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71화 (171/201)

(EP.171)15. 설월화(雪月花) - 18

“...으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리엘은 그와 몸을 겹친 끝에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멍한 눈을 한 채로 창문 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장면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던 당시의 시각이 대략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갈 때 즈음이었으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대략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는 말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순간,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 탓에 아리엘의 얼굴이 확하고 붉게 변하고 말았다. 방금 전, 자신은 카인과 함께 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속삭였으며, 관계를 나누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격정적으로 그와 사랑을 나누던 자신은 그에게 매달려 교성을 지르고 매달리던 끝에 결국 정신을 잃어버렸으며, 시간이 지나 정신을 되찾고 눈을 떠보니 그는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으며 오직 자신 혼자만이 이 침대 위에 방치된 채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 여보...”

자신이 눈을 떴을 때 그가 자신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리엘은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하고 나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째서 그는 자신에게 어떠한 언질도 없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모습을 감추고 만 것이란 말인가.

사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에게 있어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상당히 부담되는 여자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신과 관계를 나눈 이후, 혹시 자신이 그를 귀찮게 할까봐 짜증이 난 나머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야. 그가, 그럴 리가 없어.”

순간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아리엘은 자신의 머리를 좌우로 힘껏 흔들며 부정하였다. 관계를 맺고 난 후, 흡사 기절이라도 하듯 잠들어버리고 만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다. 왜냐하면 어젯밤, 황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녀는 단 한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은 이대로 그에게 버려지게 되는 것인지, 자신은 정말 쓸모가 없는 여자가 되고 만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밤이 끝나버리고 날이 밝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서야 그와 몸을 겹치고 난 이후 흡사 기절이라도 하듯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전부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과관계를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아리엘은 점차 초조해져만 가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끝을 모르고 퍼져가는 불길한 망상이, 아리엘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남편이 그러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쁜 생각을 끝내 멈추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자는 겁쟁이인데다가, 울보였으며, 거기다가 나약하기까지 한 여자였다. 일찍이 자신이 믿어온 것을 전부 배반한 끝에, 오직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를 선택한 그녀였기에, 역설적으로 아리엘은 그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거나 혹은 그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극심한 아픔을 겪고는 하였다.

수많은 생명보다 단 하나의 생명을 우선시한 아리엘 티에르에게 있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카인마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다면 문자 그대로 살아갈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방금 전까지 아리엘이 생각하던 불길한 망상은 그저 망상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침대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의 탁자 위에, 그가 써놓은 것이 분명한 쪽지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 너무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신을 깨우는 게 미안해서 쪽지를 남기도록 할게. 미안하지만 나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보도록 할게.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조금 미안하지만 오늘만이 날은 아니니까. 다음에도 또 기회가 있겠지. 만약 내가 보고 싶다면 내 집무실로 찾아와줘. 당신을 반드시 환영해주도록 할 테니. 그리고 사랑해. 그것도 아주 많이. 참고로 당신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 조금은 귀여웠어.

“.....”

그가 남겨놓은 쪽지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그녀의 마음속을 점령하고 있던 나쁜 생각 따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섬세한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그는 처음부터 그런 남자였다. 자신과 함께한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는 단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며 자신 또한 그런 그를 줄곧 사랑으로만 응대해 주었다. 그러니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세상과 맞바꾸어 선택한 한 남자는,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던 남자임이 틀림없다-

탁자 위에 정성스럽게 개여 있던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해보던 아리엘은,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다. 실로 완벽했다. 이미 돌이킬 방도가 없이 흠뻑 젖어버린 속옷을 끝내 입지 못하고 주머니 안쪽 깊숙한 곳에 넣어 놓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겉모습은 이 방에 들어서기 직전까지의 정숙하고 이지적인 모습의 아리엘 티에르임이 분명하였다.

끼익-

이 방 안에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흡사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평소와 같은 나른함도 없고, 온 몸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것 같이 산뜻하기만 하다. 그가 자신을 아껴주고 안아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기가 이토록 맛있으며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만 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이전과 같은 이상한 망상을 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의 곁에서 행복한 매일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어머,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아리엘. 워낙 곤히 잠을 자고 있길래 나는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지나야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극히 유감스럽게도, 방 밖을 나서자마자 아리엘의 얼굴은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방문의 바로 앞에는, 마치 아리엘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마냥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키리에. 당신이 대체 이곳에 왜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고요.”

“그야 간단하지. 왜냐하면 나는 카인과 너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거든.”

“...처음부터요?”

순간, 아리엘의 표정이 약간 기괴하게 변하고 말았다. 처음부터라니, 저 여자가 말하는 ‘처음’부터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란 말인가.

“왜? 설마 네 사생활을 침해라도 했을까봐? 걱정하지 마. 나도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렇게까지 많이 훔쳐보지는 않았거든. 아, 그래도 네가 카인의 품에 안겨 앙앙거리는 장면은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지. 솔직히 말하면 신선했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애롭고 경건한 표정만 지어보이는 네가 그런 풀어진 표정을 지어보이다니.”

“...그 정도면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카인의 모습을 관음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아, 그런가? 불쾌했다면 미안. 하지만 이 정도쯤은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익숙해지다니요?”

