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늘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변함없는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상은 과거의 풍경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극심한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산 그녀가 보기에, 너무도 빠르게 변화를 하고 만다.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직 변화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비극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무료했던 마음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는 일들이 발생하고 말았다. 끝이 없는 겨울, 겨울의 마녀, 카인 폰 에스텔,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벌써 수차례나 일어났던 ‘회귀’라고 하는 현상.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수차례의 연극은 천 년에 걸쳐 누적되어 있던 그녀의 권태로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바가 있었다. 각기 다른 여인들이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었을 때, 대체 어떠한 선택을 내리는 가에 대한 그 결말을 마주하는 것은 의외로 재미난 구경거리임이 틀림없었으니까.

하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놀이는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할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조금은 진지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일어났던 회귀와는 달리, 카인의 곁에는 하얀 머리의 소녀, 아리아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천 년 전, 대륙에 존재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을 받던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져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애당초 인간 따위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더욱이, 그녀는 고작해야 2년이라는 시간 만에 마녀로서의 힘을 전부 되찾기에 이르렀으며 설상가상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여러 기억을 다시 되찾기까지에 이르렀다.

회귀 전, 그녀가 ‘마녀’로서 힘을 되찾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건만 이번에는 고작해야 2년이라는 시간 만에 모든 힘을 되찾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다면, 아리아는 대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란 말인가.

“.....”

중간 중간 자신의 악취미가 다소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키리에가 바라던 목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사라 세르나드에게 예의 ‘자살용’ 단검을 건네준 것도, 아리엘 티에르를 도발하여 그녀에게 목적의식을 불어넣은 것도, 전부 그러한 목적 때문이었다. 뭐, 주객이 조금은 전도된 경향이 있긴 하였지만.

세계수의 수호자, 키리에 엘 데나리스가 바라마지 않던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부스럭.

“...왔나.”

풀숲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여느 때와 같은 단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엘 티에르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이 깃들어 있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 아리엘의 두 눈은, 그녀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결정했어, 아리엘?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인가?”

그저 흥미본위로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리에의 그 말에, 아리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온다.

“예, 당신의 충고 덕분에 확실히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만약 한 아이의 엄마라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 명확히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것만큼은 당신께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키리에.”

‘거짓말.’

아리엘의 막힘없는 대답에, 키리에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저 여자는 지금, 무언가 다른 꿍꿍이속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따로 이루고픈 목적이 존재하기에, 자신의 뜻에 찬성하는 ‘척’을 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긴,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설사 저 여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은 비단 아리엘뿐만이 아닐뿐더러-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 둘이서 한 발짝 먼저 이 세상을 구해보도록 할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하나 뿐인 남편을 고생시키지 않고 힘든 일을 먼저 처리해 놓는 것이, 현명한 아내 된 이로서의 미덕이 아니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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