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69화 (169/201)

(EP.169)15. 설월화(雪月花) - 16

사방에는, 온통 비 냄새가 가득할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하늘에서 내리던 빗물을 온 몸으로 받아낸 형형색색의 꽃들은, 새벽녘의 이슬을 품고 있는 것 마냥 영롱하게 빛이 나는 물방울을 스스로의 품에 가득 품고 있는 중이었다.

에스텔 공작가의 후원에는 사람의 그림자 따위 찾아볼 수 없고, 이곳을 방문하려고 하는 자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후원의 한 쪽 구석,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껴안아주며, 서로를 향해 참회를 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하고, 그 끝에 서로의 죄를 사해주는 그 모습은, 흡사 신의 기적이 이 땅에 강림한 것만 같은 숭고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장면 따위,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자아내던 모든 장면을 관찰하던 키리에라는 여인에게는 너무도 시시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 참, 정말 재미없는 결말이 되고 말았네. 시시하긴.”

바람의 정령과 빛의 정령을 이용해 스스로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시야로부터 완벽하게 지우며, 어둠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통해 스스로의 기척과 흔적 또한 사라지게 한 키리에는 세상 어느 누구라도 그녀의 기척을 쉽사리 감지해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렇기에 특등석에 앉아 카인과 아리엘이 자아낼 비극을 특등석에서 조용히 관람하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그녀가 바라던 장면은 나오지 않은 채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저 훈훈한 희극으로서 마무리 될 모양인 것 같았다.

...과거, 한 여자는 한 남자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환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내고,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절망과 부조리가 다시는 반복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온 여자의 두 눈에는, 남자는 정말 믿음직스럽지 못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바뀌었다.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것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간 끝에 인형에 불과하던 그녀는 한 명의 여인이 되어 그를 사랑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 끝에, 여자는 도망쳤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살아가게 하던 맹세를 져 버린 채, 오직 남자 하나만을 사랑하고 그만을 바라보았으며 그와 함께 대륙의 끝까지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남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그저 지식으로서만 알고 있을 뿐, 당시 그녀가 느껴야만 했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한다. 아마,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을 ‘안다’라고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 수준임이 분명하겠지.

키리에는, 이번 생에 마주한 두 남녀가 서로 엇갈리기만을 바라였다. 서로가 서로의 진심을 오해하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곡해한 끝에, 서로가 서로를 매도하기만을 바라였다.

왜냐하면, 하하호호 웃고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보다는 그게 더 재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보고 싶었던 장면 따위, 끝내 연출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있는 이것이다. 서로를 꼭하고 끌어안고 있는 한 쌍의 남녀. 상대방을 사랑해마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절실히 보여주고 있는 단 하나의 명확한 증거.

지금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다시금 서로를 향해 품고 있는 연심을 확인하며, 그 끝에 서로를 향해 더욱 깊은 사랑을 품고 있는 중임이 분명하겠지. 그것은 실로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런 결말 따위, 키리에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시시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말이 해피 엔딩이지,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틀에 박힌 진부한 엔딩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참고로 말하자면 그녀는 해피 엔딩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지나지 않을 뿐. 그래, 아주 조금.

“...스스로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택하였구나. 아리엘 티에르.”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결말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실로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때와 같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장면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쉽게 화해를 하고 쉽게 오해를 푸는 것 또한 시시한 일임이 분명하였다.

카인 폰 에스텔과 아리엘 티에르는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오해를 하고, 갈등을 빚으며, 반목하는 모습을 보였어야만 했다. 자고로 남녀 간의 갈등, 그리고 치정극만큼이나 질척질척한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 둘 사이에서 거무칙칙한 어떠한 광경이 연출되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어둠 속에 숨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주는 간접적인 조언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조율하는 것에는 한계점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만일 키리에가 계획했던 대로 일들이 풀려나갔더라면, 지금까지 그녀가 그려나가고 있던 거대한 퍼즐 조각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들어맞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텐데.

“하기야, 일이 그렇게 쉽게 풀려나가서야 재미가 없기도 하지.”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 모든 것이 현실에 재현된 끝에 일이 술술 풀려나간다면 어떠한 종류의 성취감만은 가득할 테지만, 반대급부로 재미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겠지. 자고로 무언가에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예측은커녕 기대하지도 못했던 장면이 수없이 연출되어야만 하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직 키리에가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카인, 혹시 그거 알고 있나요? 여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질척질척한 감정은 애정도, 연심도, 육욕(肉慾)도 아닌, 자식을 향한 모성애라는 것을.”

그러니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된다며,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상대방을 끌어안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키리에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러한 말을 중얼거린다.

저토록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남녀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것은 키리에로서도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임이 아닐 수 없었느나, 이를 어찌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평상시에 그녀가 즐기던 유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의 영역인 것을.

...물론, 키리에의 악취미가 다소 섞여 있는 일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만.

****

방금 전 둘이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였을 무렵, 아리엘은 카인을 향해 이러한 말을 하였다. 티아를 다시 보고 싶다고. 한시라도 빨리 티아를 다시 만나고 싶으니, 자신을 어서 꼭 하고 품어달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면서 동시에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다. 과거, 카인이 아이리스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으며 그녀가 3개월 후에 이렇게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해본 적이 없듯이, 마찬가지로 지금 카인이 아리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3개월 뒤의 그녀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될지 안 될지는 오직 여신만이 알고 계실 사실이리라.