키리에가 킥킥거리며 내뱉는 그 말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고 말았다. 익숙해져야만 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카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나신을 노출할 생각을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단 말이다. 오직 아리엘의 남편인 카인만이 그녀의 나신을 볼 자격이 존재하거늘.

“그야, 우리들은 모두 한 남자의 아내가 될 예정인 여자들이잖아? 그도 한 번에 한 여자만 상대하기 질릴 때가 찾아올 것이 분명하니, 우리들 모두가 한 침대 위에 오를 날도 존재하지 않겠어? 설마 그 때도 다른 여자에게 자신의 나신을 보였다며 숫처녀마냥 얼굴을 붉힐 작정은 아니겠지?”

“...그, 그게 무슨...”

키리에의 참으로 노골적인 그 말에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다소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남녀가 관계를 나눌 때면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을 하고 사랑을 해줘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자신 말고도 다른 여인이 침대 위에 올라 그에게 아양을 떨고 사랑을 갈구할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이미 그와 한 침대 위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카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저 말고도 다른 여자를 사랑해주긴 하지만, 저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오직 저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이기도 해요. 하물며 한 침대 위에 두 명의 여자를 불러 즐긴다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뭐, 카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긴 해. 하지만 앞으로도 그가 쭉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있기도 한가? 나도 남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원래 남자들이란 한 번에 다수의 여자를 상대하는 일에 커다란 로망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지.”

키리에가 자신의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을 하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의 으슥한 밤,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카인.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자신과 자신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비앙카. 이윽고 어둠 속에서 새하얀 살결 셋이 뱀과 같이 엉켜들며 하나가 된다는, 충격적인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그것을 원한다면, 저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어차피 당신을 비롯한 다른 여자들과는 앞으로 일평생 얼굴을 마주할 사이임이 분명하니, 고작해야 침대 위에서 그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모습을 보는 일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겠죠.”

“호오, 제법 대담한 포부가 아닐 수 없는걸. 그렇다면 만약, 비앙카나 내가 너와 같은 침대 위에 누워 카인과 뒤엉킨다고 해도 감당할 자신이 있어?”

키리에의 그 말에 아리엘은 아주 잠깐 주춤하고 말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는 듯 스스로의 고개를 끄덕인다.

“안될 것도 없죠. 당신과 제가 그렇게 화기애애한 사이가 아니기는 하지만, 제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를 믿고 사랑하고 있는 이상 제 감정을 우선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에요.

...사실, 그녀의 그 말은 완벽한 진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무척이나 욕심쟁이였던 지라, 한 때는 자신이 독점하고 있던 그를 다른 여자와 나누어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불만스럽기만 하였다. 하다못해 다른 여자들 중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카인은 여자들 중 어느 하나를 편애할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누가 보아도 공평하게 자신의 사랑을 여자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을 정확하게 5등분을 한 후, 그 중 한 조각을 자신에게 베풀어줄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은 회귀하기 전에 비하면 다섯 토막이 나버린 그의 사랑을 허겁지겁 받아먹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리엘은 카인을 사랑하는 만큼 그라는 사람에 대해 많이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였다. 알고 있다. 그가 오직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자만을 사랑해줄 수 없는 처지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그래? 그렇다면 네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황녀와 같은 침대 위에 오르고, 그녀와 그의 사랑을 반으로 나눠가지는 것 또한, 네가 용인할 수 있는 사실인가?”

"....."

키리에는 마치 아리엘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 그녀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아픈 부분을 실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리엘은 키리에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리엘 티에르는, 참으로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여자였으니까.

“아니, 황녀라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지. 현재 너와 황녀와의 사이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임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말이지, 네가 결코 잊을 수 없고 또한 잊어서는 아니 되는 문제가 하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잊어서는 아니 되는 문제라고요?”

키리에의 그 말에, 아리엘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움켜잡히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느낌이 오고 말았다. 설마, 키리에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래, 흔히들 이야기하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묻으면 가슴 속에 묻는다고. 아리엘 티에르. 설마 현재 네가 맛보고 있는 행복에 취해, 네가 무엇을 깜빡하고 있는지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할 심산인가?”

“.....”

키리에의 그 말에, 아리엘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입을 끝내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 대로였다. 자신은 지금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긴 하지만, 과거 속에 놔두고 와버린 티아의 존재만큼은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시간은 이미 한 차례 되돌려지고 말았지. 좋게 보면 너는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붙잡은 것이지만, 실상은 스스로의 자식을 그곳에 놓아두고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너는 모든 것을 내 팽긴 채 그의 옆에서 그저 사랑 놀음이나 할 심산인 것 같아, 정말로 우스워서 한 마디를 해보았을 뿐이야. 그것도 자신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말이지.”

“...원수, 라고요...?”

아리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을 하자, 키리에는 실로 아름답게만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지막하게 이리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장차 미래에 끝나지 않는 겨울을 불러온 끝에 세계를 멸망시킨 ‘겨울의 마녀’야 말로, 너의 자식을 죽인 진정한 원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런데도 너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와 카인의 사랑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 거야?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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