하지만 카인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뒤쪽으로 꽁무니를 뺄 생각은 추호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비록 일의 성사라는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애당초 사람이 일 자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일의 성사가 갈릴 수가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카인이 하고 있는 행동은 아리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확률을 최대한도로 높여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의 결정체임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줍은 듯 그를 바라보며 그의 귀에 대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 라는 말을 속삭여오는 아리엘이라는 여인이 너무나도 귀여워보였기에,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오전 중인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그를 향해 무언가가 걱정된다는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리엘의 모습을 보며, 카인은 그녀가 괜한 걱정을 다한다는 듯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건 지극히 간단한 산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당신의 말마따나 티아를 최대한 빨리 보고 싶다면, 밤뿐만이 아니라 낮에도 최대한도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당신에게는 내가 하는 행동에 최대한도로 협조를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말을 하며 카인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더니, 그녀의 몸을 그대로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은 아주 가벼웠고, 그리고 매우 싱그러운 냄새가 나고 있어 도저히 한 아이를 낳은 애엄마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 같은 매력이 가득하였다.

‘...아, 아직 아리엘은 애엄마가 아니지.’

아리엘이 엄마가 되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지만, 회귀의 영향으로 인해 카인은 그러한 사실을 자주 깜빡하고는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색(色)을 알지 못하는 처녀를 대하듯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경험이 있는 여인을 대하듯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것은 쉽사리 답을 낼 수가 없는 심오한 고찰임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 별로인가? 아니면 오늘은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다던가?”

왠지 모르게 자신을 꺼려하는 기색을 내비추고 있는 아리엘을 향해 그러한 질문을 던지자, 아리엘은 잽싸게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래?”

“...저, 그게. 사실-”

아리엘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대답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이내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눈초리로 그에게 아주 작게 속삭인다.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혹시 당신께서 저를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까봐...”

그를 향해 수줍게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카인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억눌러야만 하였다.

“...전혀. 당신은, 무척이나 예뻐.”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아내며, 카인은 아리엘을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둔 채 그녀의 새하얀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가, 간지러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아리엘은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카인을 거부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달뜬 숨결을 쌕쌕하고 내뱉으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은은한 기대감을 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로맨틱한 것 같아요. 정말로.”

“뭐가?”

“10년 전에도 제 처음은 당신이었는데, 이번의 처음도 당신이잖아요. 저의 처음은 언제나 당신이 되어주는 것이 너무도 기뻐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리엘의 그 말에 이미 첫 경험은 비앙카와 함께 해버린 전적이 있던 카인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시간을 되돌릴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해줄게, 아리엘.”

그녀의 살갗을 어루만지던 카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골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그녀가 입고 있는 상의를 순식간에 풀어헤치기에 이르렀다.

“...아, 으... 거기는...”

아리엘은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두 손으로 스스로의 가슴 어귀를 가린다. 아리엘의 길다란 보랏빛 머리카락이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는 나머지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와 가슴의 자태를 가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여기는, 티아를 위한 곳이잖아요... 너무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는 말아주세요...”

“싫은데.”

카인은 피식하고 웃으며 가슴어귀를 가리고 있는 아리엘의 손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아리엘의 가느다란 두 손은, 카인의 힘에 도저히 저항을 할 수가 없다는 듯 침대 바닥으로 나뒹굴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순수한 완력으로만 따지자면 아리엘의 힘은 카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겠지만 그런 힘의 논리 따위, 침대 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상식에 불과하였다.

“티아한테는 열 달 뒤부터 양보해주도록 하지. 아니, 열 달 뒤에도 당신의 가슴은 두 개나 되니까 나한테도 하나쯤은 양보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중력을 최초로 발견한 과학자가 된 것 마냥 명쾌한 어조로 해답을 떠올린 카인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귓불을 아주 살짝 깨물어 온다.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 깨물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이야기 하듯.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는, 오직 당신밖에 없어. 다른 것들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떠올리지도 않을 거야. 내 눈앞에 있는 당신에게만 성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겠어. 그러니까-”

카인은 아리엘의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치마를 들추고 다리를 벌리게 하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그대로 으스러뜨릴 것만 같이 꼭하고 껴안는다.

“당신도 최선을 다해줘. 하루 빨리 티아를 보고 싶다면, 내 말에 순순히 따르고 협조를 하는 것이 당신에게도 이로운 일이라 생각하거든. 안 그래?”

자기 자식조차 인질로 삼는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카인은 아리엘의 자그마한 입술에 그대로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카인 폰 에스텔이라고 하는 남자가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지식의 형태로서나마 건네받은 기억에 따르면, 아리엘과 함께한 ‘카인 폰 에스텔’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밤의 침대 위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겪지 않은, 절대강자임이 분명하였다.

비록 지금은 밤이 아니라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긴 했지만, 그 정도 오차 따위는 그다지 큰 대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낮이건 밤이건 간에, 그가 승리를 거둔다는 것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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